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7화 - 그녀를 위해서(2) >
경기 시작 전
브래넌은 감독을 찾아갔다.
“감독님.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캐시는 선수들이 찾아와서 부탁하는 것을 싫어하는 부류가 아니었다. 게다가 브래넌이 ‘부탁’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것 역시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청탁 비용은 커피 한 잔인데 괜찮겠어?”
“1분만 기다려주세요.”
옆에 있는 커피머신에서 커피를 추출한 브래넌이 캐시의 앞으로 커피를 대령했다.
“흠~ 역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커피는 남이 타준 커피란 말이지.”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캐시가 시선을 맞췄다.
“자, 그럼 무슨 청탁이 있어서 왔는지 들어볼까?”
“오늘 절 3번에 넣어주실수 있습니까?”
캐시의 눈이 가늘어졌다.
라인업 선발은 감독의 고유 권한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선수도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물론 자격이 되는 선수에 한해서는 말이다. 그리고 배리 브래넌은 그 자격이 충분한 선수였다.
“이유는?”
“오늘 600홈런을 달성할 수 있는 느낌이 들어서······ 라고 하면 믿어주십니까?”
브래넌의 부탁을 듣는 순간, 캐시는 그의 생각을 이해했다.
‘페퍼 여사님이 추모 경기에서 600홈런을 보고 떠나시길 원하는구만.’
브래넌이 최근 치고있는 5번은 기본적으로 2회에 들어가는 타순이다. 하지만 3번으로 배치가 된다면 1회부터 무조건 타석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브래넌은 한 번이라도 더 타석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은 3번을 요구한 것이다.
“네 요청은 못들은걸로 하지.”
“네? 하지만 보스······.”
브래넌이 캐시를 설득하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캐시의 손이 그 입을 막았다.
“타순변경을 요구하는건 너처럼 잘하고 있는 선수의 권리야. 알지. 하지만 우리 팀은 어려. 너처럼 생각을 많이 하고 말하러 오는 놈들은 없을거란 말이야. 내가 한 번 허락하기 시작하면 눈에 띄고싶어하는 놈들이 수도없이 나한테 타순변경을 요청할거야. 그리고 난 그런 일 가지고 선수단과 알력다툼을 하기는 싫어. B.U.T!”
캐시는 한 단어씩 힘을 주어 끊었다. 그리고 약간은 실망한 표정을 짓고있는 브래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안그래도 오늘부터 라인업 변동이 있을 예정이었어. 스프가 올스타에 투표로 뽑히기 위해서는 조금 더 실적이 필요한건 알지?”
“네.”
“그래서 우리는 스프를 우익수로, 메이슨과 케빈을 중견수로 쓸 생각이야. 스프에게는 조금 더 타석에서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거지. 그리고 스프가 원래는 4번을 치고 있었지만, 그가 조금 더 공격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여주려면 강한 2번으로 쓰는게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지. 그래서 오늘부터 스프는 2번에 배치될거야. 그런데 그렇게 되면 3~5번 타자를 어떻게 골라야할지가 걱정된단 말이지. 마르코는 워낙에 잘하고 있고, 너도 홈런을 그렇게 때려내면서 시위중이고, 알버트는 최근에 조금 부진하고는 있지만, 이번 시즌에도 분명히 예년처럼 평균회귀를 할거란 말이지. 그래서 아직 3, 4, 5번에 누굴 넣을지는 정하지 않았어. 하지만 오늘 하루정도는 3번에 널 넣으면서 시행착오를 거쳐봐도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앞으로 자신을 찾아와서 타순변경을 요구하는 싹을 자름과 동시에 자신의 요구를 모른체 들어주는 캐시의 말에 브래넌이 피식 웃었다.
“시행착오는 큰 성공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녀석이죠.”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렇게 해서 브래넌의 3번 타자 출장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
“오늘이 무슨 경기인지 알고 있겠지?”
“그랜마 레이스의 추모경기입니다!”
브래넌이 특별히 가까이 지내기는 했지만, 매 홈 경기마다 홈 더그아웃 가까이 앉아서 선수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그녀를 모르는 레이스 선수는 없었다. 이기고 있을때도, 지고 있을때도 항상 우리 할머니처럼 따뜻한 응원을 건네던 그녀를 다들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나 선발 등판을 하지 않는 날에는 관중석 옆으로 가서 그녀와 대화하곤 했던 마음여린 리키 더지는 소식을 듣고는 경기 전까지 계속해서 울음을 터트리기까지 했다.
