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011화 어디서 저런 놈이 나타났지? 1
‘신중해. 성낙기라는 투수 만만한 애가 아니다. 이렇게 가다간 계속 당한다. 공을 많이 던지게 만든다는 생각으로 선구안을 좁게 가져가도록.’
타격 코치의 언질을 받은 이진운은 첫 타석과 확연히 달랐다.
눈빛부터 비장했고 배트를 평소보다 더 짧게 잡았다.
어떻게든 살아나가야겠다는 각오가 몸짓에 묻어난다.
팡.
그런 마음을 아는지 성낙기는 초구부터 거침없이 스트라이크를 꽂아 넣었다.
스트라이크!
주심의 손이 올라갔다. 아, 치기 좋은 공이었는데.
이진운이 침을 퉤 뱉었다. 타격 코치의 말을 되새기면서 타격 자세를 했다.
2구 역시 평범하기 그지없는 포심패스트볼. 역시 스트라이크다.
3구도 같은 코스의 같은 구질.
따악-
이진운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배트를 내밀었다.
최대한 볼 끝을 보고 휘둘러서 약간 배트가 밀렸다.
1루 쪽으로 데구르르 굴러가는 공.
1루수 강창선은 그 공을 보기 좋게 빠트렸다.
살짝 바운드가 될 줄 알았으나 글러브 밑을 통과해 버렸다. 노아웃 1루 좋은 찬스가 만들어졌고 다음 타자도 신중하긴 마찬가지였다.
최대한 기다려 투 스트라이크 투 볼에서 배트를 휘둘렀다.
공은 아까처럼, 그러나 아까보다는 강한 3루수와 유격수 사이의 땅볼이었다.
3루수 안학규가 슬라이딩으로 잡아서 1루에 뿌렸지만, 강찬선이 송구를 놓쳤다.
그사이에 1루 주자는 2루를 거쳐 3루로, 타자는 1루를 거쳐 2루로 전력 질주했다.
강찬선이 뒤늦게 따라가 2루로 던져 보았지만 여유 있게 세이프.
순식간에 무사에 2, 3루의 위기상황이 만들어졌다.
“이야앗, 이제 뭐가 좀 되네.”
“좋았어. 무사 2,3루면 안타 하나에 2득점이네.”
“앗싸. 야구 볼맛 난다. 바로 이게 야구지.”
은성캣츠의 팬들이 들썩였다.
야구는 투수가 아무리 잘 던져도 야수가 받쳐주지 않으면 점수를 주게 되어 있다.
성낙기의 평범한 땅볼 유도에도 아웃 카운트가 없다.
정상대로라면 투아웃이어야 하는데 거꾸로 완벽한 찬스를 내주고 말았다.
-꼴찌를 하는 팀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땅볼 잡는 풋워크의 기본이 안 되어 있잖아.
실바가 구시렁거렸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제 클린업으로 연결되는 타순, 3, 4, 5번이 차례로 등장할 차례였다.
에러는 보통 도미노처럼 이어진다.
팀원의 사기도 떨어질뿐더러 이미 한 번 실수한 선수들은 잔뜩 긴장해서 몸이 굳기 때문에 확률이 더 올라가는 것이다.
-체인지업을 던져선 안 돼. 지금 땅볼 유도는 독이야. 삼진 아웃이나 플라이 볼로 잡아.
실바가 조언한다. 존은 자신의 주무기인 체인지업을 던지지 말라는 말에 이마를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안다. 여기서 또 한 번의 실수는 2실점과 함께 경기 자체가 완전히 넘어갈 가능성이 있다는 것.
끄덕-
성낙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몸 쪽에 연달아 라이징패스트볼을 꽂아 넣었다.
타자는 투 스트라이크를 먹을 때까지 움찔거릴 뿐 배트를 내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볼이 아니다.
성낙기는 가운데로 오다가 바깥쪽으로 휘어지면서 떨어지는 슬라이더를 던졌다.
팡-
“스트라이크 아웃!”
자신감을 얻은 성낙기는 4번 타자 역시 같은 패턴으로 승부했다.
하지만 4구째 잘 떨어진 슬라이더를 툭 건드려 1루 땅볼.
강창선이 볼을 잡아 홈 송구를 하려다 말고 1루 베이스 터치로 만족한다.
1실점.
“아아, 강창선 선수 홈 송구를 포기하는군요.”
“아쉬운데요? 충분히 해볼 만한 시도였는데 조금 전의 에러로 자신감을 잃었어요. 던졌더라면 아웃 타이밍인데 이것도 보이지 않는 에러입니다. 강창선 선수, 거포형 타자인데 수비에 약점이 있습니다.”
해설자의 말처럼 홈 송구를 했더라면 아웃 타이밍이다.
강창선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지 못하고 타자를 잡은 뒤 성낙기를 향해 손가락 두 개를 펴보였다.
투아웃이니 괜찮다는 의미. 성낙기는 내심 어이가 없었다.
안 줄 점수를 주고도 무슨 잘못인지는커녕 타자를 잡고 뿌듯해하는 저 모습 보라지.
