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014화 어디서 저런 놈이 나타났지? 4
“뭔 일이래? 술자리에서는 천하없어도 움직이지 않는 양반이 아들 오니까 달라지네.”
“헛허… 당연하지. 프로 선수가 왔는데 가만있으면 사람이 아니지.”
“고맙습니다, 아저씨.”
장하연이 은방울 구르는 목소리로 고개를 꾸벅한다.
듣기론 전교 1, 2등을 다툰다나. 공부 못하는 서희랑 아직도 친구인 걸 보면 의리도 있는 애가 틀림없다.
성낙기는 물 국수 한 그릇이 부족해서 비빔을 하나 더 먹은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벌써 가려고?”
“잠시 외출했어요. 들어가 봐야죠.”
“오빠, 여기 사인 좀 해주세요.”
“전에 해줬잖아.”
“그땐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죠. 하나 있는 거하고 두 개 있는 거하고 같겠어요?”
장하연이 흰 종이와 볼펜을 내밀었다. 최대한 멋있게 성낙기를 쓰고 예쁜 장하연에게, 라고 쓴 뒤 하트도 두 개나 그려 넣었다.
숙소로 돌아오면서 성낙기는 내내 장하연의 모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리게만 봤던 애가 불쑥 커서 이상형의 외모로 나타났을 때 흔들리지 않는 남자가 있을까? 그때 불쑥 목소리 하나가 끼어들었다.
-대가리 비워. 그것만이 살길이니라.
***
1. 백업을 경기에 적극적으로 기용할 것.
2. 노장은 과감히 정리할 것.
3. 수비 연습을 실시할 것.
김아경의 요구는 대충 그렇게 정리되었다.
마영진 단장은 자신이 정리한 파일을 두고 끙끙 앓았다.
도대체가 이런 요구를 허봉호 감독에게 할 자신이 없었다.
허봉호 감독이 누구인가.
한때 타자로서 잘나가는 스타였고 1군 감독까지 경험했던 사람이다. 그런 만큼 자존심도 남다르다.
그런 사람에게 위와 같은 말을 하면 통할까?
당장 감독직을 그만두겠다고 할지도 모른다.
‘자기가 생각한 걸 왜 나에게 떠넘겨? 잘못되면 날 탓하려고?’
마연진 단장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걸 흔쾌히 받아들일 허봉호 감독이 아니다.
아마, 자신을 자르기 위한 단장의 술책이라고 생각하겠지. 마영진 단장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드디어 굳은 결심을 한 마영진 단장은 안강피그스와의 경기 전 감독실을 찾았다. 감독실엔 박종태 타격 코치와 이계현 투수 코치도 함께였다.
“문상열이 요즘 괜찮지?”
“네, 로테이션을 거르는 바람에 몸이 많이 회복 되었습니다.”
“스윙맨으로 위대준 대기 시켜.”
마연진 단장이 들어가니 선발 얘기가 한창이다.
허봉호 감독이 의외라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경기 직전엔 감독실을 찾지 않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다. 허감독이 싫어했고 바쁜 시간이기도 하니까.
“마 단장님이 웬일이오?”
“네, 저기 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뭐요? 짧게 합시다.”
허봉호 감독은 후배인 마 단장이 별로 달갑지 않다. 요즘 들어 간섭하려는 기미가 있기 때문. 결과는 좋았지만 성낙기의 경기 투입에도 관여했고.
“구단에서 회의 끝에 결정한 사안입니다.”
“구단… 회장님 말입니까?”
“오해는 마십시오. 구단에서는 허 감독님과 오래 같이하길 원합니다. 다만.”
“다만?”
“다만… 지금과 같은 방식에서 탈피해서…….”
“가만, 지금 혹시 또 간섭하려는 거요?”
“제가 무슨 간섭이겠습니까. 말을 전할 뿐입니다.”
“말하시오.”
마영진 단장은 김아경의 의향을 전했다.
코치들이 같이 있어서 말하기 거북했지만 어차피 그들도 알아야 한다.
짐작대로 말을 듣는 동안 허봉호 감독의 안색이 변해갔다. 처음엔 붉게 달아오르다가 나중엔 얼마나 열이 받았는지 푸르뎅뎅해졌다.
“크흐흐… 어이가 없구만. 그만두라는 말을 참 묘하게 둘러대시네. 뭐, 수비 연습? 니기미, 씹… 시즌 중에 시간이 어디 있다고 수비 연습을 시키래. 날마다 시합 전에 몸 풀면서 연습하는 건 안 보이나 보지?”
“그만두라는 말이 아닙니다. 선수단에 긴장감이 없고 에러로 경기를 망치는 일이 잦으니 구단에서도 대안을 내놓은 겁니다. 선수들이 의욕 없이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건 허 감독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거요? 미안하지만 내가 오기 전엔 더 심했어. 술이 덜 깨서 경기장에 나오고 에러하고 나서 히죽거리고 아주 가관도 아니었지. 승률 3할에서 허덕이던 팀 아니었어? 지금은 4할이야, 4할. 마 단장이 전임 감독과 함께하던 시절 아니오?”
