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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투수 성낙기-12화 (12/188)

# 12

012화 어디서 저런 놈이 나타났지? 2

벤치크리어링은 야구에 없어서는 안 될 경기의 한 요소다.

1996년 6월 23일 대구 구장. 삼성 5번 타자 이만수는 2회 말 선두 타자로 나서 쌍방울 선발투수였던 박진석의 투구에 배를 맞고 걸어 나갔다.

쌍방울이 4 대 0으로 앞선 4회 말. 1사 후 이만수가 두 번째 타석에 나섰다.

쌍방울 포수 박경완이,

“선배님, 이번엔 좋은 공 하나 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하자 이만수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식, 미안하다고 생각하면 됐지, 뭘 좋은 공까지…….’

그러나 초구가 얼굴 쪽으로 휙 날아들자 황급히 피할 수밖에 없었다.

박경완은 마운드의 박진석에게 고함을 쳤다.

“괜찮아, 몸 쪽에 하나 더!”

그리고 2구째 커브가 그만 헬멧을 강타했다. 이만수는 곧바로 방망이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헐크’로 돌변해 마운드로 달려갔다.

그런데 으레 한판 붙을 자세를 취해야 할 박진석은 이만수가 가까이 다가오자 외야까지 도망을 갔다.

외야를 가로지르면서 쫒고 쫒기는 이만수와 박진석의 실랑이는 박진석이 더그아웃으로 숨어버리고서야 끝이 났다.

80년대엔 감히 선배에게 대들 수 없다는 통념이 있었고 그런 생각의 바탕 위에 위와 같은 헤프닝도 발생했다. 지금 생각하면 낭만도 그런 낭만이 없다.

삼호슈퍼스타즈와 은성캣츠의 벤치클리어링 이후, 팀에서 성낙기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

지금까지의 행동은 늘 엉뚱하고 독특한 성격에다 자기 일 아니면 상관도 안 하는 스타일로 알았는데 벤치클리어링에서는 반대의 행동을 보여줬다.

가장 먼저 이중호를 이끌고 나가서 상황을 빠르게 안정시켰고 그 결과 삼호슈퍼스타즈의 사기가 올라갔다.

이는 은성캣츠의 무기력한 플레이로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팀의 승리를 지키는 공을 세웠다.

늘 불안한 불펜이 은성캣츠의 타선을 무실점으로 막은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

“아주 좋았다, 모두 잘했어. 특히 벤치클리어링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동료를 도와준 덕분에 경기가 잘 풀렸다. 앞으로도 개인이 아니라 팀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허봉호 감독은 이례적으로 만족을 드러냈다.

은성캣츠가 만만한 팀이 아니다.

시즌 초반엔 경찰청을 제치고 한동안 1위를 했을 정도로 탄탄한 팀이다.

그런 은성을 깔끔하게 이겼으니 허봉호 감독은 안 먹어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은성캣츠를 상대로 2연승은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다.

또한, 내일은 에이스인 이세환을 낼 수 있다.

3연승도 가능하다는 생각에 허봉호 감독은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강원도 강릉의 삼호파크.

여기가 삼호슈퍼스타즈 2군의 숙소다.

야구장과 부대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고 팬들의 성원도 좋은 편이다. 도시 인구는 20만을 갓 넘기는 수준이지만 팬들의 충성도는 다른 도시에 비할 바가 아니다. 경기가 펼쳐지는 날이면 동해, 삼척 등의 도시에서도 팬들이 몰려들었다.

딱 하나, 아쉬운 건 성적인데 2군 창단 이래로 우승은커녕 3위가 최고의 성적이니 말 다했다. 그것도 남부는 제외하고 북부 리그에서 만이었다.

묘하게 감독과 선수들의 케미가 맞지 않고 단기간에 성적을 내려다 보니 가면 갈수록 팜은 부실해지고 부상자도 끊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구단주인 김현중 회장의 조급증 때문이 컸다.

그는, 재계 서열보다 높은 삼호슈퍼스타즈의 성적을 원했고 FA나 트레이드 등으로 즉시 전력 선수들을 사들이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 결과, 시즌 초반엔 반짝 하는 성과를 낼 때도 있었지만 비싼 선수들과 기존의 팀원들은 융화하지 못했고 팀워크는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나이가 있는 즉시 전력 선수들의 활약은 몇 년 가지 못했고 팜 시스템은 유망주를 만들지 못하고 겉돌았다.

하지만, 올해는 뭔가 느낌이 다르다.

1군은 여전하지만 2군은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시즌 중반, 성낙기가 들어왔고 세븐위터스에서 안민기와 이중호라는 에이스와 거포가 영입되었다.

일본 독립 리그에서 뛰다 온 구문철도 있다.

넷 모두 합류와 동시에 발군의 활약을 보이고 있다.

