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머리 MLB 단장-263화 (263/268)

< 263화 -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

레이스 팬들은 5차전을 승리하고 돌아온 레이스 선수단을 만원관중과 엄청난 응원으로 맞이했다.

열화와 같은 팬들의 응원 덕분인지 홈으로 돌아온 6차전, 진성찬은 브레이브스 타선을 9이닝을 88구, 무실점으로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다행히 이번에는 5회 알버트 서머스의 투런을 시작으로 5점을 내는데 성공한 레이스가 승리를 가져갈 수 있었다.

관중들의 열기가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은 관중석에 누군가의 운동화 소리가 울려퍼졌다.

곧이어 그는 자리 하나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털썩!

10분 정도 지났을까?

이번에는 구두 소리가 나타났다.

운동화 소리와 같은 동선을 타고 온 구두는 운동화와 한 칸을 띄운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오셨습니까 단장님.”

능글맞은 운동화의 말에 구두가 피식 웃었다.

“그래요 왔습니다 이제 곧 은퇴할 레이스의 슈퍼스타 배리 브래넌 선수.”

브래넌에게 맞장구를 쳐주는 듯 했던 다운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왜 부른거야. 나 바빠.”

“뭐 때문에? 월드시리즈?”

“그래. 하······.”

월드시리즈 마지막 경기다. 이제 내일이면 누가 이기던간에 승자와 패자가 갈리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레이스와 브레이브스 모두 우승 기념 티셔츠와 우승한 뒤 즐길 샴페인 등을 준비해야한다는 말이었다. 브레이브스야 4차전을 할 때부터 계속해서 준비해왔겠지만, 레이스는 이제서야 창고에 있던 물품들을 꺼내서 세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근데 웬 한숨이야?”

“바쁜데 또 마음은 드럽게 복잡하다고 이게.”

지금까지는 상관없지만, 이렇게 모든 세팅을 끝내놓은 다음에 패배라도 하게된다면?

마치 코 앞에서 프로젝트가 엎어진 느낌이 아닐까?

“난 프로젝트 같은거 안해봐서 모르겠는데.”

“시즌 준비 잘 해놨는데 개막 전날 다친거야.”

찰떡같은 다운의 비유에 브래넌의 표정이 금세 일그러졌다.

“아 젠장. 빌어먹을 일이네.”

“그렇지. 글러브도 배트도 다 새로 사놨는데 다쳐버려서 그 모든 준비가 무의미해진거지. 심지어 배트랑 글러브는 계속 쓸 수 있잖아? 근데 이 우승 기념 티셔츠는 어디 풀지도 못해. 그냥 그대로 폐기처분해야돼.”

“엿같은 일이구만.”

“아주 엿같지.”

잠시동안 두 사람은 그 엿같은 기분을 만끽하느라 말을 멈췄다.

“그래서 왜 보자고 했어? 그것도······.”

다운은 가운데 비어있는 자리를 눈으로 가리켰다.

“페퍼 여사님의 자리를 두고 말이야.”

다운의 말에 브래넌이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아~ 뭐 그냥.”

“그냥 뭐.”

“일단 그 제안은 받아들이려고.”

그 제안이라는 건 지도자코스에 대한 제안이었다. 다운이 봤을 때, 그리고 현재 감독인 캐시가 봤을 때에도 브래넌은 지도자로서의 재능이 있었다. 그렇기에 다운은 마이너리그부터 차근차근 지도자 코스를 밟으라는 권유를 했었다.

“대신 1년은 푹 쉴거야. 우리 애들이 제발 아빠랑 좀 놀고 싶다고 어찌나 찡얼거리던지······.”

“당연하지. 1년간 푹 쉬고, 지도자 코스 밟자. 그래서 나중에 레이스를 이끄는거야. 이제는 감독 코치도 프랜차이즈인 시대라고. 여기 계신 페퍼 여사님도 네가 이끄는 레이스가 얼마나 보고싶으시겠어?”

다운은 만족스러운 듯이 웃으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다운의 얼굴은 그대로 굳었다.

“내가 오늘 감독님이랑 이야기 했는데······.”

뭔가 불길한 느낌이 스물스물 올라온다.

“야, 나 갑자기 해야할 일이 생각······.”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가려던 다운의 시도는 눈치빠른 브래넌에 의해 곧바로 저지되었다.

“아 왜! 너 또 선발로 뛰게 해달라고 그러는거지?”

다운의 말에 브래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네?”

