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5화 - 멘탈을 부숴라 >
빨리빨리 움직인 덕분에 다행히 다운은 경기 시작 전에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여기 주문하신 로랑 파스타 하나요.”
“왜 이렇게 늦었어?”
글라이드의 말에 다운은 어이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늦다뇨. 얼마나 빨리 온건데.”
“어차피 이거 로랑이 미리 네가 올거 맞춰서 준비해놨을거 아냐. 네건 뭐냐?”
“저는 고기죠.”
“그것도 다 구워놨을거고. 받아만 오면 되는건데 왜 이렇게 늦었어?”
“그야 제가 셀럽이라서 그런걸걸요?”
오는길에 다운은 몇 번이나 사인요청과 사진요청을 받았다. 그 중에서 사인요청은 거절하고, 사진요청만 받아들여서 몇 번을 찍어주다보니 이렇게 늦게 된 것이었다.
“하여간 스타병이 걸려가지고······. 네거 좀 꺼내봐 같이 먹게.”
“제건데요?”
“돈은 내가 냈다.”
“네이.”
원래 경기장에서 음식은 야구를 관람하면서 먹어야하는 것이다. 하지만 글라이드와 다운은 웬수라도 진 것처럼 빠르게 음식들을 흡입했다.
‘점수가 안나고 있을 때 빨리 먹어둬야지.’
나중에 지고 있을 때는 음식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기에 그나마 편하게 볼 수 있는 1회 초 수비에서 위장에 음식을 욱여넣으려고 한 것이었다.
“결국 리키가 나왔네?”
“네.”
사실 어제까지만해도 더지를 선발로 세울지 카스티요를 세울지에 대해서 캐시와 많은 고민을 했었다. 카스티요는 4차전에서 1회 흔들리기는 했지만, 5이닝을 소화했다. 그에 비해서 더지는 2차전에서 3.2이닝 동안 3실점을 하면서 5이닝조차 지켜내지 못했다. 냉정하게 따져봤을 때, 더지보다는 카스티요가 나은 선택일 수 있었다.
“오늘은 선발이 없어요. 처음부터 전력투구로 쭈욱 이어나갈거거든요.”
“타선 한 바퀴 돌 때까지는 리키를 쓸 생각인가보군.”
“버텨준다면요.”
다행히 1회부터 전력을 다하며 최고 98마일의 공을 뿌리는 더지는 어제까지 꽁꽁 묶여있었던 브레이브스 타선이 상대하기 쉬운 선수는 아니었다.
- 아지 시몬스 헛스윙 삼진! 오늘 리키의 공은 장난이 아닙니다!
- 5이닝을 던질 생각이 없는 모양인데요? 그리고 벤치에서도 그걸 감안한건지 알렉스 알마다와 디에고 카스티요가 벌써부터 몸을 풀고 있습니다.
- 케빈은 오늘 필요하다면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투수를 바꾸겠다는 스탠스를 취하고 있군요. 하지만 중요한건 타이밍이죠. 얼마나 적절한 타이밍에 투수를 교체하는지가 오늘 경기의 키 포인트가 될 것 같습니다.
시몬스를 삼진으로 돌려세운 더지는 뒤이어 나온 캐스퍼 주니어를 상대로도 초구부터 98마일짜리 패스트볼과 뚝 떨어지는 커브를 욱여넣으며 윽박질렀다. 그런 뒤 세 번째 공으로 바깥 쪽 싱커를 보더라인에 기가막히게 꽂아넣었다.
따아악!
- 타구가 뜹니다! 하지만 중견수 스프라우트가 제 자리에 멈춰서 타구를 기다립니다. 타구는 멀리 뻗지 못하고 스프라우트의 글러브 속으로 빨려들어갑니다.
- 오늘 구위도 좋은 모양인데요? 분명히 제대로 맞은 것 같은데 공이 뻗지를 않네요.
- 그런 것도 있지만, 몸 쪽과 바깥쪽을 나눠서 던질 수 있는 리키의 제구력 역시 칭찬해야할 부분입니다. 시몬스와 캐스퍼 모두 좌완을 상대로 좋은 기록을 보유한 선수들이거든요. 그런 선수들을 상대하려면 몸 쪽에 대한 공략이 잘 이루어져야합니다. 그리고 오늘 리키는 그 공략을 아주 잘 하고 있죠.
이런 부분들은 누구보다 더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나이스 피칭 리키!”
오늘 컨디션이 굉장히 좋았다. 어쩌면 짧은 이닝을 던지는 오프너나 불펜이 자신의 체질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 정도였다. 그만큼 오늘의 구위와 제구는 완벽한 수준이었으니까.
‘누가 와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주어진 목표는 타선이 한 바퀴 돌 때까지다. 그 정도는 완벽하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더지! 더지! 더지!
K! K! K!
오늘따라 더 압도적인 관중들의 응원을 등에업은 더지는 타석에 들어온 드링크워터를 응시했다. 눈을 한 번 마주쳐준 더지는 비어만이 보내는 사인을 읽었다.