성낙기는 느린공으로도 어처구니없이 잘하는 중이고 안민기는 은성캐츠 1차전에서 승리를 따냈고 이중호 역시 거포답게 한 방씩 날려준다.

구문철의 가세로 약점이던 불펜도 짜임새가 좋아졌다.

1군 팀들이 외국인 선수 셋의 활약만으로 한 해의 성적이 좌우되는 현실을 감안할 때 삼호슈퍼스타즈 2군의 성적 역시 올라갈 일만 남았다. 따지고 보면 생각지도 않았던 용병 넷이 한꺼번에 들어온 격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미 시즌 중반인 만큼 걸림돌은 빠듯한 시간일 뿐이다.

“막걸리 안 사 주십니까?”

성낙기는 숙소로 돌아와서 짐을 풀고는 이계현 코치의 방으로 갔다.

가자마자 약속을 강조했다.

TV를 시청하면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이계현 코치는 성낙기의 말에 졌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사기를 위해서 그냥 해본 말을 철썩 같이 믿고 숙소로 찾아와 따지는 놈은 처음이다.

“너 같은 놈도 있구나. 막걸리를 사 달라고?”

“네, 삼호파크 밖에 <엄마밥상>이라고 있는데 도봉산 막걸리 팝니다.”

“도봉산 막걸리? 허허… 내가 야구를 너무 오래 했나. 술 상표까지 정해서 사달라는 놈은 대한민국에 너뿐이겠다.”

“네?”

“아니다. 뭐… 하하하. 어이가… 가자! 까짓 거 승리투수에게 밥 한 끼는 사야지.”

“아니, 밥 말고 닭도리탕…….”

-야, 고마 해. 니가 빚쟁이냐?

이계현 코치는 성낙기 외에 안민기와 이중호, 구문철도 불러냈다. <엄마밥상> 주인은 40대 중반의 인심 좋게 생긴 아줌마였다.

“옴마야, 이게 누구야. 이계현 선수?”

아줌마는 이계현 투수 코치를 알아보고 반색했다.

“저 아십니까?”

“알다마다요. 대아마리너스에서 뛸 때부터 팬이에요. 그때는 이계현 떴다 하면 상대 타자들은 경기를 포기하다시피 했지요. 내가 이계현 선수만 나오면 경기장 다니느라고 공부를 제대로 못해서 밥장사로 진로를 틀었답니다. 호호.”

이계현 투수 코치는 흐믓한 표정으로 메뉴판을 둘러보았다.

‘있다. 닭도리탕.’

성낙기가 낮게 속삭였다.

“흠, 닭볶음탕이 맛있겠네. 사장님, 여기 닭볶음탕 두 개하고 막걸리 세 병만 주세요.”

이계현 코치가 기분 좋게 메뉴를 시켰다.

성낙기의 닭도리탕을 닭볶음탕으로 바꿔 부르면서 은연중에 성낙기를 머리에 든 게 없는 운동선수로 전락시킨다.

경기의 수훈 선수들에게 한턱도 내고 한때 자신의 팬이었던 주인을 만나니 돈을 써도 아깝지 않다.

안민기와 이중호, 구문철은 약간은 얼떨떨한 모습.

코치가 음식을 사는 것도 드문 일이지만, 술까지 시켰다.

“오늘만 예외다. 너희끼리 술 마시러 오면 안 되는 거 알지? 성낙기랑 약속했지. 위기를 잘 넘기면 한잔 사 주기로. 그런데 애는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이고 방까지 찾아왔지 뭐냐. 너희들 모두 새로 팀에 합류했으니 서먹하기도 할 거다. 이런 기회에 서로를 알아가는 거다. 나이들이 비슷하지?”

“네, 20살 안민기 빼고는 모두 동갑입니다. 22살.”

성낙기가 대답했다.

“난, 23인데…….”

구문철이 성낙기의 말을 정정했다. 구문철을 동갑으로 알고 있던 성낙기는 인상을 구겼다. 젠장, 23이었어? 얼마 전에 욕도 했는데.

“그래? 그럼 문철이가 형이네. 인사들은 벌써 했겠지?”

“…대충은요.”

“아, 전 빠른 년생이라서 구문철과 같습니다.”

구문철이 형이라는 말에 성낙기가 반박했다. 이중호가 성낙기를 스윽 훑었다. 닭볶음이 나오기 전에 막걸리가 따라졌고 이계현 코치가 잔을 들었다.

“승리를 위하여!”

“위하여!”

안민기는 절반쯤 마시다가 잔을 내려놓았고 구문철은 입만 적셨다.

이계현 코치, 이중호와 성낙기만 원 샷.

성낙기는 한 잔을 마시고는 곧바로 빈 잔을 채운다.

그러면서 자신의 잔도 가득 채웠다.

