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화 - 잊을 수 없는 하루 >
첫 타자를 아웃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알마다는 오늘이 첫 빅리그 선발등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호투를 펼치기 시작했다. 물론 파인트나 진성찬만큼의 압도적인 피칭은 아니었다.
하지만 공격적인 피칭에 윌슨의 안정적인 블로킹과 프레이밍, 그리고 오늘 경기만큼은 지고싶지 않았던 레이스 야수들의 뛰어난 수비 집중력까지 더해지자 엄청난 시너지를 일으켰다.
- 알마다가 6회에도 마운드를 올라옵니다!
- 그야 너무 당연한 일이죠. 5이닝을 던지면서 고작해야 43개의 공을 던졌잖습니까? 아직 한계 투구수까지는 57개나 남아있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볼넷 하나, 몸 맞는 공 하나로 출루도 두 번 밖에 시키지 않았습니다. 아직까지 노히터의 조건이 충족되기 때문에 그를 내릴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네요.
- 오늘 알마다가 제대로 던지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지는군요.
- 하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마 알마다가 이렇게 잘던질거라고는 예상을 아예 못했거든요.
- 아마 로열스 타자들도 이렇게까지 묶일줄은 생각도 못했을겁니다.
- 저희도 예상하지 못했잖습니까?
- 그도 그럴것이 불펜에 있을때의 알마다와, 지금의 알마다가 너무 다르거든요. 불펜에 있을때의 알마다는 자신의 빠른 공과 좋은 변화구를 이용해서 타자들에게서 어떻게든 삼진을 빼앗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보였죠. 그리고 워낙에 구위에 자신감이 있다보니 ‘칠테면 어디 쳐 봐!’라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다릅니다. 평소보다 평균구속도 2~3마일 정도 낮아졌고, 평소보다 훨씬 보더라인 피칭을 신경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공격적으로 카운트를 잡으러들어갑니다.
- 지금까지 던진 43개의 공 중에서 스트라이크가 34개 그리고 볼이 9개네요.
- 그만큼 공격적으로 들어간다는거죠. 심지어 오늘 포수가 누굽니까? 메이저리그에서 프레이밍 최상위권에 있는 윌슨 아닙니까? 비어만의 프레이밍도 비약적으로 발전하긴 했습니다만, 아직까지 윌슨에 비해서는 한 단계 떨어진다는 느낌이 강하죠. 그러다보니 로열스 타자들도 마냥 지켜만 볼 수는 없는거죠. 지켜만 보다가는 삼진을 당하기 일쑤거든요. 그러니 저렇게 배트가 끌려나오는겁니······.
따악!
타구음과 함께 깔끔한 우전안타가 터졌다.
- 아! 안타깝게도 안타를 허용합니다. 오늘 경기에서 첫 안타를 허용하는 알렉스 알마다.
- 이거 입을 조심하셔야겠는데요?
- ······ 아무래도 그래야할 것 같군요. 하지만 다행히 알마다의 표정이 나쁘지는 않네요.
그들의 말대로 안타가 나온 직후 알마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 이제야 깨졌네.’
자신이 기록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압박감보다는 도전정신이 불타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파인트나 진성찬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기록에 도전하건 말건 신경쓰지 않고 자신의 공을 던질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런 엄청난 정신력이나 배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새가슴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압박감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5회까지 노히터를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 살짝은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당장 이번이닝에 들어오기 직전에도 ‘힘을 조금 더 줘서 노히터를 생각해야하나?’라며 고민하고 있던 찰나였다.
그런데 초구부터 저렇게 안타를 만들어서 고민을 깨주다니! 당장에 달려가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마음의 짐을 한 꺼풀 벗어던지자 몸도 더 잘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별로 힘을 들이지도 않았는데 공이 쭉쭉 뻗어나가는 느낌이 든다.
파아아앙!
- 삼진! 오늘 경기의 첫 번째 삼진을 잡아냅니다!
- 6이닝째 던지고 있는데 첫 번째 삼진이라뇨 하하!
- 그만큼 효율적인 투구를 하고있었던거죠!
딱!
- 앤더슨이 잡아서 드레이크에게 토스. 드레이크가 곧장 1루로! 더블플레이! 오늘도 레이스 수비진은 견고합니다!
6회까지 깔끔하게 막아내고 돌아온 알마다는 수많은 손에 하나하나 하이파이브를 해주며 자리로 들어왔다.
‘아쉽기는 하네.’