‘몸 쪽 높은 코스.’
좋은 선택이다.
스윙의 매커니즘 덕분에 드링크워터가 항상 어려워하는 코스다. 특히나 좌완이 그 코스에 던지는 것은 더더욱 부담스러워했다. 그도 그럴것이 우완이 몸 쪽으로 던지는 건 멀리서 가까이로 들어온다. 그래도 보이기는 잘 보인다는 말이다.
하지만 더지와 같이 쓰리쿼터로 던지는 좌완이 그 코스로 던지는 공은 등 뒤에서 몸 쪽으로 틀어박힌다. 그러다보니 공을 응시하는 것도, 대응하는 것도 힘들어지는 것이다. 그건 함께하던 작년에도 그랬고, 여전히 잘하고 있는 올 시즌에도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는 약점이었다.
‘나만 제대로 던지면 돼.’
제대로만 던진다면 드링크워터는 절대로 저 공을 공략할 수 없다. 나온다고 하더라도 내야를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탓!
오른 발을 박찬 더지가 와인드업을 한 뒤 공을 뿌렸다.
‘제대로다.’
손 끝의 느낌이
날아가는 궤적이
정확하게 자신이 노렸던 몸 쪽 높은 코스로 박혀들어갔다. 심판의 눈이 삐지만 않는다면 분명히 저 공은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을 코스로 들어갈 것이다.
드링크워터가 저 공을 건들면?
그러면 내야 팝업이나 포수 팝업, 내야 땅볼 중에 하나가 될 것이다.
따아아악!
과하게 힘을 줘서 돌린 배트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공을 띄웠다.
발사각으로 따지자면 거의 한 50도는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아쉽지만 이런 공은 홈런이 될 수 없는 공이다.
“레프트!”
더지는 공이 뜨자마자 높이 손을 들어올리며 몸을 돌렸다.
앤더슨도 자신이 공을 잡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는지 천천히 낙구지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어?”
타구가 슬슬 내려올 때가 되었음에도 앤더슨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뒤로 걷던 앤더슨은 더 이상 뒤로 갈 수 없게 되었다.
탁!
“아!”
짧은 신음과 함께 펜스를 살짝, 정말 살짝 넘어서 드링크워터의 타구가 떨어졌다.
텅!
- 아······. 이게 넘어가네요.
- 스탯캐스트 상에서 발사각도가 49.634도였어요. 보통은 25도 근처에서 가장 홈런이 많이 나오고, 40도를 넘어가면 홈런이 거의 나오질 않는다고 봐야하거든요? 올 시즌에도 40도를 넘겨서 기록된 홈런은 3개에 불과했어요. 그리고 그 홈런들은 좌측 펜스가 극단적으로 짧은 구장인 펜웨이 파크, 미닛메이드 파크, 그리고 비슷하게 우측 펜스가 짧은 오라클 파크에서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글라이드 파크는 비대칭형 구장이 아니란 말이죠. 그런데 이게 홈런이 되네요. 심지어 지금 보시면 완벽하게 몸 쪽 높은 코스로 제구가 잘 된 공이었거든요.
- 하지만 드링크워터가 잘 받아친거군요.
- 그렇죠. 거기다가 오늘 좌측 외야로 부는 바람 역시 한 몫 했을겁니다.
구장 내부 대형 스크린 위에 있는 깃발은 그다지 펄럭이는 느낌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붕 외부에 꽂혀있는 깃발은 좌측 외야를 향해 찢어질듯이 펄럭이고 있었다.
- 원래라면 아웃이 되어야 할 공이었즌데 높은 발사각도 때문에 저 위쪽에 있는 바람의 영향을 받은거군요.
- 아마 그런게 아닐까 싶습니다. 좌익수 수비가 평균 이상이라는 평가를 받는 브라이언이 처음 자리를 잡았던 곳보다 10미터는 더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났거든요. 저 위쪽에서는 얼마 움직이지 않았지만, 워낙에 높이 뜨다보니 최종적인 낙구 위치가 저만큼 벌어진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나저나 이렇게되면 리키의 멘탈이 걱정되는데요. 정말 잘 제구된 99마일짜리. 오늘 최고의 공을 던졌거든요. 그런데 홈런이 나와버렸어요.
더그아웃에서도 곧바로 벤치코치가 뛰어나왔다. 그와 함께 내야수들이 모두 마운드로 모였다.
“교쳅니까?”
덤덤하게 물어보는 더지에게 벨리츠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방금 저 공은 어쩔 수 없는 공이었어. 영상을 봤는데 운이 없었을 뿐이야. 공 자체는 나무랄데없는 완벽하게 제구된 공이었어.”
벨리츠의 고개가 돌아가자 비어만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코디가 잘 친거야. 네 공은 완벽했어.”
“맞아. 저건 어쩔 수 없는 결과였어.”