“당연하지 내가 널 몰라? 그리고 그걸 왜 나한테 말하러 와. 선수 선발 권한은 감독한테 있는거 몰라?”

“알지. 아는데 보스가 너한테 허락 받으면 선발출장 시켜준다고 했다고.”

브래넌의 말에 다운은 이마를 짚으며 눈을 감았다.

어쩐지 아까 미안한 눈빛으로 어깨를 툭툭 치고 퇴근하더니······.

“두고보자 케빈······.”

캐시를 향해 이를 아드득 갈아준 다운이 곧이어 창끝을 브래넌에게로 돌렸다.

“아니 넌 얼마 전에도 픽하고 쓰러진 애가 뭘 선발로 뛰겠다고 그러는거야?”

“아니 그건 탈진해서 그런거였다니까? 마크가 말한거 너도 들었잖아?”

“들었지. 며칠 새 너무 집중한데다가 몸을 혹사시키는 바람에 다리가 풀린 것 같다고.”

“그래! 그리고 이미 많이 쉬었잖아?”

“그 뒤로도 이게 심장에 영향을 미치는 영향은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조심하는게 좋을 것 같다는 말도 했었지.”

“병원에만 가면 술담배 하지 말라는 말과 다를게 없는 말이잖아.”

“네 심장이 술담배랑 동급이냐?”

“아니지. 경기를 술담배랑 동급으로 취급하는거지.”

하여간 저 자식은 이상한데서 쓸데없이 날카롭다.

“사랑니 뽑은 치과의사가 본인은 술담배하고 목욕까지 했다는 이야기 못들어봤어? 주의하라고 권고하는 정도라는 말이야 결국.”

“그리고 넌 이미 권고한대로 조금 쉬었으니 이제 나가게 해달라는거지?”

“정확해!”

“좋아. 그럼 케빈한테 대타로 널 내보내라고 할게.”

“무슨 소리야! 당연히 선발출장이지!”

“네가 선발출장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어. 하지만 난 단장으로서, 그리고 네 친구로서, 네 건강을 걱정할 수 밖에 없어.”

“아니지, 그건 그냥 단장으로서의 의견이잖아! 내 친구라면 선발출장을 지지해줘야지! 오늘 팬들 응원하는거 못봤어?”

“봤지.”

그들은 선수들이 헛스윙을 할 때에도

“괜찮아 네이트! 안그래도 더웠었는데 네 스윙덕에 시원해졌어!”

“그래 자신감이 있어야지! 무기력하게 물러나는 것보다 지금 스윙이 훨씬 보기 좋아! 잘하고 있어!”

볼을 던질때에도

“아아아아아깝다!”

“아냐 분명 심판이 잘못 판정한거일거야! 어이 심판! 방금 그거 스트라이크 아냐?”

“그래 찬! 저런게 내리는 판정에 신경쓰지 말고 네 공만 던져!”

홈런이 터질때에도

“와아아아아아아! 그거지 젠장할!”

“사랑해 알버트! 믿고 있었다고!”

“빌어먹을 자식아! 넌 올리버 믿는다며! 알버트는 내가 믿고 있었어!”

“누가 믿건 뭐가 중요해 제에에엔장!”

선수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응원과 격려를 보냈다.

개막전에서 봤던 부산의 수많은 팬들못지 않은 엄청난 응원과 환호성이었다.

“그 함성을 듣기만 하라고? 그 모든 함성이 나에게 올 수 있는 마지막 기횐데, 그걸 한 타석만 즐기라고? 노노노! 네가 정말로 내 친구라면 그런 말은 하면 안되지!”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배리······.”

“빌어먹을 넌 이해 못하고 있어! 네가 아까 말했잖아. 우승 세레모니부터 기념 티셔츠까지 전부 준비해뒀는데 내일 패배하게 된다면 말짱 헛짓이 된다고. 그게 마치 개막을 앞두고 부상을 당하는거랑 비슷한 느낌일거라고 했잖아? 지금 내가 느끼는 기분이 바로 그래! 시즌 내내 은퇴 준비 다 해놨더니 마지막 경기에서조차 뛰지 못한다고? 이게 무슨 엿같은 경우야? 어? 네가 내 친구라면 이럴순 없지!”

브래넌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어차피 마지막 경기다. 이미 브래넌이 넘어진지도 사흘이 지났다. 그 동안 브래넌은 푹 쉬었다. 그리고 이제는 마지막 경기다. 시즌의 마지막이자 브래넌 커리어의 마지막 경기. 많아봐야 다섯 타석만 들어가면 된다. 그걸로 끝인거다.