“야, 니들은 코치님이 따라주신 잔을 안 비우면 되겠냐? 자, 건배.”

성낙기의 말에 하는 수 없이 다들 잔을 들었다.

이계현 코치는 겨우 22살 먹은 놈이 하는 짓을 가만 지켜본다.

참 맹랑하다 싶으면서도 신세대니 이해해야지 싶으면서도 원래 싸가지가 없는 건가 싶기도 하다.

-야, 엥간히 마셔. 막걸리로 취하면 애미 애비도 몰라보는 벱이여.

-음주 운전으로 뒤진 놈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닭볶음탕이 두 마리 나왔고 모두들 맛있게 뜯었다.

막걸리는 벌써 7병째.

성낙기는 히죽거렸고 거구의 이중호는 마시나마나한 얼굴이다.

“니들도 언젠간 1군에 진입해야지? 지금 열심히 하지 않으면 영원히 기회가 없다. 나이 더 먹고 군대 갔다 오고 나면 이십 후반 금방이야. 그때부터는 기량이 어느 정도 올라와도 나이가 걸림돌이 되지. 군에 가기 전에 입지를 다져 놓는 게 여러모로 유리하다.”

“걱정 마십시오. 뼈가 부서지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성낙기가 이계현 코치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민기랑 중호는 타고난 조건이 좋으니까 노력 여하에 따라서 얼마든지 시기를 당길 수 있다.

물론, 문철이도 경쟁력이 있지.”

성낙기만 쏙 빼고 말하는 이계현 코치. 성낙기의 입이 조금 튀어 나왔다. 아니, 승리투수를 빼놓고 미래를 논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낙기는 스피드가 관건인데… 기교파 투수도 있으니까.”

이계현 코치는 술이 약간 오른 김에 너무 정확한 판단을 내린다.

말하자면 성낙기는 1군으로 가기엔 공이 느리다는 말이다.

스피드는 타고난 것이니 어차피 1군으로 올라가지 못할 거라는 생각도 깔려 있다.

실제로 1군 투수 중 140km를 던지지 못하는 투수는 거의 없다.

드물게 130km 중후반을 던지는 투수도 있지만 볼 끝과 제구, 경기 운영 능력이 발군인 경우다. 이계현 코치가 본 성낙기는 최대 구속 125km 언저리이다.

아무리 볼 끝과 제구가 좋아도 1군 콜업은 어렵다.

150km의 공도 제구가 안 되면 받쳐 놓고 때리는 1군 타자들인데 125km는 웃으면서 때려낼 것이다.

말이야 맞는 말인데 이계현 코치도 돌려 말하지 못하는 성격이 문제다.

저러니 현역 때 싸움닭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지.

-잘하고 있는 애 기 죽이네. 코치가 말이야, 술을 먹어도 말이야.

실바가 이계현 코치 앞에서 투덜거렸다. 순간,

[세기의 강속구가 (63/100)으로 오릅니다.]

[슬라이더의 위력이 (51/100)으로 오릅니다.]

[체인지업의 위력이 (58/100)으로 오릅니다.]

[포심의 제구력이 (56/100)으로 오릅니다.]

[커브의 제구력이 (59/100)으로 오릅니다.]

[포크의 제구력이 15/100으로 오릅니다.]

[투심의 제구력이 13/100으로 오릅니다.]

[라이징패스트볼이 (3cm/20)으로 오릅니다.]

[퀘이크볼이 (1.5cm/5)로 오릅니다.]

[체력이 55/100으로 오릅니다.]

[팔 근육 강화가 시작되었습니다. 1, 2, 3, 4, 5, 6, 7, 8…….]

[어깨 근육 강화가 시작되었습니다. 1, 2, 3, 4, 5, 6, 7, 8…….]

[악력 강화가 시작되었습니다. 1, 2, 3, 4, 5, 6, 7, 8…….]

“오, 마이 갓! 세상에!”

성낙기가 막걸리를 마시다 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숫자가 전자 초시계처럼 새겨지면서 지나간다.

양팔의 어깨와 팔 근육이 욱신거리면서 조여지고 있다.

헬스를 하고 난 뒤의 팽창감이 팔과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우와아! 이놈의 시스템은 항상 뒷북이네. 어째 경기 끝나고 스탯이 안 오르고 막걸리 먹다가 오르냐? 술 마시다가 심장마비로 죽으라는 거여?

-니가 신의 안배를 우찌 알끼고. 고마 주디이 다물그라.

성낙기는 숙소로 돌아와 침대 위에 널브러졌다.

거구인 이중호도 침대에 누웠으나 발목 아래는 침대 밖에서 달랑거렸다.

구문철도 같은 방.

허봉호 감독은 굳이 고참 하고 같은 방을 쓰게 해서 새내기들이 기죽는 걸 원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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