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007화 선발은 정해졌습니까? 4
“아, 투수를 바꾸는데요? 마무리 임병주가 올라왔습니다. 이 시점의 투수 교체… 어떻게 보십니까?”
“잘 던지던 성낙기 투수였는데요. 글쎄요… 감독으로서는 임병주에 대한 믿음이 크다, 이렇게 봐야겠죠? 아무래도 성낙기 선수가 5회 위기는 잘 막았지만 공이 눈에 익을 때가 되었거든요.”
유시진 아나운서와 장종운 해설자는 허봉호 감독의 투수 교체를 이해하는 방향으로 멘트를 하고 있었다. 성낙기가 잘 막아왔기는 해도 임병주만 하겠냐는 선입견이 그들에게도 깔려 있다.
“아오, 저기서 투수를 바꾸나? 임병주 선수 ERA가 어떻게 되죠?”
“1승 5패 7세이브 ERA 4.28입니다.”
주심 뒤의 관중석에서 김아경은 전력 분석관 정진수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프로야구 저니맨으로 유명했던 정진수는 은퇴 후 mlb에 유학을 떠났다가 2년 만에 귀국했다.
여기저기 코치 자리를 알아보던 중 단장의 중재로 스카우트 팀장 김아경을 보좌하는 일을 맡았다.
일반적인 코치 급의 연봉을 제시했기에 흔쾌히 승낙했다.
“교체 타이밍이 어떤가요?”
“약간 이르게 보입니다. 성낙기에게 1이닝을 더 맡겨도 좋을 듯한 데요.”
“그렇죠? ERA 4.28이라면 불안한데… 2이닝을 깔끔하게 막을 수 있나?”
경기는 김아경이 걱정한대로 흘러갔다.
임병주는 나오자마자 볼넷에 도루를 내주더니 2루타를 맞고 1실점. 그 후 원아웃을 잡고 1사 3루에 스퀴즈 번트에 2실점째를 허용하고 이닝을 마무리했다.
경기는 9회까지 그대로 흘러서 7 대 9 중외울프스의 승리로 끝났다.
***
-넌 잘 던졌어. 잘못은 투수 교체를 그지같이 한 감독에게 있는 거다.
저녁을 먹고 숙소 앞 벤치에 앉아 풀이 죽은 성낙기 옆에 실바와 존도 앉았다. 성낙기는 시큰둥한 얼굴로 안타를 맞은 공을 생각하는 중이다.
나름 잘 던졌는데 교체를 당하고 팀까지 지게 되니 기분이 좋을 리 없다.
“제가 계속 던졌으면 실점을 안했을까요?”
-내가 보기엔 8회까지는 막을 수 있었을 거야. 교체 타이밍이 조금 빨랐어. 너를 위해서는 좋은 건지도 모르지. 지금쯤 감독도 후회하고 있을 테니까.
실바와 존은 약간 의기소침한 성낙기를 달래고 있다. 지금은 채찍질을 할 때가 아니라 위로가 필요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들이니 상황에 맞는 멘트가 성낙기에게 도움을 준다.
-앞으로 이런 날이 많을 거야. 항상 이기는 건 신만이 가능하지. 더구나 야구는 네가 아무리 잘 던져도 타자들이 점수를 뽑지 못하면 이기지 못해. 능력치가 올라갈수록 넌 더 높은 레벨의 야구를 경험하게 될 테고 그때마다 좌절과 기쁨을 번갈아가면서 맛보게 되겠지. 승부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의 숙명이니 깊이 생각하지 마.
실바의 조언이 그럴듯하다.
“음, 그런가요?”
-그러긴 뭘 그래. 좌절 기쁨 다 헛방이다. 정신 못 차리는 애들이나 그런 거 따지는 거지 나 같은 레전드는 지나가는 하루 일과야. 밥 먹는 거하고 똑같아. 던지면 못 치는데 거기에 무슨 감정이 필요하겠냐.
이번엔 존의 말. 가만 들어보니 자기 자랑이다.
-야 존아, 애는 아직 햇병아린데 말을 그렇게밖에 못하니? 뒈지고 나서도 철이 덜 들었어?
-이런 원시인 같이 생긴 새끼가 주댕이를 막 놀리네.
“그만 좀 하세요. 안 그래도 힘없는데 틈만 나면 으르렁거리네.”
성낙기의 말에 둘 모두 입을 다물었다.
***
중외울프스와의 첫 경기를 지고 그 다음 날도 삼호슈퍼스타즈는 경기를 내줬다.
에이스 이세환이 던진 경기였기에 출혈은 더 컸다.
오늘 경기까지 지면 3연전 스윕패. 게임 차를 좁히는가 했더니 다시 5게임 차로 벌어졌다.
사기가 떨어진 마당에 오늘도 진다면 앞으로도 게임 차를 뒤집을 여력이 없을 것이다.
