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9화 - 절대 그의 앞에서 고의사구를 하지 마라 >
도니 베스비의 배트가 굉음을 터트리고, 타구가 멀리멀리 날아가기 시작했다. 경기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아니,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타구가 외야를 넘어 펜스를 넘기는 홈런이 될 거라는걸 직감할 수 밖에 없었다. 순간적으로 그 시끄럽던 글라이드 파크 전체가 조용해졌다. 그와 동시에 중계진들도 할 말을 잃었다.
- 아······.
자신들이 본분을 망각했다는 것을 깨달은 중계진들은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 베스비가 이런 타이밍에 홈런을 때리네요.
- 분명 베스비도 장타력이 있는 선수이기는 하거든요. 하지만 이런 순간에서라니. 정말······.
- 야속하네요.
- 그 말이 딱 맞네요. 야속합니다.
- 마운드에 있는 찰리도 아쉬운 모양입니다.
제프리스는 괜시리 애꿎은 마운드를 파헤치며 분풀이를 했다.
- 그럴만도하죠. 정규시즌에서 68경기에 등판해서 63세이브를 기록하며 프란시스코 로드리게스가 2008년에 기록한 62세이브를 넘어서 메이저리그 단일시즌 세이브 최다 기록을 세운 선수잖습니까? 블론 세이브가 한 경기밖에 선수인데, 이런 상황에서 블론이라니 당연히 아쉽겠죠. 저희도 이렇게 아쉬운데 본인은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빨리 잊어야합니다.
- 그렇습니다. 지금 얻어맞은 홈런은 결국 어떻게든 줬을겁니다. 그리고 아직 저희에게는 공격기회가 두 번이나 더 남았잖습니까?
- 맞습니다. 그리고 아직 진 것도 아니죠! 경기는 이제 동점이 됐을 뿐이니까요! 찰리는 본인이 선발이라고 생각하고 지금부터 브레이브스 타선을 상대한다고 생각해야합니다. 더 이상의 실점은 안돼요!
다행히 제프리스는 2루 앞 땅볼로 8회를 마무리했다.
“고생했다 찰리.”
“나이스 피칭. 괜찮아! 쳐져있지 마!”
“그래! 아직 경기 끝난거 아니야!”
위로하는 선수들 사이로 브래넌이 튀어나왔다.
“얘들아! 찰리가 월드시리즈에서 승리 한 번 챙기고 싶단다!”
브래넌의 말에 제프리스도 자책감은 눌러버리고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야수들에게 말했다.
“그래! 나도 승리 좀 챙겨보자! 올 시즌 0승이라고 0승! 마무리 투수라고해도 승리는 갖고싶다고!”
우울해질수도 있는 분위기가 브래넌의 농담과 제프리스의 재치있는 답으로 다시 밝아졌다.
“하하! 그런거였어? 어쩐지!”
“우리가 노력해야겠네.”
“얘들아 찰리한테 승리 하나 안겨주자!”
레이스의 8번 타순은 윌슨부터 시작이었다. 하지만 캐시는 윌슨을 그대로 내보내지 않았다. 그 대신 빅터 디아즈를 올렸다.
- 여기서 대타가 들어가네요.
- 빅터 디아즈. 시즌 마지막에 올라와서 메이저리그 맛을 살짝 본 선수죠. 수비는 그다지 인상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타격재능만큼은 인정받고 있는 선수입니다. 저는 이 선택이 괜찮다고 봅니다.
- 왜죠?
- 지금 마운드에 있는 알베르토 몬텔라는 지난 시즌까지만해도 블루제이스에 있던 투수입니다. 그리고 알렉스 윌슨은 그에게 상당히 약했거든요.
- 알렉스는 원래도 우완에 약했죠.
- 하지만 그 중에서도 몬텔라에게는 더더욱 약했습니다. 지난 3년간 몬텔라를 상대로 때려낸 안타가 두 개에 불과하니까요.
- 그 두 개가 다 홈런이네요?
- 알렉스가 우완을 상대로 정확도가 떨어지는거지 파워가 떨어지는건 아니거든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선두타자에게 필요한건 파워가 아니라 정확도입니다. 그리고 빅터 디아즈는 그걸 완벽하게 채워줄 수 있는 선수죠. 특히 트리플 A에서 후반기 타율이 4할에 가깝습니다. 레이스 내부에서는 배리와 비슷한 스타일로 클 수 있는 선수라는 평가까지 있을 정도니까요.
