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화 - D-26 >
이미 데뷔한 적이 있는 선수라도, 데뷔 첫 선발출장과 선발등판은 또 다른 이야기다. 메이저리그 데뷔할때는 ‘이제야 내 꿈에 첫 발을 디뎠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감회가 새로워지곤 한다.
하지만 처음으로 선발출장, 혹은 선발등판을 한다?
이 때는 ‘여기서 진짜 잘해야한다!’라는 생각이 앞선 모든 감회들을 날려버린다. 그래야지 계속해서 선발로 마운드에 오를 수 있고, 하나의 포지션에서 선발출장을 하게 될 기회를 더 얻게될테니까. 아무리 훈련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줘도, 실전에서 주어진 기회를 살리지 못하는 선수는 곧 경쟁에서 밀리기 마련이다. 그러다보니 그냥 데뷔전을 치를 때보다 배는 더 긴장하게 되는 것이다.
알마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기 시작 전 알마다는 자신의 라커 앞에 앉아서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후우······.”
항상 자신에게 장난을 치던 팀원들도, 이런저런 조언을 건네던 선배들도, 경기 전에는 포커를 쳐야한다며 난리치던 브래넌도 자신을 건들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자신이 주인공이기 때문일 것이었다. 조용히 있는 그에게 윌슨이 다가왔다.
“알마다. 마지막으로 오늘 경기플랜 이야기 좀 해볼까?”
“좋아요.”
평소라면 비어만이 선발이었을거다. 하지만 오늘 경기만큼은 경력도 길고 루키 투수가 편하게 투구하도록 이끌어줄 수 있는 윌슨이 선발 마스크를 쓸 예정이었다.
“로열스 타선 중에서 우리가 신경써야 할 건 딱 네 명이야. 그 중에서······.”
윌슨과의 이야기가 끝나자 캐시감독이 다가왔다. 평소라면 어깨를 두드렸을 그였지만 오늘은 머리카락조차도 건들지 않았다. 하지만 친근한 표정과 말투는 평소와도 같았다.
“오늘 컨디션 어때 알마다?”
“좋습니다.”
“그냥 부담갖지 말고 던지라고 해도 씨알도 안먹히는거 안다. 부담스럽지?”
“네.”
“걱정말고 그냥 던져. 네 공을 던지고 와. 오늘 네가 점수를 먹으면 다 수비 때문이니까.”
캐시의 말에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나왔다.
“와······. 감독님 제가 데뷔할때는 부담 팍팍 줬잖아요!”
“리키 너는 부담을 지고 던져야 더 잘하는 놈이잖아. 그래서 그랬던거겠지. 그러니까 다음 등판에는 더 부담감을 가지고 던져봐.”
“······그거 욕이지 미치?”
“이런, 들켰나?”
“들었냐 메이슨? 오늘 외야에서 공 놓치면 너 때문이다?”
“네? 그러면 저 오늘 중견수로 나갑니까?”
“중견수 넘보기에는 백 년은 일러 이 자식아!”
“내야에서 공 빠져나가면 누구 때문이냐?”
“그거야 당연히 내야에서 제일 중요한 유격수 때문이지.”
“빌어먹을! 이럴때만 내가 제일 중요한거냐?”
“당연하지. 이럴때 써먹어야지.”
지난밤의 경기만해도 팀의 분위기는 이렇지 않았다.
“제발 안타 하나 쳐야하는데.”
“요즘 공이 안보여. 어떻게하면 잘 보이지?”
“행운의 안타 하나만 나와줬으면 좋겠다.”
어제만해도 부정적인 말들만 가득했던 라커룸이 다시 장난으로 가득찼다. 이런 분위기가 연패 중 선발 데뷔전을 가지게 된 자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일거라는건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캐시가 손가락 세 개를 폈다.
“네 오늘 목표는 최소 3이닝을 먹는거다. 할 수 있지 알마다?”
알마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5이닝 이상 던지면 안됩니까?”
알마다의 패기넘치는 말에 캐시가 씨익 웃었다.
“얼마든지 가능하지. 하지만 투 아웃 상황이 아닌 이상 네 투구 수는 100개 제한이야. 오케이? 그리고 투 아웃 상황에서 출루가 이루어지면 그대로 교체할거다. 알겠지?”
“넵!”
“그럼 한 번 날뛰어봐라.”
***
- 안녕하십니까 로열스 원정 시리즈 2차전을 함께해주시는 레이스 팬 여러분들. 오늘 경기도 피터.
- 그리고 짐과 함께하겠습니다.
- 오늘은 불펜데이가 예정되어 있죠?
- 원래는 그랬죠. 하지만 어제 경기에서 많은 불펜을 소모한 것 때문에 캐시 감독이 경기 전 인터뷰에서 ‘오늘 선발은 알렉스 알마다다.’라고 공언했죠.
- 불펜이 아니라 선발이라고 말했죠.