5위 중외울프스는 6위 탈피를 위해서는 꼭 넘어야 할 팀이다.
허봉호 감독은 고심했다. 이세환 다음은 기영만인데 엊그제 당겨 써버렸고 선발 자원 문상열도 그 경기에서 구원으로 나가 중외울프스 타선을 막아내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면 시즌 중반인데도 선발이 셋뿐이다.
셋뿐이니 등판 간격을 지켜주지 못했고 스윙맨들은 늘 불펜 대기이거나 그때그때 땜빵용 선발로 나갔다.
그렇다고 성낙기를 쓰자니 아직 검증도 안 된 느린 볼 투수일 뿐이다.
‘아무래도 문상열이 낫겠지?’
필드를 바라보는 허봉호 감독에게 성낙기가 보였다. 글러브를 끼고 어슬렁거리는 폼이 지가 선발로 정해진 놈 같다. 이계현 투수 코치와 함께 마영진 단장이 허봉호 감독 옆에 와 선다.
“마단장? 어서 오시오.”
대학 후배인 마영진 단장에게 허봉호 감독이 말을 건넸다.
“선발은 정해 졌습니까.”
“선발? 당연히 정해졌지.”
허봉호 감독은 불펜에서 공을 던지고 있는 문상열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문상열 선수인가요? 제가 따로 추천 드릴 선수가 있습니다만,”
“누구 말이오?”
이번엔 마영진 단장이 쓸 데 없이 배터 박스 쪽을 어슬렁거리는 성낙기를 가리켰다.
“성낙기? 선발로 나가기엔 경험도 그렇고 공이 너무 느려. 120km로는 안 통해.”
“오늘 경기를 내주면 안 됩니다. 그렇게 해보시지요. 어차피 감독님이 데려온 선수잖습니까.”
“마 단장, 지금 감독 흔들려고 왔어요? 성낙기는 선발하라고 입단 시킨 게 아니야. 추격조 용이지.”
“촉이 와서 그러는 것이니 한 번만 양해를 해주시지요. 팀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감독님과 똑같습니다.”
“허, 그것 참. 선수 구성은 둘째 치고 이젠 선발까지 간섭하려고?”
“언짢으시면 말씀드리지 않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마영진 단장이 돌아섰다. 허봉호 감독은 생각에 잠겼다. 기분이 좋지는 않지만 이게 다 성적이 안 나기 때문이다. 옆에 있는 이계현 코치에게 물었다.
“이 코치 생각은 어때?”
“글쎄요, 저야 감독님 정하시는 대로…….”
“아니, 그런 말 말고 이 코치라면 누굴 보내겠어?”
“솔직히 말씀드리면 성낙기입니다. 아직 한계를 드러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계를 보이지 않았다라… 좋군.”
허봉호 감독은 저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성낙기를 불러 말했다.
“선발로 나간다. 준비 해.”
성낙기는 드디어 선발로 마운드에 섰다. 팀 사정이 좋지 않은 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
-하여튼 되는 놈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 몇 번 어슬렁거리다가 선발 꿰차는 거 봐.
성낙기는 존의 비아냥을 뒤로 하고 연습구를 던졌다.
[(체력 55/100)입니다. 느린 변화구 –0.5. 포심 전력투구 + 빠른 변화구 –1. 라이징패스트볼 and 퀘이크볼 –1.5 체력감소.]
체력에 관한 글귀가 성낙기의 눈앞에 떴다. 50이었던 체력이 그새 5가 더 올랐다. 근육 강화가 2단계가 되고는 더 가팔라진 느낌이다. 느린 변화구는 체인지업과 커브 계열, 빠른 변화구란 투심과 포크 등의 구종을 뜻했다.
체력에 관한 설명이 뜨자 엊그제부터 줄곧 구질마다의 체력 감소를 연구했던 실바와 존이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중외울프스의 1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전우식.
0.278의 타율에 도루 11개 득점 29. 일단 주자로 나가면 골치 아파지는 유형의 타자다. 볼넷을 잘 골라서 출루율도 3.45나 된다.
‘첫 타자니까 강하게. 정면 승부-라이징패스트볼.’
성낙기는 라이징패스트볼의 궤적을 머리에 떠올렸다. 떠올리는 그대로 공이 가는 건 아니지만 떠올리는 것만으로 최소한 공의 구질은 결정할 수 있다. 실바와 존에게 그립에 대해서 배웠지만 상태 창이 생긴 이후로 성낙기 본인의 생각에 맞춰 변화구의 그립이 저절로 쥐어졌다. 하지만, 공의 궤적은 결국 능력치의 성취에 따라 낙폭과 위력이 정해진다.
따악.
