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010화 스카우트 팀장입니다 3
성낙기의 말에 강창선은 손의 힘을 풀고 구문철을 노려보았다. 성낙기가 구문철에게 다 들리도록 칭찬을 한 뒤 괄호 안의 말을 속삭였다.
“야아, 너 오늘 공 잘 던지더라(너 그러다 뒤져).”
“그게 무슨…….”
“우리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사과해, 새끼야).”
“미안… 합니다.”
성낙기의 욕에 쫄았는지 아니면 공을 잘 던진다는 칭찬 때문이었는지 구문철이 마지못한 표정으로 말했다.
“허허, 그렇지. 그래야지. 창선아, 애가 아직 한국 물이 설어서 그런 모양이다. 우리 건배나 하자.”
그때까지 가만있던 최광규가 분위기를 띄우고 나섰다. 맥주를 한 잔씩 마시고 나니 기분 좋아진 선수들이 왁자해졌다.
-허, 실바야. 애가 너보다 나은데? 욕도 욜라 잘하고. 너는 어디서 한국말을 배웠길래 그런 말투를 쓰는 거냐?
-응, 서울. 낙기야, 저 맥주 맛있겠니?
“내일이 은성캣츠 스윕하는 날인가?”
대답 대신 성낙기가 조용히 읊조렸다. 두 멘토에게 배운 대로 어떻게든 자신을 내보내 달라고 조를 참이었다.
***
“기영만이 어때?”
“제구가 나아지긴 했는데 썩 미덥진 않습니다.”
“제구만 잡히면 괜찮은 놈인데 하아.”
허봉호 감독의 말대로 기영만은 최고 구속 143km를 던지는 투수다.
강하게는 던지는데 볼 끝이 깨끗하고 제구가 들쭉날쭉 해서 9이닝 당 볼넷이 9.25개로 망조 수준인 게 문제.
하지만 대안이 없다.
오늘따라 관중이 제법 왔다.
안민기, 이중호에 구문철을 영입한데다가 며칠 전 성낙기의 투구도 인기를 끌었다.
느린 볼로 타자를 요리하는 솜씨에 매료된 팬들은 성낙기가 새겨진 유니폼을 맞춰 입고 오기도 했다.
“오늘 중요한 일전입니다. 일단은 삼호슈퍼스타즈가 새로워졌죠?”
“그렇습니다. 세븐윈터스에서 에이스급 투수와 중심 타자를 트레이드로 데려와서 단숨에 다크호스로 떠올랐습니다.”
“일본에서 구문철 투수도 데려왔죠?”
“네, 구문철 선수는 언더스로로 던지는데 볼 변화가 심합니다. 그리고 그전에 성낙기 투수도 새로 가세해서 선발과 중심 타선이 짜임새가 있는 팀으로 변모했죠. 상승세의 삼호슈퍼스타즈가 은성캣츠를 상대로 오늘도 좋은 모습을 보일 지 궁금합니다.”
bbs의 유시진 캐스터와 장종운 해설 위원이 경기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관중석엔 김아경과 정진수가 매의 눈으로 야구장을 훑고 있다.
관중석에서 소란이 일었다.
더그아웃 쪽 통로에서 치어리더가 나타난 것. 2군에선 보기 힘든 풍경이다.
반바지 차림에 늘씬한 키와 불륨감을 자랑하는 치어리더가 삼호슈퍼스타즈 관중석 응원 단상에 늘어서자 관중들이 웃음과 박수로 화답했다.
신나는 음악이 나왔고 치어리더들이 율동을 시작했다.
경기장은 단숨에 축제 분위기로 치달았다. 치어리더는 김아경의 작품이었다. 새로운 유망주들이 가세한 마당에 분위기를 한껏 끌어 올려 2위까지 치고 올라갈 생각뿐이다.
경기가 시작되었고 기영만이 1회 초를 맞았다. 은성캣츠의 타자들은 어제 경기의 설욕을 벼르는 듯 얼굴이 사뭇 진지하다.
그동안 삼호에 진 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만약 오늘까지 진다면 자존심에 생채기가 난다.
기영만의 1구는 138km. 초구부터 전력 피칭이다. 포심패스트볼로 3구 연속 볼이 들어왔고 생각대로 공이 들어가지 않는지 아쉬운 표정을 짓는 기영만.
-쟤는 폼이 불안정해. 공을 끌고 나와서 뿌리는 위치가 일정치가 않으니까 볼 밖에 더 던지겠어?
불펜 투구를 하다 말고 마운드를 바라보는 성낙기에게 실바가 말했다.
“폼이 어떤데요?”
-와인드업이 너무 높아서 하체가 흔들려. 저런 애들은 죽어라고 런닝부터 해서 하체를 두껍게 만들어야지.
“저도 하체 별로 안 두꺼운데요?”
-넌 사기 캐릭인데 저기다 갖다 붙이면 안 되지. 요새 애들은 몸을 단련시킬 생각은 안 하고 줄곧 강하게 던지려고만 하니 탈이 안 나겠어?
실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영만은 1회 첫 타자에게 스트레이트 볼넷을 허용하고 말았다.