“마, 맞습니다. 제가 책임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번 구단 회의도 다 잘해보자고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집어 쳐! 사표 쓸 테니까 말 잘 듣는 다른 감독 알아봐. 마 단장이 후배고 해서 나름 대우해 줬는데 등에 칼을 꽂는군. 단장이 중심도 없이 흔들리면 그게 단장이야? 회장 따까리지.”
“서, 선배!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지나쳐? 그런 말 나올 줄 몰라서 마 단장은 나에게 그런 말 한 거야? 선수 구성부터 연습까지 간섭하려 들다니. 차라리 지들이 감독하지 뭐 하러 날 불러와서 수모를 줘. 난 못하니까 그렇게 알아.”
그때 김아경이 감독실로 들어왔다. 허봉호 감독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갑작스러운 김아경의 등장에 모두 떨떠름한 표정들이다.
“감독님, 언제까지 2군으로 만족하실 건 아니죠?”
김아경이 다짜고짜 말문을 연다.
“무슨……?”
“감독님도 아시다시피 삼호슈퍼스타즈 1군은 바닥입니다. 솔직히 앞으로도 가망 없어요. 노장들로 시즌을 이끌어가는 상황이죠.”
“그거야 뭐, 선수 full이 그러니까 그러 거 아니오.”
“그렇죠. 감독님 말씀처럼 그게 1군의 한계입니다. 요는, 올라오는 선수가 없으니 쓰는 선수만 계속 쓰는 구조죠. 그러다 보니 주전들은 해이해졌고요. 결과는 리그 꼴찌입니다. 그런데 1군뿐만이 아니라 2군도 그래왔어요. 감독님 부임하신 뒤로 성적이 올라가고 나름 짜임새가 있어졌지만 주전은 늘 주전인 경우가 많죠. 구단의 의견은, 어차피 하위권인데 체질을 바꾸자는 겁니다. 이런 때 아니면 언제 바꾸겠어요? 성적은 묻지 않겠습니다. 저희 의견을 받아들여서 팀이 생동감 있게 변화한다면 감독님 역시 명성을 쌓지 않겠어요? 1군 같은 2군으로 육성해서 선수들과 감독님, 코치님들까지 모두 1군에 안착하셨으면 좋겠어요. 그게 저희의 희망입니다. 삼호슈터스타즈는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끄응…….’
허봉호 감독은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뭐라고 반박하고 싶은데 마땅히 할 말이 없다.
김아경의 말이 맞다. 고인 물은 썩는다, 그거 아닌가.
1군 같은 2군? 그대로 1군으로? 철없는 재벌 2세 아가씨인 줄 알았더니 어른을 어르고 엿 먹이는 재주도 있구나.
이계현 코치와 박종태 코치도 김아경의 논리에 빠져든 모습이다. 게다가 김아경은 코치진이 1군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당근까지 제시했다.
“후우~ 좋아. 구단 방침이 정 그렇다면 이번은 내가 양보하지. 백업과 노장 정리는 단장과 상의하면 될 일이고 수비 쪽은 연습 부족이 아니라 집중력 때문이니 그 역시 긴장을 주는 백업기용으로 해결될 일이오. 하지만, 백업과 주전의 실력 차이가 있으니 성적이 떨어져도 날 원망 마시오.”
허봉호 감독으로서는 큰 결단이었다.
자존심을 억누르고 이 같은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사실, 딱 한 가지. 2군을 이끌어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한 달 전 같으면 바로 감독직을 때려 치웠을 것이다. 그만큼 앞이 안 보이는 상황이었으니까.
FA(자유계약선수)로 풀린 선수를 잡으려면 보호 선수 명단 밖의 선수 한 명을 내줘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2군은 초토화 되었다.
유망주 투수와 야수들이 타 구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허봉호 감독이 부임하자마자 한숨부터 내쉰 이유도 그거다.
싹이 좋은 선수가 보이지 않았다.
그마나, 이세환, 이정우와 강창선 등을 경쟁력 있게 키워낸 것도 허봉호 감독이기에 가능했는지 모른다.
‘회장 딸이라고? 제법 선수 보는 눈이 있어.’
그런 차에 이중호와 안민기에 구문철을 김아경이 영입했고 괴짜 같은 성낙기도 팀에 가세했다.
이제야 말로 야구를 할 맛이 나던 참이다.
김아경의 설득도 한몫 했지만 자존심을 죽인 이유는 바로 그것, 야구다운 야구를 할 수 있겠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
그날 안강피그스와의 경기는 문상열이 4회를 버티지 못하고 6실점으로 무너졌고 뒤이어 나온 스윙맨 위대준이 잘 던지다가 6회 3실점으로 강판, 어쩔 수 없이 추격조를 투입한 끝에 3 대 12로 경기를 내줬다.
