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화 - 행복한 사람 >
패배감이 섞여있는 분위기, 그리고 연패의 수렁은 한 번 벗어나기가 힘든 것이다. 어떤 것이 계기가 되었든간에 한 발만 그곳에서 발을 뺄 수 있다면, 그 어려웠던 순간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곤 한다.
따아아악!
- 갑니다! 갑니다! 멀리! 메이슨 스탠하우스! 빅 리그에서 첫 번째 홈런을 드디어! 이곳! 글라이드 파크에서 때려냅니다!
- 아~ 오늘 경기에 쐐기를 박는 기가 막힌 쓰리런이었습니다.
알마다가 연패를 끊어줬던 바로 그날부터 레이스는 다시 정상적인 궤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연패당했을 때의 분위기가 거짓말 같네.”
“그게 연패의 문제죠. 뭔가를 하려고 해도 안될 것 같은 기분이나 분위기가 압박하잖아요.”
알마다가 8연패를 끊어준 뒤부터 레이스는 10승 3패를 달리고 있었다. 덕분에 6월에 접어든 지금은 2위인 레드삭스와 2.5경기차까지 벌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
“지금 이 상승세는 얼마나 갈거라고 보고있어?”
“그거야 확신할 수는 없죠. 하지만 최대한 오래 끌고가려고 노력해야죠. 당장에는 분위기가 좋으니까 적어도 2주는 갈거에요. 그러니 어스틴은 경기나 보면서 600홈런 행사나 준비하세요.”
5월에 접어든 지금 브래넌은 잠깐의 슬럼프를 겪은 뒤 다시 달려나가고 있었다. 그가 이번 시즌 기록한 홈런은 벌써 13개. 이제 600홈런까지는 딱 세 걸음이 남았다.
“흐흐! 이미 준비 다 해놨지!”
글라이드는 구단주실 전시장 한 켠에 아직 미개봉으로 남겨둔 박스를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일단 계세요. 저는 이제 파트장 회의하러 가야하니까요.”
“그래.”
경기장을 바라보며 행복한 표정을 짓고있는 글라이드를 뒤로한 다운은 파트장들이 기다리고 있을 회의실로 향했다.
“내가 봤을 때는 잭 나이트가 제일 나아보이는데?”
“아니야. 그 친구는 딱 봐도 내구성이 떨어져보여. 프로에 오면 아마 곧바로 팔꿈치 나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상이야. 걔보다는 조나단 스텁스가 낫지 않아? 200cm에 달하는 당당한 체구를 가졌잖아.”
“아니지. 그 놈은 무릎에 문제가 있어. 피칭하는 걸 보면 알아. 예전에는 안그랬는데 근육이 붙고 살이 올라온 최근 1년간 계속해서 왼쪽 무릎과 발목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무의식적으로 틀고있어. 그 친구 최근에 제구 안좋아졌지?”
“맞아. 그래서 그랬구만!”
회의실에는 파트장들이 이번 시즌 드래프티들을 놓고는 흥미진진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단장님 원픽은 누굽니까?
로벨의 말에 다운이 피식 웃었다.
“나는 엠마누엘 브리또.”
“브리또도 괜찮지. 키 크고 팔도 길어. 구속이 그렇게 빠르진 않지만 좌완에다가 최대 93마일까지는 나오니까 뭐.”
“그것보다 살이 붙지 않는 체형도 아닌데 말랐다는 점이 조금 더 끌리더라고. 나중에 덩치를 불리면 구속이 조금 더 빨라질 가능성이 있어. 네 픽은 누군데?”
“나?”
다운의 질문에 씨익 웃은 로벨이 손을 비볐다.
“제가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단장님의 결정에 따라야죠!”
비굴한 그의 모습에 다들 어이없는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다운은 다른 의미에서 로벨을 바라보며 웃었다.
‘예전이었으면 저런 농담따윈 안할 놈이었는데.’
사랑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더니, 미키를 만나고 나서는 성격이 굉장히 유해지고, 사교성이 꽤 늘어난 느낌이었다.
하긴 자신만해도 양키스에서 나온 뒤 방구석에 쳐박혀 살고있었는데 이렇게 멀끔하게 입고 단장 노릇을 다시 하고 있었으니,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구단주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구단주님 눈에 그런게 들어오시겠어? 지금 배리가 600홈런까지 고작 3개밖에 안남았는데 말이야!”
“하하! 하긴 그렇겠네. 구단주님은 신나셨죠?”
