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017화 타자들이 다르다 2
‘흐흐흐… 미친다, 정말. 안 그래도 열 받는데 이걸 확 패버려? 패고 개 값을 물어?’
성낙기는 글러브를 끼고 씩씩거리는 허봉호 감독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 딴엔 확신을 심어주려고 눈알을 부라렸는데 그러다 보니 약간 맛이 간 놈 같아 보였다.
허봉호 감독은 슬쩍 불펜으로 눈을 돌렸다.
어제 30구 가까운 볼을 던진 구문철이 몸을 풀고 있다.
‘가만, 애가 전에도 위기 상황을 막아냈지?’
허봉호 감독은 선발로 진입하기 전의 성낙기를 떠올렸다.
몇 차례 스윙맨으로 나가서 실점 위기를 잘 막아냈었다.
‘에라, 모르겠다.’
“성낙기 나가. 그 대신 실점하면 알아서 해.”
성낙기는 감독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더그아웃에서 달려 나갔다.
그동안 이계현 코치는 안민기의 공을 받아들고 불펜을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구문철이 불펜에서 나와 마운드로 향했다.
허봉호 감독이 구문철을 손짓으로 제지했고 성낙기는 그대로 마운드로 올라갔다.
“야, 왜 니가 올라와.”
“감독님이 저보고 나가라고 했습니다.”
“헐, 어이가…….”
이계현 코치는 말을 하다말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성낙기에게 공을 넘겼다. 성낙기는 공을 받아들고 안민기에게 말했다.
“걱정 마. 병살타로 깔끔하게 끝내 버릴게.”
“저기서 성낙기를 투입하나? 어제 던진 투수를?”
“감독 이상한 거 아냐?”
“저러다 어깨 아작 나겠네.”
관중들은 성낙기를 보고는 수군거렸다.
-허허허, 어제 던져놓고 나가겠다고 우기는 놈이나, 내보내는 감독이나 참 적응 안 된다. 이런 건 mlb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야.
-너 시스템 믿고 날뛰다가는 큰 코 다칠 때가 있다. 본인 어깨도 생각 해야지.
실바와 존이 충고 비슷하게 말했다. 성낙기는 그보다 팀이 지는 게 더 싫다. 성낙기의 선발일은 아니지만 1패도 하지 않겠다고 장담했던 김아경이 보고 있을 것이고 어제 끝까지 괴롭힌 안강피그스 선수들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다. 하마터면 약속을 지키지 못할 뻔 하지 않았는가.
“지고는 못 살아요.”
상대타자는 어제 성낙기의 공을 땅볼로 연결해서 에러로 진루했던 선수. 성낙기는 1구로 무심하게 포심패스트볼을 던졌다.
스트라이크.
어렵게 갈 줄 알았던 타자는 이것 봐라? 하는 표정. 어제 5점이나 내준 투수가 트라우마도 없이 초구부터 스트라이크를 넣을 줄은 몰랐다. 성낙기는 2구로 바깥쪽 높은 코스로 투심을 던졌다.
스트라이크.
투심을 던져서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은 건 거의 처음 같다. 이 주심은 높은 공에 후한 듯.
타자는 약간 열이 올랐다.
어제의 성낙기가 이런 위기에서 연속으로 투 스트라이크를 꽂아 넣는 건 자신이 알아온 야구 지식에 맞지 않는다.
자신을 우습게 보는 건가, 싶기도 하고 조금 긴장도 된다. 다음 공은 체인지업. 몸 쪽으로 붙여서 스트라이크 존으로 날아왔다.
따악.
삼진 아웃을 당할 수는 없기에 타자는 배트를 휘둘렀다. 배트는 공의 윗부분을 때려 유격수 앞으로 굴러갔다. 유격수 이정우는 타격도 타격이지만 수비도 나름 괜찮은 선수. 잡아서 2루에 던진 후 2루수가 재빨리 1루로 송구 아웃. 3구만에 병살타로 공수 교대. 성낙기는 관중석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봤어요? 3구만에.”
성낙기가 고개를 돌려 실바와 존에게 말했다.
-크험, 그야 봤지. 내 말은 어깨가 상하니까 그런 거야. 3구나 30구나 던진 건 던진 거지.
더그아웃에서는 다들 놀라는 표정이 역력했다. 내심 구문철 대신 성낙기를 올린 것에 의아해 하던 이계현 투수 코치도 놀라고 있었다. 위기 상황에서도 별로 떨지 않고 곧잘 던지는 놈인 줄은 알았지만 이토록 간단하게 병살 처리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허봉호 감독도 성낙기를 다시 봤다. 하도 자신만만해 하니 속는 셈치고 내보낸 것인데 기대 이상이다.