성낙기는 기도 안 차서 썩소를 날렸다.
강창선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을 약간 들어 됐다는 표시를 한다.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으니 고마워할 필요 없다는 의미.
‘저걸 죽여? 공 놓고 원빵을 가 말어?’
성낙기는 5번 타자를 상대로 빠른 볼을 연달아 보여준 후에 커브를 던져 스윙아웃을 잡아냈다.
***
[세기의 강속구가 61/100으로 오릅니다.]
[체인지업의 위력이 55/100으로 오릅니다.]
[슬라이더의 위력이 48/100으로 오릅니다.]
[포심의 제구력이 53/100으로 오릅니다.]
[커브의 제구력이 55/100으로 오릅니다.]
4회를 마치자 글귀가 떴다.
존의 주무기인 강속구와 체인지업, 슬라이더는 모두 올랐는데 실바의 주무기 중 투심과 포크는 진전이 없다.
둘이 서로 자신의 주무기를 권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자신의 주무기로 타자를 잡을 때 그들 역시 희열을 느낄뿐더러 스탯이 올라가는 글귀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비록 자신이 던지지는 못하지만 제자로 삼은 젊은 선수가 대리인이 되어 던지는 느낌이 강하다.
‘오늘 밤 당장 운동장에 데리고 가서 투심과 포크를 팔이 부러질 때까지 던지게 하리라.’
실바는 이를 부드득 갈며 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이글거렸다. 죽어서도 꺼지지 않는 라이벌 의식이 실바를 지배하고 있다.
병적이라면 병적이지만 그랬기에 그가 mlb를 호령했는지도 모른다.
KBO에도 라이벌이 있었다.
최동원과 선동열.
사실 라이벌이라고 하기엔 5년의 나이 차가 존재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의식했고 지지 않기 위해 온몸을 걸고 싸웠다.
아쉽게도 그들이 라이벌이었던 기간은 3년 남짓에 불과했다.
최동원의 경우, 아마 야구 국가 대표와 실업 야구로 뛰며 혹사당한 팔은 프로에 와서 더 심해졌다.
단적인 예로 1984년, 무려 284이닝을 던지면서 27승 13패 6세이브, ERA 2.40을 기록하면서 약체였던 팀을 한국 시리즈로 이끌었고 한국 시리즈 7차전 중 1,3,5,7차전 완투와 6차전의 구원승까지 혼자 팀의 4승을 책임졌다.
그리고 그 이듬해 해태에 입단한 선동열과 1987년 맞대결에서 연장 15회 무승부를 기록하며 다시는 나오지 않을 불멸의 기록을 썼다.
연장 15회 끝, 2:2 무승부.
최동원 209구 15회 완투.
선동열 232구 15회 완투.
경기가 끝난 후 둘은 ‘승부가 날 때까지 던져볼까? 그럴까요?’ 웃으며 서로를 격려했다고 전해진다.
5회에도 등판한 성낙기는 지금 라이벌은 둘째 치고 라이징을 던질까 말까 생각 중이다. 왜냐하면,
[체력이 (20/100) 남았습니다.]
라는 글귀가 떴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4회 위기에서 라이징과 퀘이크볼 등으로 전력투구한 결과라고 봐야겠다.
-야수를 믿고 맞춰 잡아.
존이 성낙기에게 말했다.
“아니, 언제는 땅볼 유도 하지 말라면서요?”
-그건 털보 놈이 한 말이고 난 아니야. 저렇게 동료를 못 믿으니 실점하고 나서 더그아웃에서 신경질 부렸지. 난 아니었다. 실점을 해도 허허, 웃으면서 에러 한 선수를 쓰다듬어 주었지.
-큭큭, 쓰다듬기는. 솥뚜껑 같은 손으로 괜찮다면서 머리를 두어 방씩 쳤지. 마이크라는 선수는 뇌진탕 증세로 그날 경기를 접은 적도 있었고.
“알겠습니다. 싸우려면 집에 먼저 가세요.”
성낙기는 잔뜩 삐진 표정으로 포수 미트를 바라봤다.
둘은 머쓱한지 입을 꾹 다물었다. 존의 말대로 맞춰 잡기로 했다.
삼진은 누가 뭐래도 좋은 낱말이지만 투구 수 또한 늘어나게 된다.
타자를 속여야 하고 속이려면 볼을 던져야 한다.
타자가 치지 않으면 투구 수를 감당할 길이 없을 것이다.
성낙기는 5회 첫 타자를 맞아 커브를 바깥쪽으로 던지면서 간을 본다. 타자는 따라 나올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4회처럼 신중 모드가 틀림없다.
‘체력이 20이다. 아끼려다간 또 실점할 수 있어.’
성낙기는 최대한 이닝을 끌고 가는 대신 빠르고 강하게 정면 승부를 택했다.
전력투구하기로.
역시 은성캣츠 타자들은 세븐위터스나 중외울프스 타자들보다 컨택 능력이 좋고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한다.
그러니 단단하게 3위를 유지하면서 호시탐탐 2위 자리를 넘보고 있는 것이겠지.
성낙기는 포심패스트볼을 전력투구했다.