그럼에도 침울해진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다. 그 가운데서 올드먼이 슬쩍 농담을 던졌다.
“내가 약만 안했으면 저런 비슷한 홈런을 때려서 상대 선발 멘탈을 부숴놓았을텐데 아깝네.”
지금 이 상황에서 셀프디스를 하는 올드먼을 보고 다들 어이없다는 듯이 그를 바라봤다. 분위기가 살짝 바뀐 것을 느낀 올드먼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 팀에는 젊을 때의 나처럼 마약이나 술을 하지 않은 수많은 좋은 타자들이 있잖아. 분명히 복수를 해줄거다. 그러니 홈런은 잊고 네가 컨트롤 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자. 오늘 네 컨트롤은 최고잖아 리키.”
올드먼의 말에 벨리츠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더지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
“그래 리키. 지금 건 노카운트니까 남은 한 바퀴 잘 해보자. 딱 한 바퀴만 막으면 돼. 알겠지?”
더지는 그들의 말에 힘을 얻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파아아앙!
- 앙헬 주니어! 루킹 삼진! 방금의 홈런으로 인해 멘탈이 흔들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기우였습니다!
비록 홈런을 한 방 맞기는 했지만, 더지는 앙헬 주니어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며 당당히 마운드를 내려왔다.
“잘 막았다. 리키!”
“나이스 피칭!”
“이제 우리가 나설때다! 잘 하자!”
“리키가 당한만큼 괴롭혀줘!”
드레이크가 파이팅 넘치게 타석에 들어섰다. 행동은 언제나처럼 자신감이 넘치고 생각없어보이지만 드레이크의 머리는 차갑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와쿠마 타카시.’
일본에서 건너온지 2년 된 선수로, 지난 해 데뷔시즌에 15승 5패 2.44를 기록하며 브레이브스의 우승에 엄청나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듣는 선수. 지난 시즌 내셔널리그 신인왕도 그의 차지였다. 이번 시즌 역시 좋은 활약을 보여주며 브레이브스의 지구 우승에 큰 몫을 했다.
그의 주 무기는 칼같은 제구, 194cm의 당당한 체구에서 나오는 최고 96마일의 패스트볼과 일본인 투수들이 자주 구사하는 스플리터. 그리고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성명절기와도 같은 70마일 초반대의 커브가 있었다.
‘귀찮은건 제구가 정말 좋다는건데······.’
타자들이 투수의 컨디션을 확인하는데 1회를 쓰는것처럼, 배터리는 보통 1회에 심판의 존을 확인하는데 보내곤 했다. 특히나 타카시는 제구를 중시하는 일본에서 와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1회에 심판의 존을 확인하는 작업에 매 번 꽤 많은 공을 들이는 편이었다.
‘이 점을 공략해야겠다.’
존을 확인하려고 하는 선수를 불편하게 만드는 방법은 존을 확인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정말 아닌 것만 빼고는 다 친다.’
원래보다 한 마디 정도 배트를 짧게 잡은 드레이크는 모든 공을 건드리겠다는 마인드로 준비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드레이크의 커트 쇼가 시작됐다.
딱!
- 아 방금은 조금 높은 것 같았는데 이걸 건드리네요.
- 아쉽습니다. 네이트 조금 더 자기 공을 칠 필요가 있어요.
딱!
- 몸 쪽으로 오는 공이었는데 잘 대처했어요.
딱!
- 이야~ 저걸 커트하네요 네이트!
- 타이밍을 맞추기 쉽지 않았을텐데요!
딱!
- 또 커트합니다!
딱!
- 아니 네이트! 오늘 안타는 안칠건가요?
- 하하! 벌써 8번째 커트입니다!
타카시는 볼을 하나도 던지지 않았, 아니. 던지지 못했다. 전부 커트를 하다보니 모두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는 바람에 볼이 기록되지 않은 것이었다.
얼마나 지긋지긋했으면 9번째 공은 완전히 빠지는 커브를 던졌다.
- 하하! 이번에는 아예 움직이지 않네요.
- 너무 빠졌다 이거죠?
아예 빠지는 공에는 손을 안대고, 존 안에 들어가는 공은 모두 건드려댄다. 투수 입장에서 이렇게 짜증나는 일은 없었다.
파아아앙!
- 삼진! 스플리터에 헛스윙을 하면서 드레이크가 삼진으로 물러납니다.
- 하하! 분명 삼진을 당해서 이긴건 타카시인데 표정이 좋지를 않네요.
- 아무래도 그렇겠죠. 1회 첫 번째 타자를 잡는데 무려 18개를 던졌으니까요. 기분이 좋을리가 없죠.
마지막 공도 스윙하는 바람에 존은 확인도 못했고, 고작 1번 타자를 상대하는데 18개나 공을 소비했다. 기분이 나빠질대로 나빠진 상황에서 앤드류 켈리가 타석에 들어섰다.
< 265화 - 멘탈을 부숴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