성낙기가 위기를 넘긴 뒤 분위기가 살아났고 삼호슈퍼스타즈는 6회에 이중호의 볼넷과 다음 타자의 안타, 포수 이두열의 2루타로 1득점, 원아웃 1, 3루에서 희생타로 다시 1점을 추가해서 4:3으로 경기를 뒤집어 버렸다.
성낙기는 7회에도 마운드에 올랐다. 포심패스트볼 위주로 던지다가 하위 타선에 바가지성 안타를 하나 맞았지만 이닝을 깔끔하게 마무리 짓고 구문철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어제 투구 수가 많았던 구문철이 한 타자만 상대하고 이오수가 9회 원아웃까지 무실점 선방했고 임병주가 마지막 두 타자를 잡고 경기를 끝냈다.
이로서 안강피그스를 상대로 이틀 연속 승리.
3연전 2승 1패로 위닝 시리즈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6회 원아웃까지 던지고 내려간 안민기가 승리투수로 기록되었고 성낙기는 홀드를 챙겼다.
***
현재 성낙기의 능력치는 다음과 같다.
[세기의 강속구 (65/100)]
[슬라이더의 위력 (51/100)]
[체인지업의 위력 (58/100)]
[포심의 제구력 (56/100)]
[커브의 제구력 (59/100)]
[포크의 제구력 (15/100)]
[투심의 제구력 (13/100)]
라이징패스트볼 (3cm/10)]
퀘이크볼 (1.5cm/5)]
거기에 체력 (60/100)
팔 근육 강화 (2/10)
어깨 근육 강화 (2/10)
악력(3/10)
근래 들어 시스템과 성낙기의 친화력이 높아졌고 그에 따라 성낙기는 원하는 때에 상태 창을 불러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65/100)의 공 스피드에 대한 물음표를 떠올리면 상태 창이 [최대 구속 130km를 던질 수 있습니다.] 라고 친절하게 눈앞에 나타났다.
헤이드 존의 주 무기인 세기의 강속구와 슬라이더, 체인지업은 위력이라는 글자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았고, 드랙 실바의 주무기인 포심, 커브, 포크, 투심은 제구력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았다. 언젠가, 실바와 존에게 능력치에 관한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세기의 강속구와 포심이 뭐가 다르죠? 둘 다 직구 아닌가요?’
-다르지. 존의 강속구는 존이 살아 있을 때 전성기에 던졌던 정도의 스피드와 제구력을 갖고 있지. 거기에 나 드랙 실바의 제구력이 가미되는 거야. 어때 죽이지? 스피드와 제구력이 동시에 높아지면서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이랄 수 있겠지.
그리고 이게 상호보완적이야.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은 존의 주 무기인데 상태 창엔 위력으로 나오는 이유는 스피드가 동반된 업그레이드 과정이기 때문이야. 네가 존에게 물려받는 건 강속구와 슬라이더, 체인지업의 변화이고, 나에게 물려받는 건 내 전성기 때 공 변화의 궤적과 제구력이다.
‘그래도 뭔가 이상한데요?’
-뭐가?
‘그럼,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은 위력만 있고 제구력은 없나요? 강속구와 포심은 둘 모두 같은 구종이니 스피드와 제구력이 함께 잡히고 커브나 포크, 투심도 당연히 스피드의 영향을 받겠죠. 그렇게 보면 다른 건 모두 상호보완적인데 슬라이더와 체인지업만 빠졌네요.’
그때, 상태 창이 나타났다.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의 위력엔 제구력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즉, 말인즉슨 강속구가 높아질수록 슬라이더 체인지업의 위력도 높아지고 자동적으로 제구력도 향상된다는 의미였다.
그래봐야 실바보다는 떨어지는 헤이드 존의 전성기 제구력이겠지만. 즉, 같은 직구 계열인 세기의 강속구는 실바의 제구력까지 덤으로 받지만, 나머지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은 그렇지 않다는 의미.
하지만, 존의 전성기 슬라이더와 체인지업은 감히 건드리기도 힘든 구종이었음을 생각하면 전혀 아쉬운 일이 아니다.
-많이 던지면서 스피드와 제구에 집중할수록 능력치가 높아질 거다. 물론, 경기에 나가서 업적을 쌓으면 능력치 향상이 크지만 연습이 없이는 더딜 거야. 모든 일이 그렇듯이 위로 올라갈수록 더 어렵지.
실바의 말대로 현재까지는 무난하게 능력치를 올렸지만 앞으로는 다를 것이다. 존의 말대로 뒈지게 던지는 수밖에.
