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005화 선발은 정해졌습니까? 2
3년 전 300억이라는 거금을 주고 배인수, 김혁 투수와 1번 타자 지용규 선수 등을 FA로 잡았으나 신통치 않았다.
3년이 지난 지금은 셋 모두 노쇠화 경향이 뚜렷하다.
요즘, 1군 경기만 보면 속이 터진다.
21승 38패로 바닥을 기고 있으니 도무지 정도 안 간다.
두 부녀는 2군에 눈길을 돌렸다.
2군도 바닥을 헤매는 건 같지만 2군엔 젊은 유망주라도 있어서 TV를 보는 재미가 있고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들의 앞날을 점쳐보기도 한다.
아니, 점치는 것뿐 아니라 선수를 단장에게 추천하는 일도 있다. 단장은 회장이자 구단주인 김현중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
나쁘게 말하자면 월권이 심한 스타일이고 좋게 말하자면 선수 수급에 관한 한, 감독을 제치고 단장이 알아서 하는 mlb식 시스템을 적용하는 것이다.
김현중 회장은 mlb보다 더 심한 면이 있다.
즉, 김현중 회장의 말 한마디면 2군 선수가 1군으로 갈 수도 있고 1군 선수가 2군으로 내려갈 수도 있다.
“성낙기. 저런 선수가 우리 팀에 있는 줄 몰랐어요. 공은 느린데 꽤 까다로운 구질을 갖고 있어요.”
“모를 수밖에. 1군과 달리 2군은 단장보다 허봉호 감독에게 힘이 더 실려 있으니까. 그 사람이 한때는 프로 1군 감독까지 했었으니 그런 점을 참작해서 선수단을 맡긴 거다. 그런데… 느려도 너무 느리네.”
“1군이 젊어져야만 팀의 미래가 있어요. 지금 평균 나이가 30살에 가까운 거 아세요?”
“1군 말이지?”
“그렇죠. 체력도 달리는 데다 열정도 없어요. 강릉에 가면 속이 터질 지경이에요. 연습들은 하는데 뭔가 느낌이 없죠. 그에 비해, 서울 팀들은 선수들 눈이 벌써 살아 있어요.”
60중반 김현중 회장의 셋째 김아경. 늦둥이 딸로 올해 27세이다. 야구광 아버지 밑에서 야구광으로 자라나 선수들 보는 눈이 스카우트 급이다. 더불어 구단주의 딸이다 보니 일찌감치 야구단 운영 시스템도 꿰고 있다.
“아참, 아경아. 말이 나왔으니 너 2군으로 나가볼래?”
“2군에 가서 뭐하라고요?”
“스카우트 팀장 정도 하면 되지 않을까? 선수 수급을 네가 도맡아 하는 거지. 선수 구성도 단장과 상의하도록 하고. 전력 분석원 한 명 붙여 줄게.”
“헐… 그럼 저는 나중에 뭐해먹고 살아요? 일을 배우라면서요.”
“기획 실장은 그대로 하면서 2군을 만들어 봐. 팜시스템이 너무 부실해. 조상무에게 네 일 도우라고 할 테니까 일 걱정은 말고. 어차피 삼호 백화점 체인망은 너에게 물려줄 거다. 오빠들은 그거 아니라도 할 거 많아. 어때?”
“그러시다면 좋아요. 제 조건을 들어주신다면 2군을 운영해 볼게요.”
“아빠와 딸 사이에 무슨 조건?”
“이대로는 2군도 가망 없어요. 2군이라도 상위권에 들어가야 할 맛이 나지 않겠어요? 세븐윈터스 안민기하고 이중호를 데려다 주세요.”
“오늘… 던진 그 투수?”
“네, 안민기 선수는 앞으로 150km까지 던질 재목이에요. 이중호 선수도 매력적이고요. 그 선수들만 수급이 되면 경찰청은 어쩔 수 없다 쳐도 북부 리그 2위까지는 해볼게요.”
“정말이냐? 좋아, 아경이가 제대로 해볼 모양이군. 보는 눈도 아주 좋아. 이중호와 안민기라… 내가 보기에도 떡잎이 좋은 선수들이야.”
“호호, 어릴 때부터 아빠랑 야구장에 다닌 덕분이죠.”
“이번 주에 결정 날 거니까 코칭스태프들하고 선수들 상견례 준비해. 나도 딸 덕에 마음 놓고 야구장 좀 가보자.”
“네, 알겠어요. 아빠.”
“너 나랑 약속한 거다. 2위까지 올리기로. 만약 그렇게만 해주면 크리스마스 선물로 너에게 제주 콘도를 주마.”
“아우, 우리 아빠 최고!”
부녀는 떡 주무르듯 순위를 말하지만 사실은 불가능에 가깝다. 안민기와 이중호도 선수 본인이 싫다면 데려올 방도가 없고, 데려온다 해도 6월 20일 현재 21승 36패, 승률 3.68의 성적으로 북부 리그 6위를 기록 중이다. 1위를 도맡아 하는 경찰청은 까마득하고 5위 중외울프스와도 5게임이나 뒤쳐져 있다.