마운드에 있을 당시에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또 이렇게 쉽게 아웃카운트를 잡아내고 더그아웃으로 돌아오게 되니까 아쉬움이 몰려들었다. 노히터, 퍼펙트 게임같은 대기록을 세울 수 있는 기회는 언제 또 찾아올지 알 수 없었으니까.
속으로 아쉬움을 삭히고 있던 알마다에게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진성찬이 옆자리에 슬며시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헤이 키드. 나이스 피칭.”
“감사합니다.”
주먹파이브를 한 진성찬이 특유의 웃음을 지으며 불펜이 있는 쪽을 엄지로 가리켰다.
“내가 좋은 소식 가져왔는데.”
“뭔데요?”
“불펜 애들이 오늘 쉬게해주면 밥 거하게 쏜다던데?”
“밥이요?”
알마다가 피식 웃었다.
쉬고싶기는 했던 모양이다.
“나도 똑같은 반응을 보였지. 고작 밥으로 되겠어? 그랬더니 짐이 뭐라는지 알아?”
“뭐라고 했는데요?”
“오늘 완투하면 로하이 미드나이트 스테이크 하우스의 예약권을 준대.”
순간적으로 알마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거짓말!”
“내가 왜 거짓말을 해?”
“미친! 진짜요?”
로하이 미드나이트 스테이크 하우스는 탬파 해안가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자정에 열어서 새벽 두 시까지, 딱 두 시간만 영업을 하는 가게다. 게다가 테이블도 딱 두 개 밖에 없어서 하루에 딱 두 팀만, 오로지 예약으로만 운영되는 가게이기도 했다. 그 다음 달의 예약을 받는 매 달 20일은 그야말로 전쟁 그 자체!
알마다도 로하이 미드나이트 스테이크 하우스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 지난 1년간 무던히도 노력해봤지만(물론 대부분은 마이너에 있었기 때문에 오프시즌에만 노력했다)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 곳의 예약권을 준다니!
갑자기 불타오르는 느낌이다.
“꼭 따내고 만다!”
***
0대 0으로 진행되던 경기의 추가 기울어진것은 8회 초였다.
- 비어만이 타석에 들어섭니다.
- 오늘 타격감이 상당히 좋죠?
- 그렇습니다. 오늘 두 번 타석에 나와서 안타 하나를 기록했죠. 첫 번째 타석에서 날린 타구도 좋았습니다. 그저 개빈 스미스의 빌어먹을 정도로 아름다운 수비 때문에 안타는 도둑맞아버렸지만요.
- 확실히 수비부담이 덜한 1루수로 나선 것이 도움이 된 모양이네요.
- 제 눈에도 그래보입니다. 물론 1루수가 수비를 못해도 된다는 말은 최근 야구에서는 맞지 않는 말이긴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생각해야 할 것들이 많은 포수에 비해서라면 1루수는 수비부담이 없는게 맞는 말이거든요. 그러다보니 조금 더 머리를 비우고, 편한 마음으로 타석에 들어설 수 있었을겁니다. 그게 또 좋은 타구를 만들어내는것에 도움을 준 것이고요.
직전의 두 타석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던 비어만은 세 번째 타석에서도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따아아아악!
- 비어만의 타구가! 타구가! 타구가!
퐁!
- 카우프먼 스타디움의 오른쪽 폭포 안으로 다이브합니다! 균형을 깨는 사무엘 비어만의 솔로포!
- 오늘 잘 던지고 있는 알마다에게 드디어 승리를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따아아아악!
- 윌슨의 타구가 쏜살같이 날아서! 날아서! 담장으으으을! 넘습니다! 알렉스 윌슨의 추가 백투백 홈런!
- 윌슨이 정확도는 떨어지는 편이지만, 한 방만큼은 있는 타자거든요! 그런데 방금 저 공은 너무 안일했어요! 하이 패스트볼을 쓰려면 조금 더 확실하게 높였어야죠!
- 하하! 덕분에 우리 레이스가 한 점을 더 얻어냈으니까 고맙다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두 점을 등에 업자, 알마다는 한결 더 편한 마음으로 투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따악!
- 타구는 유격수 정면으로! 그리고 탬파에서는 유격수 정면이라는 단어를 줄여서 말하곤 합니다. 바로 아웃이라고 말이죠!
- 아웃! 알마다가 8회까지 무사히 마칩니다!
- 동료들도 오늘 경기를 첫 승리로 마칠 가능성이 높은 알마다를 향해 박수를 쳐주는군요!
- 아마 9회에는 교체되겠죠?
- 그렇지 않겠습니까?
