# 18
018화 타자들이 다르다 3
팡.
바깥쪽 약간 높은 볼. 잡아줄 만한 코스와 높이인데 주심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우민섭도 볼일 줄 알았다는 듯 미동이 없다. 성낙기는 같은 코스로 커브를 던졌다.
팡.
이번에야말로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했는데 손이 올라가지 않는다. 이두열도 이상한지 공을 받는 자세 그대로를 유지, 주심에게 무언의 항의를 전했다.
이런 적은 거의 없었다. 분명 스트라이크인데 잡아주질 않다니. 성낙기는 속으로 난감했다.
-어이, 저 주심은 바깥쪽에 인색하다. 높은 스트라이크 존에도 마찬가지야. 그런 공 백날 던져봐라, 먹어주나.
실바가 성낙기 뒤에서 주심을 가리켰다.
“그럼 어떻게 던지라고요.”
-심판마다 자신의 스트라이크 존이 다 달라. 저 심판의 경우는 몸 쪽이 후하게 되어 있어. 그리고 낮은 스트라이크 존에도 후할 거야. 다들 가지고 있는 스트라이크 범위는 비슷해. 다만, 그 스트라이크 존을 어디로 설정하는가에 관한 문제지. 지금까지의 심판과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지. 무슨 뜻인지 알겠지?
“모르겠는데요.”
팡.
성낙기는 말을 마치자마자 타자 몸 쪽으로 포심패스트볼을 던졌다.
몸 쪽에 꽉 차면서 타자 무릎을 파고드는, 일반적으로는 스트라이크를 잡아주기 애매하고 그래서 아예 자신의 존에서 지워 버리는 심판들이 많은 코스.
쳐봐야 안타가 나올 확률이 희박하고 파울이 대부분인 코스다.
스트라이크.
억, 성낙기는 자기가 던지고도 놀랐다. 저걸 잡아주나 싶었던 것. 타자 우민섭은 주심을 슬쩍 쳐다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심판 뭐야? 이걸 왜 잡아줘?’
우민섭이 그려 놓은 스트라이크 존에서 살짝 빠지는 공인데 그걸 스트라이크 선언하는 심판. 방금 전, 바깥쪽 공에 목석처럼 서 있던 심판이 아니다.
우민섭은 공 하나를 더 보기로 마음먹었다. 성낙기의 공도 공이지만 주심의 존을 파악할 필요를 느꼈다.
리드오프 타자로써 팀원들에게 주심의 성향에 대해 이야기 해주어야 할 의무도 함께 느꼈다. 누가 보면 오지랖이라 하겠지만 자신은 2군의 일반적인 타자가 아니다.
수위타자를 다투는 데다 제대하면 1군 콜업이 확실시되는 주전 중의 주전 아닌가.
팡.
성낙기의 공은 다시 한번 몸 쪽을 파고들었고 주심의 손은 기다렸다는 듯 올라갔다. 이번 공은 몸 쪽 약간 높다 싶었는데 스트라이크다.
-거봐, 내 말이 맞지? 오늘 경기는 지금까지처럼 바깥쪽으로 승부를 거는 패턴은 버리는 게 좋을 거다.
“계속 몸 쪽으로 승부하라는 거죠?”
-흠, 확실히 문제가 있어. 몸 쪽은 아무래도 부담스럽거든. 제구가 잘 되지 않으면 큰 타구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지. 낙기는 털보 너랑 다르지.
실바와 존의 의견이 약간 다르다. 실바는 몸 쪽을 적극적으로 공략하자는 의견인데 존은 몸 쪽만 고집하지 말고 던지자는 것. 그러니까, 바깥쪽을 잡아주지 않더라도 평소의 루틴을 지키자는 쪽에 가깝다.
성낙기는 갈등했다.
실바의 의견대로 던지다가 실투가 나오면 큰 것과 직결되는 단점이 있고 존의 의견대로 던지다가 바깥쪽 공에 타자의 배트가 따라 나오지 않으면 볼 카운트가 불리해진다.
이런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제구력이 아직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어요. 경기를 진행하면서 상황을 지켜볼 겁니다.”
성낙기는 짤막하게 말하고는 또 몸 쪽에 공을 찔러 넣었다. 이번엔 퀘이크볼이었다. 퀘이크볼은 라이징패스트볼과 마찬가지로 체력 소모가 상대적으로 많지만, 타자가 우민섭이라면 감수하고 던져야 한다.
(포심패스트볼(65/100)+퀘이크볼(1.5cm/5).
따악.
경쾌한 배트 소리. 역시 뭔가 다르다. 1군에서 수준 높은 투수들의 공을 상대해 본 우민섭이 친 공은 3루 땅볼. 정확하게 맞은 공은 아니었지만 안학규가 겨우 막아냈을 정도로 빠른 타구였다. 안학규는 수비에 강점이 있는 선수답게 우민섭을 1루에서 아웃시켰다.