팡-
126km.
스트라이크.
세기의 강속구가 (61/100)으로 오르자 구속도 올랐다.
처음 시스템이 측정을 시작할 때 (55/100)이었고 그때 구속이 120km 언저리였으니 스탯이 10 오르면 구속도 10km 오른다는 말이 된다.
만약, 스탯을 (100/100)으로 채운다면 165km를 던지게 된다는 계산.
현재 mlb의 최고 구속이 아롤리스 채프먼의 170km이니 그와 별 차이가 없는 빠른 공을 던진다는 거다. 거기에 그가 가지지 못한 여러 가지의 변화구까지 있다.
상상만으로도 짜릿하다.
성낙기는 5회만 던진다는 마음으로 전력투구를 이어갔고 승부구로 퀘이크볼과 라이징패스트볼을 섞었다.
그런 식으로 5회를 마쳤을 때 성낙기의 남은 체력은 9에 불과했고 삼호슈퍼스타즈는 5회 말에 힘을 냈다.
3번 조성진의 안타에 이어 강창선의 2루타와 이중호의 2타점 적시타가 연이어 터졌다. 그리고 이중호에게 5번 자리를 내준 김석문이 한풀이하듯 투런 홈런으로 경기 흐름을 삼호슈퍼스타즈 쪽으로 완전히 가져왔다.
“씨발!”
홈런을 직감한 김석문이 배트를 공중으로 날리는 배트 플립을 하며 뱉은 말이었다.
듣기에 따라선 은성캣츠의 투수에게 하는 말로도 들렸다.
김석문이 던진 배트는 필요 이상으로 높게 올라간 뒤 3루 파울라인 근처에 떨어졌다.
“야, 너 방금 뭐라 그랬어?”
안 그래도 열 받아 있는 은성캣츠 투수 원형근이 1루로 나가는 김석문에게 다가왔다.
김석문은 입 모양으로 왜? 하면서 천천히 1루를 향해 뛰었다.
그런 김석문에게 원형근이 손가락질을 하면서 육두문자를 날렸다.
질세라 김석문도 홈플레이트와 1루 중간에서 멈추고 원형근 쪽으로 걸어왔다.
“개새끼야, 덤벼!”
원형근이 한 번 더 도발하자 김석문이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삼호슈퍼스타즈 더그아웃에서는 이미 낌새를 눈치채고 몇몇 선수들이 달려 나왔다.
김석문은 헬멧을 마운드 쪽으로 내던지며 전속력으로 돌진했고 원형근도 가만있지 않았다.
둘은 마운드 아래서 주먹다짐을 했다.
김석문이 먼저 주먹을 휘둘렸지만 헛방. 뒤이은 원형근의 주먹도 허공을 갈랐다.
둘의 몸이 엉키면서 뒹굴었다.
은성캣츠 1루수가 가장 먼저 달려와서 김석문에게 파운딩. 김석문이 얼굴을 가리며 방어에 급급할 때 은성의 1루수를 뒤에서 밀어 넘어지게 한 선수가 있었다.
“뭐여, 다구리 까는 겨?”
성낙기였다. 이중호도 어느새 상대 투수를 덮치고 있다. 평소의 성낙기답지 않은 순발력과 용기였다. 하지만 그의 이런 행동엔 이유가 있었다.
-어어? 저거 이상한데 야, 성낙기 튀어 나가! 아참, 이중호 데리고 같이!
-뛰엇!
실바와 존의 외침에 더그아웃에서 김석문과 은성캣츠 원형근의 다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성낙기는 번쩍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는 펜스를 뛰어넘은 채 이중호를 향해 소리쳤다.
“이중호!”
이중호도 엉겁결에 펜스를 뛰어넘었고 둘은 마운드로 돌진했다.
실바가 이중호를 들먹인 것은 순전히 그의 덩치가 KBO에선 외계인 급이기 때문이다. 190cm가 넘는 키에 108kg의 체중인 데다 근육질의 체형이어서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생긴다.
결과적으로 실바의 선택은 잘 먹혔다.
원형근과 1루수 모두 김석문을 향해 휘두르던 주먹질을 멈추고 일어서서 누가 잘못인가를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배트 플립을 그렇게 하는데 누가 가만있겠어. 시발, 안 그래?”
포수까지 예닐곱이 성낙기와 이중호를 둘러쌌지만 이중호는 존재만으로도 일당백이었다.
뒤늦게 양 측 더그아웃에서 선수들이 튀어 나왔고 한동안 옥신각신하다가 김석문과 원형근이 주심의 경고를 먹는 선에서 정리되었다.
성낙기는 6회까지 던졌고 참을성이 없어진 은성캣츠 타자들은 스트라이크 비슷하다 싶으면 배트를 돌렸다.
성낙기는 체력 1을 남겨두고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6이닝 1실점, 삼진 5개.
경기는 이후 원사이드하게 흘러가서 삼호슈퍼스타즈의 4 대 1 승리로 끝났다.
은성캣츠 타자들은 평소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구문철, 이오수, 임병주가 차례로 이어 던진 불펜은 실점 없이 경기를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