“으아, 또 시작이야?”
“기영만이 또 저러네. 도대체 스트라이크를 못 넣는 이유가 뭐야?”
“토토 하는 겨?”
“성낙기 쉴 만큼 쉬지 않았나?”
관중들이 웅성댔다.
기영만은 벌써부터 땀이 나는지 모자를 벗고 이마를 훔쳐냈다.
허봉호 감독은 인상을 찌푸렸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게 저런 거다. 홈런타자도 아닌데 스트라이크를 못 던져서 1루를 허용하는 것.
차라리 가운데 던져서 안타를 맞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1루를 자동문처럼 열어주면 대책이 없다.
허봉호 감독이 열을 식히는 중에 기영만은 다음 타자에게도 볼 두 개를 연속으로 던졌다.
“이코치, 기영만 내려오면 누가 좋겠어. 문상열?”
“문상열도 요즘 제 컨디션이 아니고… 차라리…….”
“차라리?”
“성낙기를 준비시키는 건 어떻겠습니까?”
“성낙기? 엊그제 던졌는데 너무 빠른 거 아니야?”
“선수 본인이 던지고 싶어 하는 데다가 많이 안 던지고 3일 쉬었습니다.”
“…그럼 그렇게 해.”
성낙기는 이계현 코치의 지시로 백업 포수 이두열과 호흡을 맞췄다.
팡, 하고 꽂히는 포심패스트볼의 느낌이 좋다.
던지는 구종들의 변화와 제구도 전보다 향상됐다. 라이징패스트볼을 받는 이두열도 눈을 크게 뜨고 놀라워했다.
기영만은 두 번째 타자의 1루 쪽 보내기 번트 때, 무리하게 중간에서 공을 잡으려다가 타자마저 살려주고 말았다.
공은 가만두고 1루 백업을 들어갔으면 충분히 잡을 수 있는 타구였는데 무사 1루의 부담 때문이었는지 플레이에 여유가 없다. 포수 최광규가 마운드로 올라왔다.
“영만아, 이번에도 보내기 번트 들어올 거다. 초구는 빼자.”
“…….”
기영만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마운드에서 내려온 최광규는 피치아웃 사인을 냈다.
3번 타자지만 2할 중반의 타율에 뜬금포만 있는 타자. 주자들은 리드 폭이 넓다.
기영만이 초구를 던지자 최광규가 벌떡 일어섰다.
그사이 주자들이 뛰었다. 걸렸다. 이제 선 채로 공을 잡아서 3루로 던지면 2루 주자는 런다운(run down)에 걸릴 게 뻔하다.
“아, 저런. 최광규 포수 공을 뒤로 빠트렸습니다. 1, 2루 주자가 모두 한 베이스씩 진루해서 무사에 주자 2, 3루!”
“피치아웃을 한다는 게 그만 공이 너무 높았습니다. 아, 기영만 투수 저런 실수를 하네요. 강하게 던지려고 했던 모양인데 1회부터 난조입니다. 투수 코치가 올라오네요.”
기영만의 공은 어이없게 최광규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완전히 얼이 빠진 표정의 기영만에게 이계현 투수 코치가 다가갔다.
“수고했다. 그럴 수도 있는 거니까 마음 쓰지 말고, 응?”
이계현 코치가 공을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불펜을 향해 손짓했다.
성낙기는 공을 던지다가 기분이 급 좋아져서 마운드로 달려갔다. 연습구를 던지는 도중 이계현 코치가 말을 건넸다.
“1, 2점 준다 생각하고 편하게 던져. 이거 잘 막으면 오늘 내가 술 산다.”
“정말이십니까? 그럼 도봉산막걸리에 닭볶음탕 사주세요.”
“알았으니까 잔말 말고 집중해.”
“넷.”
***
김현욱이라는 투수가 있었다. 혹사 논란이 있었지만 1997년에 쌍방울 레이더스 소속으로 구원으로만 20승을 올리며 다승왕, 평균자책점 1위(1.88), 승률 1위(0.909) WHIP 1위 피안타율 2위(.204), 탈삼진 4위(135개) 등으로 리그를 휩쓸었다.
최고의 투수 반열에 오른 그는 그 해에 구원으로만 157과 2/3이닝을 던졌다.
김현욱 투수 역시 성낙기처럼 몇 회를 가리지 않고 필요하다 싶으면 언제든 마운드에 올라갔다. 그 결과 구원으로 20승이라는 다시는 나오지 않을 불멸의 기록을 갖게 되었다.
“이거 막으면 막걸리 사준댔지?”
다만, 당시 김현욱 투수의 마음은 어땠을지 모르나, 성낙기는 희희낙락(喜喜樂樂)그 자체.
승도 승이지만 막걸리까지 걸린 경기다 보니 더 의욕이 솟는다.
죽다가 살아나서 그런지 성낙기의 성격은 자신도 모르게 낙천적으로 변해 있었다.
이계현 코치는 공을 주고 내려오면서 괜한 소리를 했나 싶었다.
안 그래도 평소에 엉뚱하고 약간 맛이 간 형태를 보이는 친군데, 회식 얘기에 마음이 들뜨지나 않을지 걱정이다.