- 굉장히 평가가 높네요?
- 하지만 그 평가 옳다는 걸 증명하는건 본인의 몫입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선수들이 제 2의 누군가로 불린 뒤 사라졌습니까? 빅터에게는 오늘 이 경기가 그 전환점이 될 수 있어요. 그렇다고해서 큰 스윙은 필요없습니다. 그냥 이 공격을 헛되이 날려먹지 않고 이어나가기만 하면 돼요!
그런 중계진의 바람대로 디아즈는 타석에서 자신에게 되뇌이는 중이었다.
‘크게 치지 마! 작게! 작게! 내 공만 가볍게 치는거야.’
보스는 팀배팅 같은건 생각하지말고 자신있게 돌리라고 했다. 하지만 그건 이런 상황에 나가게 되는 신인에게 돌아오는 아주 의례적인 말이었다.
이 상황에서는 무조건 팀 배팅을 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디아즈는 가상의 스트라이크 존을 작게, 아주 작게 설정했다.
파아아앙!
“스트으으으 라이크!”
살짝 존에 걸치는 공.
약간만 더 위로 왔다면 자신이 설정한 존에 걸리는 공이었을거다. 하지만 존에 들어오지 않은 공이었기 때문에 디아즈는 미동도 하지 않으며 참았다.
“얼었나봐 루키?”
상대 포수는 자신이 얼었다고 본 모양이다. 하지만 자신은 얼지 않았다.
‘바뀐 투수가 잘 얻어맞는 이유는 공이 완벽하게 제구가 되지 않기 때문이지. 기다리면 분명히 내가 설정한 존으로 공이 올거다.’
디아즈는 공 세 개를 더 지켜봤다.
“볼.”
“볼.”
“스트으으으 라잌!”
그리고 다섯 번째 공.
‘왔다!’
드디어 자신이 설정한 존으로 공이 왔다. 이미 기다리고 있었기에 몸은 가볍게 돌아나갔다.
따악!
- 3루수 옆을 빠져나가는 타구! 디아즈! 1루를 지나 2루까지! 2루까지! 2루에서! 세잎! 아주 잘했어요! 가볍게 갖다맞춘 타구로 2루까지 진루하는 디아즈!
- 2루에서 환히 웃네요! 하하!
- 자신이 해야하는 일이 뭔지 확실히 알고 있었어요! 저게 팀 배팅이죠!
- 그렇습니다! 디아즈는 곧바로 대주자 로렌 앳킨슨으로 교체됩니다.
짝짝짝짝짝!
휘이이이이익!
- 관중들이 기립박수로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는 디아즈를 맞아줍니다.
- 하하하! 자격이 있죠! 동점이 된 지금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건 득점권에 주자가 나가는겁니다. 그런데 지금 디아즈가 그 역할을 확실히 수행해줬어요. 레이스 팬들은 그에게 키스를 날리고싶을겁니다.
키스를 날리고 싶은건 팬들만이 아니었다.
“잘했다 이 사랑스러운 자식!”
캐시는 더그아웃 가장 앞에서서 들어오는 디아즈의 헬멧에 뽀뽀를 했다. 그게 인상깊었는지 선수들조차 하나같이 헬멧에 키스를 했다.
- 다시 한 번 캐시가 대타를 쓰네요. 스탠하우스의 타석에 마이어가 들어갑니다.
- 마이어 대타의 역할은 아마 주자를 3루로 보내는거겠죠?
- 그렇습니다. 여기서 앤더슨을 쓸 수도 있기는 한데, 마이어가 조금 더 빠르죠. 그런만큼 푸쉬번트를 하면서 자신도 살아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거든요.
- 출루까지도 노린다는거군요.
- 그렇습니다. 브레이브스의 타선이라면 한 점 차로는 사실 불안한 감이 있거든요. 게다가 마이어는 스탠하우스보다 조금 더 안정적인 중견수 수비를 보여줄 수 있는 몇 안되는 선수 중 하나입니다. 레이스는 이번 교체로 9회 초에 있을 수비의 안정화까지 노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중계진의 생각과는 다르게 마이어는 자신의 출루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둘 다 잡으려다가는 망하는 수가 있다.’
괜히 두 가지를 다 잡으려다가 둘 다 망해버리는 것만큼 최악의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마이어는 주자가 확실히 진루할 수 있도록 3루수 쪽으로 번트를 댔다.