“오늘만큼은 우리는 질 수 없다. 왜? 그랜마를 위한 경기에서 져서는 안되니까! 마지막 가시는 길까지 웃으며 갈 수 있게! 승리를 볼 수 있도록 승리하자!”
“Go! Rays! Go!”
선수단의 굳은 각오는 1회부터 드러났다.
따악!
- 드레이크의 타구가 3루수와 유격수 사이로! 경기 시작을 알리는 드레이크의 안타!
- 다섯 번 째 공을 받아쳐서 안타를 만들어냈죠. 이제 메이저리그 리드오프의 표준은 네이선 드레이크가 되어야하지 않을까요?
안타를 친 드레이크는 평소에 안타를 치고 취하던 포즈 대신 그녀의 자리를 향해 키스를 날렸다.
- 오늘은 안나 페퍼, 그녀를 위한 경기죠. 선수들도 그녀를 위해 안타를 바치는 모양입니다.
드레이크의 안타에 이어 올 시즌 처음으로 2번에 배치된 스프라우트는 초구부터 강하게 배트를 돌렸다.
따아아악!
- 우측 담장을 직격하는 스프라우트의 타구! 정말 빨랫줄같은 타구였습니다!
- 타구가 너무 빨라서 단타가 되어버렸네요. 드레이크는 3루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본인은 1루에 멈출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스탯캐스트 상에서는 121마일이 나왔습니다!
- 발사각도가 조금만 높았다면 그대로 홈런이었을텐데요. 아쉽습니다!
- 주자 1, 3루 상황에서 오늘의 3번 타자, 배리 브래넌이 타석에 들어섭니다.
오늘 하루는 슬픈 날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뭔가 오늘 홈런을 때릴 수 있을 것 같은, 그게 아니더라도 좋은 타구를 날릴 수 있을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캐시에게 ‘오늘 600홈런을 달성할 수 있을거라는 느낌이 들어서.’라고 했던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커리어를 통틀어서 오늘같은 느낌이 드는 날이 몇 번 있었는데, 그 날은 꼭 홈런이 두 개 이상 나왔었다.
따아아아아악!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 No doubt! 의심할 여지가 없는 타구! 의심할 여지가 없는 홈런! 599홈런! 배리! 브래넌이! 600홈런 고지에 마지막 한 걸음만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홈런이 나오고 관중석이 떠들썩해야하는 지금 이 순간. 관중석이 어찌해야할 바를 모르는 것처럼 조용했던 것이다. 그것을 느낀 브래넌은 1루를 돌아 뛰며 양 팔을 휘저으며 관중들이 함성을 지르도록 유도했다.
‘안나는 절대 이렇게 조용한 구장을 원하지 않았을거야!’
그녀가 수십년간 사랑했던 레이스는 조용했지만, 그녀가 정말로 즐겼던 레이스는 떠들썩하고 가득찬 관중들이 즐길 수 있었던 구장이었으니까. 관중들도 그런 브래넌의 마음을 눈치챈듯 참았던 함성을 토하기 시작했다.
“와아아아아아!”
“배리이이이이! 죽여준다!”
“하나만 더 치자아아아!”
다시 시끌벅적해진 글라이드 파크가 마음에 들었는지 브래넌은 웃으며 홈을 밟았다.
그리고 한 개 남았다는 듯이 검지를 세우고는 페퍼 여사의 빈 자리가 있는 그곳을 가리켰다.
- 그랜마! 보고 계십니까? 이제 하나 남았습니다!
- 초구부터 노렸다는듯이 맹렬히 돌렸죠? 무릎 쪽으로 떨어지는 초구 커브를 그대로 받쳐놓고 때렸습니다.
- 실투도 아니었네요. 그냥 배리가 잘 때렸습니다.
- 오늘 3번으로 나온 이유가 여기 있었나보네요 하하!
더그아웃도 599호 홈런을 때리고 돌아온 브래넌을 향해 미쳐 날뛰기는 마찬가지였다.
“배리 이제 하나 남았어요!”
“알아 이 자식아!”
“젠장 방금 홈런 친 그 배트 좀 빌려줘요! 나도 홈런 치게!”
“하나 더 치면 빌려줄게! 그 전엔 안돼!”