3루수 파울플라이 아웃. 첫 타자를 초구에 잡았다. 전우식은 평범한 포심패스트볼이 느리게 몸 쪽으로 오자 웬 떡이냐는 심정으로 잡아당겼는데 생각보다 볼이 솟아오르는 바람에(정확히는 거의 가라않지 않는)공의 아래쪽을 공략한 셈이 되어버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5회 초까지 중외울프스는 억지로 만든 4안타를 제외하고는 빈타에 허덕였다. 그 4안타도 바가지성이거나 수비의 보이지 않는 실책성 플레이에 의해서였다.
그만큼 성낙기의 공은 도무지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첫 타자부터 강하게 라이징패스트볼을 뿌리더니 3회까지 포심패스트볼과 라이징패스트볼만 줄곧 뿌려댔다.
중외울프스 타자들은 치기 좋은 높이에 알맞게 느린 공이 눈에 들어오자, 기다림 없이 배트를 휘둘러 댔다.
그 결과는 3회까지 높은 플라이 볼 아니면 땅볼이 다였다.
떠오르는 공이 눈에 익을 때쯤 되면 평범한 속구가 무심하게 꽂혔고 평범하다 싶으면 다시 라이징패스트볼이 들어오곤 했다.
그러다가 4회부턴 현란한 변화구를 가미하기 시작했는데 커브, 체인지업, 슬라이더와 아직 제구가 잡히지 않은 포크, 투심까지 정신없이 포수 미트에 꽂혔다.
“화아~~성낙기? 처음 보는 앤데 뭐야? 못 던지는 게 없잖아.”
“그러게, 포심도 그냥 포심이 아니고 변화구는 하도 많아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어리벙벙한 상태에서 5회를 마쳤을 때 중외울프스 선수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공의 빠르기만 보고 쉽게 봤던 투수에게 철저히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올스타전에서 홈런 레이스를 할 때의 딱 그 스피드로 오는 공을 공략 못하고 헤매는 자신들에게 화도 났다.
무엇보다 이대로 계속 끌려갈 것 같은 불안감이 천천히 선수단 전체를 뒤덮고 있다.
“변화구도 변화구지만 포심을 공략 못 하면 아무것도 안 된다. 공을 끈질기게 보고 치기 힘든 공은 커트를 해. 포심이 생각보다 살아오니까 그걸 염두에 두고 내야만 넘긴다는 생각으로 간결하게 치도록.”
중외울프스의 염상우 타격 코치가 6회부터의 투구 공략을 지시했다.
5회까지 스코어는 4번 강창선의 적시 2루타로 2 대 0 앞선 상황. 성낙기는 5회까지 투구 수 58개로 꽤 경제적인 투구를 했다. 체력이 좋은 투수라면 잘만 하면 9회 완투까지도 가능하다.
성낙기가 6회에 9번 첫 타자를 5구만에 유격수 땅볼로 처리하고 두 번째 타자를 맞았을 때 또 눈앞에 글귀가 떴다.
[체력이 12 남았습니다. 적극 관리하십시오.]
‘체력이 12 남았다고?’
1회에 55였던 체력은 6회 첫 타석까지 43을 소모했다. 변화구만 던지면 앞으로 24구를 던질 수 있고 전력투구로는 12구 내외만 던질 수 있다.
라이징패스트볼과 퀘이크볼은 8,9구 쯤 일까? 이렇게 되면 완투는 어렵다.
-야야, 완투 생각 말고 라이징이건 뭐건 최선을 다해서 던져.
성낙기가 체력 수치를 보고 앞으로 던질 공의 배합을 생각할 때, 실바가 말했다.
성낙기는 변화구 위주의 투구로 이닝을 길게 끌고 가려 했지만 실바의 말을 듣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래. 여기까지 던진 것만 해도 어디냐. 무실점이 중요하지.’
괜히 변화구만 던지다가 실점이라도 한다면 옥의 티다. 무실점은 끝까지 좋은 기록으로 남지만 오래 던지겠답시고 슬슬 던지다가 털리기라도 하면 후반에 약한 투수로 낙인찍히기 십상이다.
성낙기는 라이징패스트볼을 전력투구했고 변화구의 구사 비율을 적절히 섞었다.
포심패스트볼의 제구는 최대한 까다롭고 스트라이크 존에 걸칠 듯 말듯하게 던졌고 카운트는 주로 변화구로 잡는 전략을 썼다.
한데, 첫 타자도 그랬지만 타자들의 배트질이 다르다. 공을 끝까지 보는 것은 그렇다 쳐도 스윙마저 반경이 짧아졌다. 카운트를 잡으러 들어가는 변화구를 커트해 낸다.
‘뭐지? 전략을 바꾼 건가?’
1번 타자 전우식이 투 스트라이크 투 볼에서 커브와 슬라이더를 커트해서 7구까지 끌고 간다. 이러면 완투는 고사하고 6회까지만 던져야 할지 모른다.
-어이, 체인지업으로 잡아. 그게 최선이야.
이번엔 존이 자신의 주특기 체인지업을 권한다. 딴은 맞는 말일 수 있다. 타자를 속이기는 체인지업만한 무기도 없다.
‘에라,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