톡!
절묘하게 대어진 번트 타구는 데굴데굴 굴러 3루수 앞으로 향했다.
- 앙헬 주니어가 대쉬, 3루로 뛰는 앳킨슨은 쳐다보지도 않고 1루로 곧바로! 마이어는 아웃! 하지만 앳킨슨을 3루로 보내려는 원래 목적은 달성합니다.
- 완벽한 보내기번트를 보여준 마이어에게 관중들이 박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타석에는 선제점의 주인공, 네이선 드레이크가 들어옵니다.
공을 띄우기만 하면 되는 상황.
하지만 그것을 너무 의식해서였을까?
따악!
- 아······.
공이 떠오르기는 했다. 하지만 내야를 빠져나가지 못했다.
“인필드 플라이.”
곧바로 인필드 플라이가 선언되고 앳킨슨은 그대로 3루에 묶여버렸다.
- 너무 띄워야한다는 생각이 강했나보네요.
- 드레이크도 자신의 머리를 톡톡 치며 자책하네요.
상황은 바뀌었다.
8회 말, 투 아웃 주자는 3루에 있다.
- 그래도 괜찮습니다. 아직 할 수 있어요 레이스!
- 맞습니다. 이어지는 타석에서는 오늘 안타 두 개가 있었던 앤드류 켈리, 그리고 볼 넷 두 개, 안타 한 개로 세 차례 출루를 이루어낸 마르코 루이스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점수는 얼마든지 낼 수 있어요.
그런데 여기서 브레이브스도 승부수를 띄웠다.
- 앤드류 켈리를 거르네요.
- 확실히 켈리가 부담스럽기는 하죠. 타격감이 나쁜 것도 아니고, 언제나 한 방을 때려줄 수 있는 그런 선수니까요. 1루가 비어있는데 굳이 그와 승부하는건 위험한 일일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들의 승부수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 어? 또 다시 손을 흔드는데요? 다시 한 번 고의사구입니다!
바로 만루작전이 나온것이다.
- 어차피 오늘 경기는 1점 싸움입니다. 1점을 주면 지는 경기, 그런 경기에서 아웃카운트는 하나가 남았습니다.여기서 만루가 되면 야수들도 전진수비가 아니라 정위치에서 수비를 하게 되죠. 그러면 전진수비로 인해서 비는 뒷 공간이 사라지는겁니다. 괜히 홈에 들어가는 주자를 잡겠다고 하는 것 보다는 내야 어디에도 가까운 베이스로 공을 주면 아웃카운트를 벌 수 있는 만루작전으로 편하게 수비를 하겠다는거죠.
- 이를테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군요.
- 그렇습니다. 다음 타자는 오늘 안타가 하나도 없는 배리 브래넌. 만약 여기서 안타가 나오면 점수가 대량으로 나겠지만, 배리는 오늘 안타가 없고, 야수들은 정위치에서 수비를 하니 아웃을 만들어낼 수 있는 확률이 높죠. 아주 날카로운 선택입니다.
- 그런데 제프. 묘하게 웃고 있는 것 같은데요?
- 하하 그렇게 보였나요?
- 네. 지금 웃고 계시거든요. 혹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저도 같이 좀 웃고싶거든요.
- 하하! 그러면 이유를 알려드리죠. 지금 브레이브스 더그아웃에서는 아주 이성적인 판단을 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를 놓쳤어요.
- 그게 뭐죠?
- 야구계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절대 배리 브래넌의 앞에서 고의사구를 하지 마라.’는 말이요.
브래넌은 승부욕이 매우 강한 선수다. 그리고 자존심도 세다. 그렇기에 자신의 앞에서 누군가를 거르고 자신과 상대하는 상황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 데뷔 후 지금까지 앞 타자가 고의사구로 출루한 경우는 총 8번이 있었습니다.
- 생각보다는 많지 않네요?
- 그야 앞 타자가 고의사구로 출루할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아까도 말했지만, 야구계에는 그런 말이 돈다고 했죠? 최근 5년간은 누구도 배리의 앞 타석에서 고의사구를 하지 않았거든요. 그러다보니 8번밖에 없는겁니다.
- 그래서 그 8번의 결과가 어떻게 되나요?
그의 말에 제프가 씨익 웃었다.
- 8타수 8안타 2홈런 17타점.
따아아아아악!
< 259화 - 절대 그의 앞에서 고의사구를 하지 마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