다음 날은 성낙기로 선발이 예고되었다.
그리고 안강피그스와의 3연전 중 2차전의 날이 밝았다.
“엇, 뭐야.”
엔트리 명단을 본 마영진 단장이 눈을 크게 떴다.
주전을 무려 다섯이나 빼고 백업을 기용한 허봉호 감독. 4번 1루수 강창선도 빠졌고 얼마 전 홈런을 친 2루수 김석문도 빠졌다.
뿐인가, 3루수 안학규와 좌익수 최일현에 포수 최광규까지 유격수 이정우를 빼고는 내야를 싹 갈아 치웠다.
“저 양반 저거 이런 식으로 보복을 하네. 백업을 쓰라니까 이렇게 마구잡이로 기용을 해? 고등학교 선배만 아니면 벌써… 으이구.”
마영진 단장은 애가 탔지만 꾹 참았다. 백업을 적극적으로 쓰라고 한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뭥미?”
“헉, 선수들 다 바꿨다. 이길 생각 있는 거야?”
“주전 다 빼고 무슨 야구를 해. 감독이 돌았네.”
“성낙기는 나왔어.”
“맛이 갔네, 갔어.”
“아니, 저거 또라이 아니야? 라인업을 저딴 식으로 짜서 안강을 이겨보겠다고?”
관중들도 야수들의 면면을 보고 어이가 없는지 한마디씩 해댔다. 듣도 보도 못한 주진규, 안흥식, 윤후광 등이 수비 위치를 지키고 있다. 성낙기에게는 악재다.
‘감독님, 괜찮겠습니까.’
‘괜찮지 않으면? 높은 사람들이 백업 쓰라는데 원 없이 써 줘야지 안 그래?’
‘아직 경기력이 올라오질 않아서…….’
‘내 말이 그 말이야. 책상머리 앉아 있는 애들이 뭘 알겠어. 백업을 쓰면 팀에 활력이 생긴다고? 웃기고 자빠졌네. 어디 얼마나 활력이 있는지 직접 눈으로 보라 그래.’
경기 시작 전 박종태 타격 코치와 나눈 대화. 백업을 적극적으로 쓰라는 게 구단 방침이니 적극적으로 쓴다는 허봉호 감독이다. 문제는 경기력이 떨어지는 백업으로 라인업을 절반 이상 채워 버렸다. 성낙기는 1회 초 마운드에 올랐다.
-야야. 삼진으로 다 솎아내 버려.
-그래,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강속구로 카운트 잡고 슬라이더 체인지업을 적극 활용해 봐.
-130km 나오는 강속구?
두 유령의 말을 뒤로 하고 성낙기는 첫 공으로 포심패스트볼을 뿌렸다. 바깥쪽 스트라이크 존에 걸치는 공인데 주심이 잡아주지 않는다.
[체력이 (55/100)으로 측정되었습니다.]
55였던 체력이 조금 올랐다. 방금 공이 –1일 테니 +1이 소리 소문 없이 오른 셈이다. 상대 타자는 서창모. 0.311의 타율에 20도루를 기록 중인 안강피그스의 핵심이다. 이 선수가 나가면 복잡해진다. 성낙기는 존의 말처럼 2구로 슬라이더를 던졌다.
따악.
성낙기의 왼쪽을 스치는 평범한 2루수 땅볼. 2루수로 투입된 주진철은 타구 방향을 뒤늦게 알아채고 다이빙 캐치를 시도했으나 공은 글러브를 맞고 우익수 쪽으로 데굴데굴 느리게 굴러갔다. 우익수가 공을 잡으려고 달려오는 틈에 서창모는 2루까지 뛰었다. 여유 있게 세이프.
다음 타자는 1구 포심패스트볼에 보내기 번트, 서창모는 원아웃 3루에 자리 잡았다.
-이것 봐라? 애들은 기본기가 어느 정도 잡혀 있네. 작전 구사 능력이 좋아.
실바가 상대 팀을 칭찬한다.
다음 타자는 안강피그스의 얼굴 김충겸. 홈런이 13개에 0.297의 타율을 자랑하는, 슬러거다. 슬러거답지 않게 삼진도 잘 당하지 않는 타자였다. 다음 타자인 4번 선광선은 모 아니면 도식의 선풍기 타자이니 김충겸만 잡아내면 무실점을 바라볼 수 있다.
따악-
김충겸도 자신이 해결하려는지 초구부터 적극적이다. 파울. 2구도 파울. 투 스트라이크에서 성낙기가 체인지업, 슬라이더를 연달아 던져도 볼을 골라낸다. 성낙기는 130km의 라이징패스트볼을 결정구로 던졌다.
따악-
짧은 좌익수 플라이. 좌익수는 주전인 최일현 대신 안흥식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20세의 새내기. 그걸 잘 알고 있는 서창모는 태그 업을 시도했다. 안흥식은 싱싱한 팔로 힘껏 홈플레이트를 향해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