“당연히 신났죠. 600홈런을 때린 그 경기는 물론이고, 다음 홈 경기까지 모두 기념행사 하라고 하셨었어요.”
다운의 말에 미소를 머금은 심슨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거이거, 우리 팀이 또 죽어나겠네요.”
“적당히 해도돼요 브래드. 어차피 600홈런인거 모를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것보다는 곧 있을 올스타전 이야기부터 하자고요.”
5일 뒤인 6월 8일부터 올스타전 투표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이맘때쯤 되면 대부분의 구단들은 구단 차원에서 푸쉬할 한두명의 선수를 선정하고는 했다.
“우리 팀에서 나갈만한 선수는······.”
“일단은 배리가 나가겠죠.”
아마 브래넌은 성적이 나쁘더라도 커미셔너의 초청으로 인해서 올스타전 특별 로스터에 포함됐을 확률이 높았다. 600홈런 달성이 확실시되는 리빙 레전드의 은퇴시즌이란건 그만한 이슈가 되는 일이고, 충분히 대접해줄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브래넌은 그런 초청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투표로 갈 수 있을만큼 좋은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다. 심지어 에인절스의 지명타자 슬롯을 차지하고 있는 호시노 쇼헤이 역시 이를 의식한 듯이 이번 시즌에는 지명타자로 올스타전 투표에 나설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2할 후반의 타율에 13홈런까지. 배리를 뺄 이유가 없죠.”
“그럼 일단 배리는 뺍시다.”
어차피 구단에서 푸쉬하지 않더라도 메이저리그 팬들이라면 뽑아줄 것이다. 그럴 바에는 다른 녀석들을 푸쉬해주는게 좋았다.
“샘도 빼야겠지?”
“아메리칸리그 포수 타격랭킹 1위에 올라있는 놈을 무슨 수로 안뽑을거야? 제정신이야?”
거기다가 수비도 정상급이다. 아메리칸리그에서는 적수가 없는 포수를 뽑지 않을 팬들은 없을 것이다.
“로드리고도 넣을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난 진짜 저런거 보면 FA로이드라는게 진짜로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니까?”
로드리고는 산을 내려와서도 자신이 충분히 잘할 수 있는 선수라는 것을 몸소 증명하고 있었다. 이번 시즌을 마치면 사실상 옵트아웃을 할 수 있는 조항이 있다는 걸 아는 팀들은 벌써부터 등 뒤로 연락을 하고 있다는 말을 그의 에이전트인 브랜드에게 전해들었다.
“네이트도 빼.”
지난 시즌에 비해 홈런 수는 줄었지만, 드레이크는 리드오프로 한 층 완숙해진 느낌이다. 타율은 물론이고 출루율까지 엄청났으니까. 본래 강점인 수비 역시 단단했다. 원래라면 양키스의 앤드류 켈리라는 엄청난 산이 그를 막아섰겠지만, 아쉽게도 그는 손목에 사구를 맞아서 한 달을 결장할 예정이었다. 켈리가 빠지면서 드레이크를 막아설 수 있는 유격수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서머스는 불가능하고······. 덕도 안돼.”
서머스의 자리에는 너무 강력한 경쟁자가 있었다. 매리너스의 3루수인 테드 로렌스가 갑자기 MVP급 시즌을 보내기 시작하면서 남은 팀의 3루수들은 결코 투표로는 그를 이길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덕 흘로첵은 이번 시즌에도 첫 시즌에 보여줬던 그런 파괴적인 모습을 보여주질 못하면서 힘겨운 시즌을 보내는 중이었다. 쟁쟁한 선수들이 즐비한 1루에서는 결코 올스타전을 나갈 수 없을 것이었다.
“마르코는 갈거고······.”
마르코 루이스는 팀을 옮긴 뒤에도 자신이 왜 4억 달러 이상을 받아야하는 선수인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스프를 밀어주는건 어떻습니까?”
외야는 세 자리다. 심지어 올스타전 투표에서는 좌, 중, 우를 가리지 않고 그냥 ‘외야수’라는 항목으로 투표를 진행한다. 그러다보니 수비는 부족하지만 타격에서 쟁쟁한 모습을 보여주는 선수들로 채워지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더 중요한건 아메리칸리그의 외야 한 자리는 무조건 채워져있다는 점이었다. 바로 에인절스의 중견수 마이크 토켈슨이 말이다.
“스프가 남은 한 자리를 뚫을 수 있을까요?”