‘퀘이크볼을 가볍게 쳐냈다.’
성낙기는 내심 뜨끔했다. 아웃 카운트를 잡아냈어도 깔끔한 느낌이 아니다. 퀘이크볼의 떨림이 최근에 더 올랐고 다른 팀 타자들은 좀처럼 강한 타구를 만들어내지 못했는데 우민섭은 상관없다는 듯이 때려냈다.
다음 타자에게도 성낙기는 실바의 조언대로 몸 쪽 위주의 투구를 했다.
바깥쪽에 두어 개 던져봤지만 여전히 주심은 인색했다. 다음 타자는 외야 플라이로 간신히 잡아냈다. 이어 3번 타자가 타석에 섰다.
김동선. 그는 오리지널 1군 타자다.
은성캣츠 1군에서도 3번을 도맡아 치던 타자인데 프로 통산 4년 동안 3할1푼4리에 94개의 홈런을 때려냈고 도루도 45개에 달할 정도로 호타준족이다.
전형적인 중장거리 타자이면서 발이 빠르고 선구안까지 좋아서 4할에 육박하는 출루율을 기록 중이다.
성낙기가 1구로 던진 공은 라이징패스트볼(3cm/10). 현재 최대 구속이 130km이니 상당한 위력이 있다.
게다가 보통 라이징패스트볼이 가라앉지 않는 것을 뜻한다면 성낙기의 라이징패스트볼은 3cm에 접어들고부터는 살짝 떠오르는 느낌이 들 만큼 타자 앞에서 살아 들어온다.
따악.
그런 공을 가차 없이 휘두르는 김동선. 1구부터 노리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공은 우익수 쪽으로 높이 치솟아 1루수의 키를 넘기고 달려오는 우익수 바로 앞에 떨어졌다. 텍사스성(이 용어는 내야수와 외야수의 어느 선수도 잡을 수 없는 삼각지대로 떨어지는 빗맞은 안타를 뜻한다. 1880년대 말 텍사스리그에서 이런 안타가 많이 나온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안타.
이 정도의 라이징패스트볼이면 타자는 볼이 솟는 느낌일 테고 공이 눈에 익지 않은 상태에서는 헛스윙이나 얕은 플라이 볼이 나올 각인데 김동선은 힘으로 그걸 이겨냈다.
‘헐, 역시 경찰청인가? 타자들이 다르다.’
성낙기는 놀라고 있었다. 전력투구한 퀘이크볼이나 라이징패스트볼이 헛스윙 없이 곧잘 맞아나간다.
수비가 약한 삼호슈퍼스타즈의 내외야로 경찰청 타선을 얼마나 막아낼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색은 안했지만 1루로 나간 김동선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분명 빠르지 않은 볼이고 타이밍이 잘 맞았다고 여겼는데 마지막에 배트가 밀렸다. 정상대로라면 좌익수 방면이거나 중견수 방면의 안타여야 하는데 정작 타구는 우익수 쪽이다.
게다가 잘 맞은 타구도 아니었다.
김동선이 때려낸 공은 1루수 키를 넘기고 강한 스핀이 걸린 채 페어지역을 맞고 파울 지역으로 굴러갔다.
‘뭐야, 저 종속은? 무슨 볼인데 살아 날뛰는 것 같지?’
김동선은 오늘 경기가 만만치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스 현호석이 출격한 경기지만 상대 투수 또한 때려내기 힘든 공을 던진다.
성낙기라는 이름도 생소한 데다 이상한 구질을 가지고 있다. 김동선의 생각은 곧바로 4번 타자의 스윙으로 드러났다.
100kg의 거구인 김대균은 전형적인 공갈포 타자인데 연속 헛스윙으로 첫 타석을 마감했다.
***
“저 투수 누구지? 삼호에 저런 선수가 있었나?”
기자석에 있던 스포츠 나인(sports nine)의 이용진 기자는 에이전트 김계윤에게 물었다.
김계윤은 로펌 변호사 출신으로 MLB(Major League Baseball)와 NPB(Nippon professional Baseball)에 무려 7명의 선수를 보낸 에이전트이기도 했다. 순전히 야구가 좋아 에이전트가 된 케이스.
일본 프로야구로 보낸 두 선수는 1군에서 활약 중이고 미국 프로야구로 진출한 다섯의 선수들은 트리플에이(triple A)와 더블에이(double A) 등에서 뛰고 있지만 아직 주전 메이저리거가 되지는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트리플 A에서 뛰는 이호연과 장태식은 메이저와 트리플 사이를 오가는 중이다.
올해만 해도 이호연이 불펜으로 두어 경기 나갔으나 던지는 족족 통타를 당한 뒤 다시 마이너로 내려갔다.