목표인 2위 안강피그스와의 격차도 무려 12게임. 앞으로 55경기가 남았다지만 뼈가 하얘지도록 연습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성낙기는 김아경의 기대와 달리 황낙균에게 우익수 앞 안타를 허용했고 1루 주자는 3루까지 파고들었다. 원아웃 1, 3루에서 뒤이은 2번 타자 강지성이 유격수 땅볼을 쳤을 때 3루 주자의 홈 쇄도로 1실점.
투아웃에 주자 2루에서 3번 타자는 ‘포심+퀘이크볼’로 간신히 중견수 플라이로 돌려세웠다.
2이닝까지는 느린 구속과 볼 끝 변화로 깔끔하게 틀어막았지만, 3이닝째는 공이 눈에 익은 타자들을 깔끔하게 막지 못했다.
3이닝 1실점.
허봉호 감독과 이계현 코치 역시 아쉬움과 기대가 교차했다.
2안타를 맞았지만 그런대로 자기 몫을 한 건 틀림없다. 어쨌든 무너지지 않고 3이닝을 책임졌다.
9회에 불펜 투수 임병주가 1볼넷 2안타 1실점으로 경기는 3:8, 세븐윈터스의 승리로 끝났다.
비록 졌지만, 오늘 삼호슈퍼스타즈의 수확은 성낙기였다.
잘하면 추격조가 아니라 필승조에도 들어갈 수 있는 투구 내용이었기에 허봉호 감독은 지고도 성낙기의 발견을 위안으로 삼았다.
“오빠! 낙기 오빠!”
경기가 끝나고 더그아웃에서 나오는데 성낙기의 귀에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여동생 서희다. 서희 옆엔 중학교 때부터 단짝인 장하연과, 교복 입은 여학생 여럿이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왔다.
그동안 경기장을 간혹 찾은 적은 있었지만 고등학교 때 말고는 좋은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늘 상대 타선에 통타당한 후 강판이 이어졌다.
아버지 성용구와 어머니 양연숙은 풀이 죽은 아들의 모습에 한동안 경기장을 찾지 않다가 삼호슈터스타즈 입단 소식을 듣고 관람하러 온 것.
때마침, 성낙기의 등판이 이루어졌고 3이닝 1실점이라는 성적을 거뒀다.
“뭐하러 오셨어요.”
“우리 아들… 오늘 잘했다.”
어머니 양연숙이 눈물을 흘렸다. 오랜 동안의 재활 끝에 보여준 좋은 투구였다. 고2때 이후로 처음이다. 오늘만 같다면 얼마나 좋으랴.
서희 친구들은 종이와 볼펜을 들고 성낙기에게 사인을 해달라고 졸랐다.
성낙기는 서희의 단짝 장하연의 사인에만 마지막에 하트를 그려 넣었다. 장하연도 웃으면서 눈을 찡긋거렸다.
“고생했다. 강타선을 상대로 아주 잘 던졌어.”
아버지 성용구도 기쁨을 감추느라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서희는 그런 가족들의 모습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오빠, 이제 프로 선수 된 거야? 응?”
“서희야… 2군이다.”
“2군은 뭐 프로 아닌가? 2군에 있다가 1군으로 가는 선수들이 얼마나 많은데. 헤헷, 오빠 오늘 완전 멋있었어.”
역시, 가족은 가족이다. 다들 눈물을 글썽이면서 성낙기를 축하해 주고 있을 때 누군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버님, 그동안 마음고생 많으셨지요? 저기… 드랙 실바라고 아실랑가 모르것네요. 이제 염려 놓으셔도 되겠습니다. 성낙기는 지가 책임지고 갈쳐불랑게요.
실바의 느닷없는 전라도 말.
-어허허, 이 넘 말에 속지 마시이소. 내사 마 디비졌으이 그란다 치지마는 인자 커나가는 아 들은 다릅니데이. 아무데나 아 잘못 매낏다가는 클 납니다.
이번엔 존의 경상도 사투리. 둘은 아버지와 어머니 바로 앞에서 얼굴을 들이밀며 말하고 있다.
“무슨 말씀들을 하시는 겁니까. 보이지도 않는 사람들이 말이지. 사투리들은 또 어디서 배웠대?”
-야야, 보이든 안 보이든 인사는 나누고 제자를 거두는 게 예의지. 안 그래?
-그러취.
실바의 말에 존이 껑충하게 긴 목을 까닥거렸다.
실바와 존은 성낙기 아버지의 추레한 모습을 보고 지레짐작으로 시골에서 왔다고 생각하고 사투리로 질러본 것인데 잘못 짚었다.
성낙기 아버지는 강원도 강릉시에서 국숫집을 하는 어엿한 도시 사람인 것이다.
“낙기, 너 왜 그래? 누구한테 말하는 거야?”
어머니 양연숙 씨가 놀라서 물었다. 언뜻 보면 정신이 나간 행동이기 때문이다. 성낙기는 대충 얼버무리고는 더그아웃으로 향했다.
더그아웃은 무거운 분위기였는데 다만, 성낙기를 바라보는 눈은 전과 달랐다.