토켈슨이 한 자리를 맡고, 루이스 또한 한 자리를 차지할 확률이 높았다. 3할 중반의 타율에 19홈런을 날린 토켈슨. 그리고 3할 초반, 4할 후반의 출루율에 14홈런을 달성중인 루이스를 뽑지 않을 멍청이들은 없을테니까.
물론 추천이나 감독이 뽑아서 올스타전에 가는 방법도 있다. 그렇게 올스타전에 참가해도 투표로 뽑힌 올스타와 차이는 없다. 하지만 이건 개인의 명예와 자존심의 문제다. 스프라우트가 못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누군가가 자신을 추천해야만 올스타가 될 수 있다는건 생각보다 자존심이 많이 상하는 일이었다. 드레이크가 예전에 투표 1위를 놓치고는 올스타전에 참가하지 않았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일단은 올스타전까지만 포지션을 조금 옮겨서 타격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건 어떨까요?”
“나쁘지 않네요.”
어차피 루이스는 좌익수가 가능하다. 그리고 스프라우트가 처음 레이스에 왔을때의 포지션은 우익수. 마지막으로 현재 좌익수로 뛰고 있는 스탠하우스는 중견수 수비가 가장 익숙하고 좋은 편이다. 수비 부담이 줄어들고 타격에 집중할 수 있는 코너외야로 자리를 잠시 옮긴다면 스프라우트가 남은 올스타전 외야수 한 자리를 차지하는데 도움이 될 확률이 높았다.
“그럼 일단 경기를 마치고 한 번 이야기를 나눠보는걸로 하죠. 그리고 다음으로는······.”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려는 순간 방음이 잘 되어있는 프런트 사무실, 그 중에서도 회의실 안쪽까지 관중들의 함성소리가 스며들어왔다.
와아아아아아아!
먹먹하게 들리는 함성소리에 다운이 리모컨 옆에 있는 크로포드를 불렀다.
“카를. 중계 소리좀 켜봐.”
저 함성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 배리 브래넌이 시즌 14호! 그리고 개인 통산 598호 홈런을 때려냅니다! 그리고 그 홈런볼을 잡은 주인공은! 바로 안나아아아아! 페퍼!
브래넌이 홈런을 하나 추가했고, 그리고 페퍼 여사님이 외야에서 그 공을 잡은 것이다.
“세상에. 여사님은 왜 저기 계신대?”
페퍼 여사의 시즌권 좌석은 홈플레이트 뒤에 위치해 있었다.
“600홈런이 나오는 날까지는 외야석을 예매하실 생각이라더라고요.”
풀 시즌권을 가진 사람에게는 어지간하면 항상 앉는 자리를 선배정해주곤 했다. 하지만 무조건 그 자리에 앉아야하는 건 아니었다. 누군가와 같이 올 수도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선배정된 좌석이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그들에게는 언제나 경기 전에 자신의 좌석을 옮길 권리가 있었다.
“어지간하면 왼쪽으로 잡아드려요 오늘처럼. 배리의 타구는 거진 왼쪽으로 가니까.”
“그렇지 않아도 올 시즌 제일 홈런이 많이 나왔던 곳으로 예매해드렸죠. 거기다가 배리가 경기 전에 나서서 다치지 마시라고 직접 자기가 쓰던 글러브도 드리고 왔답니다.”
“역시 배리네요.”
역시 배리는 팬을 챙길 줄 아는 진짜 프로 선수다. 화면에는 자신이 직접 글러브로 잡아낸 공을 쥐고 환호하는 페퍼 여사님이 비춰졌다.
“페퍼 여사님은 진짜 행복하시겠네요. 좋아하는 선수에게 글러브도 받고, 그 선수의 홈런볼도 받았으니까요.”
“아니지 카를.”
크로포드의 말에 다운이 고개를 흔들었다.
“배리가 정말로 행복한 사람인거야. 고작해야 쓰던 중고 글러브를 주고, 자신이 해야할 플레이를 했을 뿐인데 그걸로 저렇게 여러 팬들, 그리고 페퍼 여사님까지 기뻐해주잖아? 과연 배리가 메이저리거가 아니었다면 그럴 일이 있었을까?”
아마 없었을거다.
그래서 배리 브래넌이라는 남자는 행복한 사람인거다.
자신의 홈런볼을 잡은 페퍼여사님을 향해 하트를 날려주며 베이스를 돌던 브래넌이 다음 날 아침 눈물을 쏟게 될 줄은 그때만해도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 225화 - 행복한 사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