김계윤으로서는 아쉬운 대목이다.
아직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에이전트라는 직업을 각 프로 구단에 각인시키기 위해서는 아마추어 출신보다 KBO 프로 선수를 MLB로 직행시키고 그 선수의 좋은 활약이 뒤따라야 한다.
그동안 KBO 선수들의 MIB 진출은 미국 에이전트들의 차지였다.
아니, 왜 한국 선수가 외국 에이전트를 고용한단 말인가.
말도 정서도 잘 통하지 않는 외국인을 말이다.
김계윤은 그게 늘 불만이었고 언젠간 자신의 손으로 그럴듯한 KBO 출신의 메이저리거를 배출하고 말겠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성낙기는 묘한 투수다.
단지 1회를 던졌을 뿐이지만, 공 몇 개만으로도 투수를 파악하는 데 이골이 난 그에게도 성낙기는 좀체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나온 대답은,
“나도 처음 보는 투순데 답이 안 나오는 공을 던지는군. 보기 드문 궤적을 가지고 있어.”
말하는 도중 경찰청의 현호석이 마운드에 올랐다.
25세의 나이에 최고 구속 148km를 던질 수 있고 슬라이더와 커브도 상당한 수준이다. 체계적인 훈련과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150km대까지도 던질 만한 여지를 가지고 있다. 저 정도면 지금 당장에라도 트리플 A에서 뛸 수 있다.
김계윤은 현호석의 공을 스피드건(speed gun)으로 체크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오늘 현호석 보러 왔나?”
“아니지. 현호석은 이미 에이스급인 데다 신인이라서 구단이 내줄 리가 없지.
“자유계약선수로 풀어주면 가능하지.”
“푸후, 이제 막 쓸 만한 투수를 풀어준다고? 누구나 납득할 만한 공헌이 없다면 어림없는 소리지. 아니면 애초에 계약을 그렇게 하든가. 다른 선수 보러 왔어.”
“누구 말인가.”
“맞춰 보게.”
“우민섭 아니면 김동선이겠지.”
“땡, 이중호일세.”
“이중호? 삼호에 덩치 큰 선수 말인가?”
“그래.”
“아직 새내기일 뿐인데? 뭐 요즘 제법 친다는 건 알고 있지만 자네 레이더에 걸릴 수준이 되는지 모르겠군.”
“대어야. 아직 2군이니 특별히 눈여겨 볼 사람도 없을 테고. 있다 해도 더 두고 보겠지. 확신이 들 때까지.”
“이중호 역시 새내기일세.”
이용진 기자의 말은 같은 새내기급인데 현호석은 안 되고 이중호에게는 관심을 갖는 이유를 묻고 있다.
“그렇지. 다른 팀이라면 쳐다보지도 안 보겠지. 하지만 구단주가 김현중에다가 김아경 스카우트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번듯한 메이저리거 키워낸 자부심만으로도 감격해 할 부녀니까.”
“하여튼 빈틈 파고드는 데는 뭐 있어. 트리플에이 장태식도 다들 눈치 작전 하는 틈에 날름 주워 먹더니만.”
그런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김계윤은 성낙기의 볼에 혼란스러웠다.
‘정말, 성낙기의 아까 그 볼은 뭐였지? 너클볼은 아닌데 볼 궤적이 불규칙적이야.’
-야아, 역시 현호석이네. 삼호 타자들이 볼을 건드려보지도 못하잖아.
-1군에서도 에이스급 투수였는데 2군 타자들이 쳐내면 그것도 이상하지.
-강찬선은 완전 선풍기, 크크.
-오, 이중호는 그래도 제법이다. 이번 공 페어지역 들어갔으면 안타였어.
-페어지역 들어갔으면 플라이 볼 아웃이지.
시청자 게시판에 댓글이 올라오는 동안 이중호는 현호석의 몸 쪽 꽉 찬 볼을 건드려 먹힌 타구로 우익수 플라이 아웃을 당했다.
이중호는 실망스러운 나머지 1루로 뛰어가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현호석의 생각은 달랐다.
‘완전히 먹힌 타구였는데 우익수 키를 넘길 뻔했다.’
현호석은 다음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내고 마운드를 내려왔다. 성낙기는 이중호도 적응하지 못하는 현호석의 공을 보고 감탄했다.
묵직한 포심에 슬라이더가 일품이다. 키는 성낙기보다 조금 클까 싶지만 몸무게는 꽤 차이가 나 보였다.
성낙기는 75kg 정도인데 현호석은 언뜻 보기에도 90kg에 육박한다. 몸무게와 손의 악력으로 찍어 누르는 공의 묵직함에 타자들은 속수무책.
“야아, 2군에도 저런 투수가 있었네? 뭐야 오늘 성낙기 무패 전적에 스크래치 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