전엔 꿔다 놓은 보릿자루 취급을 받았다면 흘끗흘끗 쳐다보면서도 왠지 같은 팀원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다.
성낙기 자신이 3이닝을 1실점으로 막아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런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란 참 묘하다.
만약, 1이닝 3실점쯤 했더라면 아무리 좋은 눈빛을 보내도 성낙기 자신은 반대로 생각했을 것이다.
***
1989년 드랙 실바와 헤이드 존이 데뷔한 mlb는 그야말로 센세이션의 연속이었다.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1픽으로 지명된 존과 그 전전해에 2라운드 7픽으로 지명된 실바는 1년과 3년을 마이너리그에서 보낸 후, mlb에 1989년 나란히 입성하였는데 둘의 활약은 기존의 최고 투수들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지만, 신인상은 좀 더 나은 활약을 펼친 헤이드 존에게 돌아갔다.
1989년 헤이드 존의 성적은 21승 7패 ERA(earned run average) 1.45.
1989년 드랙 실바의 성적은 20승 9패 ERA 2.39.
드랙실바는 그 해 노히트노런 게임을 두 번이나 일구어 냈고 이는 mlb 신기록이었다. 그에게는 노히트 머신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
며칠 후, 성낙기는 불펜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포수는 최광규, 그는 나이 35세의 노장에 삼호슈퍼스타즈 2군의 안방마님이다. 1군의 포수가 부상을 당하면 바로 호출이 떨어지는 위치였다.
1군에 이름을 올린 포수가 2명이기에 그들이 한꺼번에 고장이 나지 않는 한 1군에 올라갈 일은 없어 보이지만 포수의 부상이 생각보다 잦은 편이라서 최광규는 작년까지 1년에 한두 번쯤은 땜빵으로 올라가곤 했다.
대부분, 일주일 혹은 보름 정도에서 역할이 끝나는 게 문제라면 문제다. 한마디로 공을 받는 것에는 이골이 난 선수였다.
타격이 시원찮고 어깨가 약한 편이어서 1군 주전이 못되었을 뿐이지, 판단력이나 블로킹 등은 나무랄 데가 없다. 그런 그가 지금 놀라는 중이다.
팡.
삼호슈퍼스타즈의 2군 투수 중 가장 느린 공을 받으면서 말이다. 투수의 공의 위력을 판단하는 능력은 베테랑인 그가 감독 못지않다. 더구나 직접 미트를 대 보면 타자가 칠 만한 공인지 아닌지 바로 답이 나온다.
“성낙기! 공 좋은데? 내가 지금껏 포수 하면서 처음 받아보는 공이다.”
최광규는 칭찬에서 그치지 않고 성낙기의 공의 궤적과 볼 끝을 몸으로 느끼면서 의문을 품는다. 어떻게 이런 공을 던지지? 하는 의문.
‘정말 뭐지? 공은 기껏 해봐야 125km에도 못 미치는데 끝이 솟는다. 거기다 굉장히 지저분한 공인데 왜 내 앞에 멈춰서 부르르 떠는 것 같지?’
불펜 투구를 마친 성낙기가 휴식을 취할 때 최광규는 이계현 투수 코치에게 볼의 특이한 움직임을 전했다.
“그래?”
투수 코치 이계현이 짤막하게 대답했는데, 사실은 그도 먼발치에서 성낙기의 공을 보면서 느꼈다. 수수께끼 같은 투수가 팀에 들어왔다고.
어제 손톱 부상에서 돌아온 이세환이 연진맘모스를 상대로 6이닝 2실점으로 호투, 5:4로 이겼기에 더그아웃 분위기는 좋았다.
그제도 4회까지 선발투수 문상열이 5실점으로 마운드를 내려왔지만, 이오수 등의 불펜 투수들이 잘 막아 승리를 거뒀기에 오늘까지 이긴다면 올해 들어 처음으로 3연승을 하게 된다. 그동안 추격조 성낙기는 등판하지 못했다.
“성낙기가 공이 참 묘하지?”
“신기한 놈이라고 봐야지. 저런 스피드로 던지기 힘든 공을 던지니까.”
부상에서 돌아온 4번 강창선과 이세환의 대화. 강창선은 팀의 주장이고 에이스 이세환과는 나이도 같고 동기였다.
선수의 공은 선수가 알아본다.
그들은 추격조에 불과한 성낙기의 공이 묘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팀을 이끌어가는 실질적인 리더였는데 베테랑 최광규가 있지만 2군에서 2할 3푼은 말발이 먹힐 성적이 아니다.
산전수전 다 겪어 경험이 많아도 성적이 따르지 않으면 자기 혼자 몸을 추스르기도 힘들다.
그에 비해, 강창선은 타율 2할 7푼 6리에 6월 하순 현재 열흘간 부상으로 이탈하고도 11홈런이니 시즌이 끝나면 20홈런은 충분히 가능하리라는 계산이 선다.
팀의 에이스 이세환은 5승 3패에 ERA 4.08, 10승은 가능한 수준으로 삼호슈퍼스타즈 프로 2군의 수비력을 생각하면 ERA 4.08은 그리 나쁜 수치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