성낙기는 안강피그스를 스윕한 날부터 경기가 끝나고도 죽어라 공을 던졌다. 잠도 안 자고 경기장에 홀로 남아 불펜에서 200구 이상을 던지고서야 숙소로 갔다. 이계현 코치는 어깨를 염려하여 부정적이었지만 허봉호 감독의 허락이 떨어졌다.
‘저런 애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는 것도 괜찮아. 아직까지 피로한 기색도 없고 구속도 갈수록 늘고 있어.’
허봉호 감독은 성낙기가 참 특이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위기에서 떨지도 않고 오히려 더 강해진다. 구속만 따라주면 마무리에도 잘 맞는 강심장을 지녔다.
감독의 배려 속에 성낙기는 공을 던지고 귀가했고 능력치는 조금씩이나마 계속 올랐다.
선발 경기를 치른 날도 쉬지 않았다.
그 결과 체력은 63으로 올랐고 어깨와 팔의 근육은 3단계를 찍었다. 근육의 단계가 올라간다는 건 그만큼 공을 던지고 나서 피로도가 덜하고 회복도 빠르다는 뜻이다.
그동안 팀은, 투타의 안정 속에 승리하는 날이 많아졌다. 7월 들어 중순까지 거의 승률 7할에 육박했다. 어느새 중외울프스를 제치고 4위. 은성캣츠와는 2.5경기 차에 불과했다.
안강피그스는 삼호슈퍼스타즈와의 루징시리즈 이후로 눈에 띄게 사기가 떨어져 두 팀의 승차는 6경기로 줄어들었다.
올스타브레이크를 코앞에 둔 7월 10일, 드디어 1위 경찰청과의 3연전이 내일로 다가왔다.
자그마치 프로 주전급 선수가 5명이나 포진해 있는 타선. 허봉호 감독은 성낙기를 1차전의 선발로 발표했다.
***
그리고 그날이 왔다.
성낙기는 불펜 투구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꿈에 그리던 경찰청과의 결투, 공을 던지며 실실 쪼개는 성낙기를 보면서 포수 이두열은 걱정스러웠다.
‘오늘 경찰청의 선발이 누군지나 알고 저러는 것인가?’
이두열의 걱정은 너무나 당연했는데, 그 이유는 상대 투수가 1군에서 2선발로 뛰다가 팔꿈치 수술과 함께 경찰청에 입단한 현호석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드래프트 1순위에 5억의 계약금을 받고 모연비퍼스에 입단한 기대주였고 입단하자마자 12승을 올린 차세대 에이스였다.
올 초까지 재활을 마치고 팀에 합류, 벌써 8승에 ERA 2.14를 찍고 있는 경찰청 최고의 에이스가 바로 그였다. 한마디로 노는 물이 다르다.
이두열이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성낙기는 130km까지 나오는 강속구를 던지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제구력은 아직 드랙실바의 전성기 절반 수준이지만 포수 한가운데 들어가는 공은 거의 없는 편이다.
이두열이 바깥쪽을 주문하면 한가운데를 정사각형 20cm라고 가정하면 그 바깥쪽에서 탄착점이 형성되는 제구력은 되는 수준이다.
그렇다고 터무니없이 빠지는 공도 없다.
‘제구가 전보다 많이 좋아졌어.’
이두열은 불펜에서 공을 받으면서도 제법 놀라고 있었다.
처음, 입단을 하기 위해 던지는 공을 받았을 땐 그저 그런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투수가 되어 있다.
공도 빨라졌고 제구는 물론, 변화구도 수준급이다. 이두열이 보기에 이 정도면 2군에서 먹힐 만 했다. 단지, 오늘 같은 경우는 워낙 상대를 잘못 만났다.
이두열이 현호석에게 가지는 경외감은 1회 공격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140km대 중후반을 찍는 스피드와 묵직한 구위를 감당하지 못하고 이정우, 서상천, 조성진은 모두 내야 땅볼로 물러났다.
1회 초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성낙기는 씩씩하게 마운드로 걸어갔다.
관중들의 환호가 터졌다. 서울 원정 경기였기에 삼호슈퍼스타즈 팬들이 많진 않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다.
성낙기가 나오는 경기는 재미도 있고 패하는 날도 드물다. 오늘 경찰청이라는 강자를 만나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과연, 지금까지의 피칭이 1군 멤버가 다수 포진한 경찰청에도 통할 것인가.
경찰청의 1번 타자 우민섭은 입단 전까지 세화스쿼럴스의 1군 백업이었으나, 경찰청에서 꾸준히 타석에 선 후로 기량이 만개했다.
1군에서 2할 중반이었던 타율이 0.344로 수위타자를 다투고 있고 2루 수비 역시 물이 올랐다. 성낙기는 심호흡을 한 뒤 공을 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