웃으며 대꾸하고는 있었지만 브래넌의 머릿속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초구로 들어온 변화구는 거의 지켜본다는 통계때문에 편하게 카운트를 잡으러 들어왔던 것 같아. 그렇다는건 이제 나한테는 조금 더 조심할거라는 말이지.’
지명타자의 좋은 점이란 이런 것이다. 수비를 안해서 리듬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타격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더 생긴다.
‘그렇다는건 다음에는 패스트볼 계열일 확률이 높다.’
다른 투수라면 공을 빼는 선택지도 존재한다. 하지만 지금 마운드에 올라있는 조던 스미스는 싸움닭 기질이 강하다. 전성기를 이미 4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불같은 승부욕은 여전했다. 그건 자신과 함께 있었던 레인저스 시절과 똑같았다. 고작 홈런 하나 맞았다고해서 꺾일 승부욕이 아니다. 분명히 저 놈이라면 패스트볼로 보란듯이 승부를 걸어올 것이다.
‘제발 내 타석까지 교체되지 마라!’
브래넌의 기도를 하늘이 들어줘서일까?
조던 스미스는 쓰리런을 허용했지만, 그 뒤의 타자들을 범타로 처리하며 1회와 2회를 마무리했다.
-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조던 스미스가 드레이크를 삼진으로 돌려세웁니다.
- 이제 안정을 찾은 느낌이죠?
- 그렇습니다. 1회 말 세 타자 연속 안타를 허용했던 것 말고는 출루가 없거든요. 확실히 경기 운영을 할 줄 아는 투수에요. 트윈스도 스미스의 이런 안정감을 알았기 때문에 34세의 그에게 3년 2400만 달러라는 계약을 안겨준거겠죠.
- 계산이 서는 선발투수는 팀을 운영하는데 도움이 되니까요.
하지만 그조차도 최근 물이 오른 스프라우트는 잡아내지 못했다.
따악!
- 알렉스 스프라우트! 철벽모드로 돌아선 스미스를 다시 한 번 뚫어냅니다!
스프라우트는 바깥으로 떨어지는 체인지업을 결대로 밀어서 내야를 넘겨버렸다.
- 스프라우트의 장점이 바로 저것이거든요! 수많은 좌타 파워히터들과는 다르게 스프라우트의 타구는 부채꼴 모양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시프트와는 전혀 무관한 타자란 말이죠!
- 이제 곧 올스타 투표가 시작되는데 레이스에서도 그가 뽑히도록 밀어줄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꼭 뽑히면 좋겠네요.
- 성적도 좋으니 꼭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자! 이제 오늘 스미스에게 홈런을 안긴 주인공! 통산 599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600홈런이라는 대업에 한 걸음만을 남기고 있는 레이스의 슈퍼스타! 배리 브래넌이 타석에 들어섭니다!
브래넌이 대기타석에서 타석으로 걸어가기 시작한 순간부터 글라이드 파크는 팬들의 함성으로 가득찼다.
600!
600!
600!
타석에 들어선 브래넌은 마스크를 쓰고 앉아있는 친구에게 농담을 던졌다.
“헤이 루. 나 600홈런 때리게 좋은 거 하나 줘봐.”
“미쳤어요 배리? 그랬다가는 저기 마운드에 있는 조던이 가만있지 않을거라는거 아시잖아요. 실력도 있는 사람이 왜 그러신대.”
“오늘 이미 실력으로 하나 때려서, 하나 더 때리면 심장에 무리간다고.”
“에헤이 앓는 소리는 그만! 앞에나 봐요. 스트라이크 날아옵니다?”
스미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기점으로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끊겼다.
‘패스트볼!’
저 싸움닭은 100% 패스트볼로 초구 스트라이크를 잡으러 들어올거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꾸만 머리 한쪽 구석에서 다른 느낌이 왔다. 마치 누군가가 패스트볼이 아니라 다른 것이 들어올것이라는걸 알려주는 듯한 그런 느낌이 말이다.
‘브레이킹 볼이야!’
타자가 타석에서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은 짧다.
그렇기 때문에 브래넌은 빠르게 결정을 해야만 했다.
‘직감!’
브래넌은 자신의 안에서 들려왔던 그 목소리에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따아아아아악!
강렬한 타구음이 글라이드 파크 안에 울려퍼졌다.
< 227화 - 그녀를 위해서(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