다운이 넘어올 것 처럼 보이자, 역정을 내며 씩씩거리던 브래넌이 옆에서 속삭였다.

“다운 제발. 진짜 제에에에발 부탁이야. 마지막 경기는 온전히 뛸 수 있게해줘. 보스도 네가 허락하면 해준다잖아. 응? 여기 있는 페퍼 여사님을 봐. 월드시리즈 우승도 우승이지만 내 마지막 은퇴 경기에서 한 타석만 나오는걸 원하시겠어?”

그의 말에 다운은 샐쭉한 눈으로 브래넌을 야렸다.

“너 이 자식, 차사하게 일부러 여기 자리했구만?”

“틀린 말은 아니잖아? 여사님이라면 내가 뛰는걸 보고싶어하셨을걸?”

맞는 말이다.

페퍼 여사님이라면 분명 브래넌이 은퇴식에서 멋진 타구들을 날리는 것을 보고싶어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아까 지도자 코스 이야기할때는 페퍼 여사님 잘 써먹더니 내가 이야기하니까 치사하다고? 니가 더 치사하다!”

명분에서 밀린다.

그럼에도 다운은 고민만을 계속할뿐 브래넌에게 확답을 내리지는 않았다.

‘나라고 널 보내고 싶지 않겠냐고!’

브래넌은 상대 투수에게는 상대하기 부담스러운 타자다. 이번 포스트시즌에서도 내내 잘하고 있었고, 언제나 한 방을 때려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그런 핵심 타자다. 그런 선수의 은퇴식이 될 수도 있는 경기인데 다운이라고 내보내고 싶은 마음이 없는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쓰러졌다는 사실은 아직도 다운의 마음 한쪽을 붙잡고 있었다.

‘확실치는 않지만 얼마전 쓰러진 것도 영향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어.’

빈혈기가 돌았다는건 심장이 피를 원활하게 공급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제 곧 은퇴인데 굳이 무리를 시켜야할까? 건강을 위해서라면 한 타석만 상징적으로 내보내는게 맞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는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운이 고민을 멈추지 않자 결국 브래넌은 다운을 움직이기 위해서 마지막 수를 꺼내들었다.

“다운.”

“왜.”

“네가 그랬잖아. 단장으로 이제 더 이상 해줄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어서 불안하다고.”

1차전이 열리기 전 라커룸에서 했던 말이다.

“내 은퇴 전 마지막 월드시리즈야. 내가 아직까지 가져보지 못한 우승반지. 그 마지막을 내가 하고싶어. 아무것도 못하고 동료들이 하는 걸 지켜볼수만은 없다고. 만약 이러다가 우승을 놓치면? 그러면 난 뭐라고 생각할 것 같냐?”

만약 자신이 브래넌의 상황이었다면?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지 않을까?

“난 내 남은 평생을 ‘그때 내 동료들이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내가 출장했었다면 나도 우승반지가 있을 수 있었어! 달랐을거라고!’라면서 저 친구들을 탓하면서 살고싶지는 않아. 그러니 다운 이렇게 빌게.”

자리에서 내려온 브래넌이 무릎을 땅에 대고 다운의 두 손을 잡았다.

“내 마지막을 내가 장식할 수 있게해줘.”

커리어의 마지막을 앞둔 레이스의 슈퍼스타가 자신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이렇게 부탁한다.

다운은 그런 그의 마음을 무시할만한 냉혈한은 못되는 사람이었다.

“빌어먹을 자식아 일어나!”

“안돼! 네가 허락하기 전에는 안일어날거야.”

“허락할게. 그러니까 일어나라고!”

다운의 말에 브래넌이 폴짝 일어났다.

“진짜? 진짜지?”

“에휴······. 그래! 널 감독으로 앉히는건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지금도 이러는데 나중에 감독이라도 되면, 얼마나 떼쓸지 진짜 상상하기도 싫······.”

중얼거리는 다운의 코 앞에 핸드폰이 들이밀어졌다.

“뭐, 뭐야?”

당황한 다운에게 브래넌이 웃으며 말했다.

“자, 단장님. ‘배리가 선발출장하는것에 찬성합니다.’라고 한 마디 해주세요. 녹음을 해야하거든요?”

감독 배리 브래넌?

진짜 심각하게 고민해봐야할 것 같다.

< 263화 -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