그런 걱정을 하면서 이계현 코치가 더그아웃에 들어오는 동안 성낙기는 초구를 던지고 있었다.
따악-
이계현 코치가 놀라 뒤돌아보니 성낙기는 투수 쪽으로 온 타구를 잡아 3루로 던지고 있다.
3루 주자는 3루로 뒤돌아가다가 아웃, 3루수 안학규는 주자를 잡은 뒤 곧바로 1루로 던져 순식간에 투아웃이 완성되었다.
“헐, 어이가 없네. 저렇게 쉽게 잡아내는 거야?”
“하여튼 운도 좋은 놈이다. 어떻게 타구가 지 앞으로 가냐.”
이오수와 임병주의 대화처럼 성낙기는 초구를 퀘이크볼로 던져서 타자를 솎아냈다.
타자는 몸 쪽 치기 좋은, 더없이 이상적인 높이와 코스였기에 작심하고 휘두른 타구였다.
퀘이크볼의 움직임은 비록 1.2cm였지만 배터 박스에 다 와서 배트에 맞는 순간의 움직임이기 때문에 정확히 맞추기 힘든 데다가, 약간 상승하는 라이징성 궤적과 약간 가라앉는 체인지업성 궤적 둘 모두 사용이 가능했다.
성낙기는 땅볼을 유도하기 위해 두 번째를 택했다.
삼호슈퍼스타즈 팬들은 단박에 표정이 밝아졌다.
전에도 위기 상황을 잘 막아내더니 며칠 전의 호투에 이어 또다시 위기를 막아내고 있다.
성낙기는 팬들의 기대를 알기라도 한 듯 다음 타자 역시 중견수 앞 높은 플라이로 잡아냈다.
더그아웃으로 들어오자 선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표현을 좀체 않는 허봉호 감독도 입이 찢어지면서 코를 벌름거렸다.
***
성낙기가 1회를 깔끔하게 막고 내려오자 3루 쪽 관중석에선 난리가 났다.
치어리더들은 격하고 야한 율동을 마다하지 않았고 관중들은 성낙기를 연호하며 기쁨을 만끽했다.
마치 승리라도 한 것 같다.
“와우! 내 저럴 줄 알았어요. 성낙기는 무언가 특별해요.”
“참 대단하네요. 성낙기 같은 선수를 알아본 아가씨 말입니다.”
“아유, 아가씨 아니고 팀장요! 스카우트 팀! 장!”
“아이고, 내 정신… 버릇이 되어가지고.”
“오, 성낙기 투수 참 대단합니다. 위기 상황을 마치 베테랑처럼 막아내고 있어요. 떨릴 만도 한데 전혀 긴장되지 않는 모습입니다.”
“그렇죠? 이 선수 특별합니다. 실점 위기에서 감정 기복이 없습니다. 너무 쉽게 던져요. 이런 유형의 투수가 바로 클로저에 적합한데… 아쉽습니다. 클로저에게는 강속구로 윽박지르는 힘이 필요한데 다 갖고도 한 가지를 갖지 못했네요. 어쨌든 인상적인 위기 탈출입니다.”
bbs의 유시진 캐스터와 장종운 해설자가 성낙기의 투구를 보고 멘트를 쏟아냈다.
성낙기는 성낙기 대로 특별한 기분이었다.
상대 타선을 잘 막고 막걸리도 얻어먹게 생겼다.
성낙기는 더그아웃에 들어오자마자 이계현 코치를 바라보았다.
이계현 코치는 성낙기를 힐끔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이 성낙기에게는 약속을 외면하려는 몸짓으로 보였다.
‘도봉산 막걸리를… 사주지 않을 셈인가……?’
만약 그렇다면 다시는 위기 상황에서 잘 던지지 않으리라.
-휴유, 애 생각하는 거 봐라. 이래가지고 무슨 야구를 하겠다고… 쯧쯧…….
-내 말이 그 말이다. 꼬냑이면 몰라도 막걸리가 뭐냐, 참 저렴하게 논다.
존이 실바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성낙기가 젊은 나이임에도 막걸리를 좋아하는 건 할아버지, 아버지부터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 역사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죽기 1년 전부터 밥을 끊고 막걸리와 김치만으로 연명했다.
아버지 역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국숫집을 하면서 틈만 나면 앞집 ‘멍청이순대’에서 막걸리를 마셨고 저녁 무렵이면 취해서 흔들거렸다.
국수를 삶는 담당인 아버지는 국수를 덜 익히거나 너무 퍼지게 삶아 손님 원성이 자자할 정도였으니 그 피가 어디로 가겠는가.
제 아무리 죽다 살아나고 신의 혜택을 받았다 해도 내림은 못 속인다.
설왕설래 하는 동안 1회 말 공격이 끝났고 성낙기는 마운드에 올라갔다.
그리고 3회까지 2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하고 있었다.
문제가 생긴 건 4회였다.
아직 양 팀 모두 점수가 나지 않은 상황.
성낙기는 은성캣츠의 4번 타자를 맞이했다.
이진운. 2할 중반의 타율에 두 자리 수 홈런을 기록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