8회 말을 마친 상황에서의 알마다의 투구수는 81개. 한계투구수 까지는 19개나 남아있었다. 하지만 오늘 알마다의 역할은 경기를 완전히 끝내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역할은 100구 내로 5회를 소화하는 것이었다. 이미 자신의 역할은 150% 수행한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2점차. 세이브 상황이다.
레이스에는 이번 시즌에도 철벽과도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는 수문장, 찰리 제프리스가 있었다. 굳이 알마다가 무리하게 등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다.
캐시는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알마다를 조용히 불렀다.
“이리와봐.”
알마다는 캐시가 자신을 교체시키려는 줄 알고 곧바로 설득할 준비를 했다.
“9회에도 던져.”
“할 수 있습니다 보스! 제가 9회에도 올라갈 수 있게 해······ 네?”
“9회에도 던지라고.”
경기 전과는 다르게 캐시는 알마다의 등을 스스럼없이 두드렸다.
“찰리가 오늘은 던지고 싶지 않으니까 나가게 만들면 죽는다고 전해달라더라.”
하여간 이놈의 레이스는 정말 어떻게 되먹은 구단인지······.
알마다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안타맞으면 교쳅니까?”
“19구 안에 끝낼 수 있지?”
19구 안쪽이라면 안타를 맞더라도 교체시키지 않겠다는 허락과 다를바 없었다.
“물론이죠!”
자신감 넘치는 알마다의 말에 다시 한 번 캐시가 등을 두드렸다.
“노히터도 하기 힘든 경험이지만, 한 경기를 온전히 던져보는 것도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이다. 그러니 끝까지 좋은 공부한다고 생각하고 던져보도록 해.”
“예 보스!”
캐시의 허락하에 알마다는 9회에도 마운드에 오를 수 있었다.
- 알마다가 9회에도 마운드를 지킵니다!
마운드에 올라온 알마다는 9회 초 공격을 하는 동안 진성찬이 해줬던 조언들을 떠올렸다.
“9회에 모든 것을 쏟아붓지 마.”
“네?”
“9회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건 멍청이들이나 하는 짓이야. 만약에 전력을 퍼부었는데 공이 맞아나가기 시작하면? 그때는 어쩔건데? 뒷 놈한테 맡길거야? 아니잖아. 네 손으로 시작한 경기, 네 손으로 끝내고 싶은거 아냐?”
“마, 맞죠?”
“그러면 힘을 아껴야해. 아니지 뭐라고 표현해야하지? 유지! 그래, 그게 더 좋은 표현이겠다. 경기를 끝까지 던지려면 오늘 네 리듬을 유지할 수 있어야돼. 1회부터 8회까지 똑같은 리듬으로 던지다가 9회에 갑자기 전력투구를 하면 오히려 부상 위험도 올라가고, 네 밸런스가 깨질 수도 있단말이지. 그럴바에는 지금까지 해오던 리듬을 유지하는게 경기를 잘 끝낼 수 있는 확률이 훨씬 높아.”
진성찬은 한국에 있던 지난 3년간 완투만 22번, 그 중에서 완봉을 7번이나 기록한 완투의 사나이였다. 그런 선수가 하는 조언을 놓칠수는 없었다.
따악!
- 첫 타자가 안타로 출루합니다!
- 이거 로열스가 추격의 불씨를 살리는데요? 하지만 레이스의 불펜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 오늘 제프리스는 올라오지 않을 눈치죠?
- 그런 듯 하네요.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준비를 좀 했으면 좋겠는데요. 첫 선발등판이라서 알마다가 흔들릴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거든요. 아마 적잖게 동요했을겁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보다 알마다의 마음은 평온했다. 이미 진성찬이 그런 경우까지 상정해서 조언을 해줬기 때문이었다.
“안타 맞으면요?”
“어차피 맞을 안타였던거야. 신경쓰지 말고 그냥 네 리듬을 유지하면서 던져. 어차피 급한건 저놈들이야. 야구는 급한 쪽이 지는거야. 이너피스. 오케이? 이너피스. 킵 유어 리듬. 캬~ 멋지다! 안그렇냐?”
마지막 멘트까지 떠올릴 필요는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치며 알마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 알마다가 웃네요. 아직 여유가 있나봅니다.
그리고 잠시 후.
따악!
- 2루를 향하는 공! 앤더슨이 공을 1루로! 그리고 아웃!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아낸 비어만이 1루 미트에서 공을 꺼냈다. 그리고 알마다에게 토스했다.
“첫 번째 승리 축하한다.”
아무래도 오늘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 224화 - 잊을 수 없는 하루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