- 맞습니다. 오프너라는 말 대신 스타터라는 말을 썼거든요. 그런걸로 봤을 때 알마다는 오늘 경기를 5회 이상 끌고나가야할 의무가 있는 선발로 낙점받은겁니다. 문제는 알마다가 지금까지 빅리그에서 선발로 뛰어본 적이 없다는겁니다. 심지어 올 시즌 선발로 뛰기 위해서 몸을 만든 것도 아니에요. 그가 올 시즌 가장 많이 던졌던 이닝이 1.1이닝이었죠. 고작 네 타자를 처리하는 게 이번 시즌 가장 오래 던진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19개의 공을 던진게 올 시즌 최다 투구수였죠. 그런데 갑작스럽게 선발로 나와서 5이닝에 100개에 가까운 공을 던지라는 명을 받았다? 과연 알마다가 경기를 그렇게까지 끌고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힘들지 않나 싶습니다.
- 제 의견도 비슷합니다. 오히려 마이너리그에서 뛰고 있는 선발을 올리는게 더 좋았을거라고 보거든요. 선발이 아예 없는것도 아니고, 좌완 대니얼 윌슨이 트리플 A에서 3점대의 방어율로 꽤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단 말이죠.
- 캐시 감독이 워낙에 투수를 잘 쓰는 감독이니까 뭔가 기대할만한 구석이 있을거라고 믿고는 있습니다. 부디 그의 판단이 맞았으면 좋겠네요. 1회초 레이스의 선공 공격 라인업 같이 보시죠.
1번 타자 - 메이슨 스탠하우스 - RF
2번 타자 - 네이선 드레이크 - SS
3번 타자 - 마르코 루이스 - LF
4번 타자 - 알렉스 스프라우트 - CF
5번 타자 - 배리 브래넌 - DH
6번 타자 - 알버트 서머스 - 3B
7번 타자 - 사무엘 비어만 - 1B
8번 타자 - 알렉스 윌슨 - C
9번 타자 - 브라이언 앤더슨 - 2B
- 드디어 이 날이 왔군요. 비어만이 1루수를 봅니다!
- 이번 스프링 트레이닝부터 비어만이 1루 연습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꾸준히 있어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부분에 있어서 굉장히 찬성을하는 바입니다. 포수는 체력소모가 굉장히 큰 포지션이니만큼 풀시즌을 뛸 체력을 관리해주기 위해서는 1루수나 지명타자로의 출장이 필요하거든요. 그것도 알렉스 윌슨같은 좋은 벤치포수가 있다면 더더욱말이죠. 하지만 레이스의 지명타자 자리는 바꿀 수 없는 존재가 차지하고 있죠.
- 배리는 뺄 수가 없죠.
- 그렇습니다. 배리 브래넌은 건강상의 이유로 무조건 지명타자로 뛰어야만하죠. 그렇기 때문에 비어만의 체력을 보전시키면서, 그의 뛰어난 공격력을 활용하려면 결국에 그는 1루수로 출장할 수 밖에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를 1루수로 등장시키는 타이밍도 꽤 좋다고 생각합니다. 윌슨은 빅리그에서 10년동안 활약한 베테랑 포수. 알마다를 잘 케어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선수죠. 물론 비어만이 그런 능력이 없는건 아니지만, 그보다는 나을겁니다. 그리고 비어만의 최근 타격 성적이 어떻습니까?
- 다섯 경기에서 3안타에 그치고 있죠.
- 그렇습니다. 10경기로 확대해봐도 고작 8안타에요. 분명히 타격에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있을거란 말이죠. 그런 상황에서 수비 부담감이 조금이라도 줄어드는 1루수로 출장하면서 타격에 대한 실마리를 풀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시도라고 봅니다.
- 스탠하우스를 1번에 놓은 것도 꽤 파격적인 선택 아닌가요?
- 지금까지 스탠하우스는 주로 하위타순에 배치됐었죠. 하지만 최근 그의 성적이 너무 뛰어나다보니 1번에 배치하는게 가장 많은 기회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최근에 점수를 잘 뽑아내지 못하는 레이스의 타선을 생각했을 때, 스탠하우스가 출루를 한다면 무조건 불러들여야합니다.
하지만 1회 초, 스탠하우스는 출루에 실패했다. 그리고 드레이크와 루이스 역시 각각 3루수 앞 땅볼과, 내야 팝플라이로 물러났다.
“가자 알마다.”
윌슨의 말에 알마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운드로 향했다. 그리고 자신이 왼발을 딛는 곳의 흙을 다졌다.
‘그리 다질 필요도 없겠네.’
이번 시즌 알마다는 항상 누군가가 사용해서 어지럽혀질대로 어지럽혀진 마운드를 이어받아왔다. 하지만 오늘은 단 1이닝만 사용한 마운드가 그를 반기고 있었다.
팡! 팡!
“자 던져봐 알마다!”
윌슨이 기분좋은 미트음을 내며 연습구를 받았다.
파아아앙!
“크 좋다!”
파아아앙!
“오! 이것도 좋은데?”
뭔가 오늘은 미트가 있는 곳으로 공이 잘 들어가 박히는 느낌이다. 이대로라면 모두 삼진을 잡아낼 수 있을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알마다는 어젯밤 파인트가 한 이야기를 떠올리고는 글러브로 뺨을 툭툭 쳤다.
‘아냐. 내 역할은 삼진이 아니야. 내 역할은 지금까지 고생한 우리 불펜투수들이 쉴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은 이닝을 먹는거다!’
불펜으로 올 시즌 내내 뛰어왔기에 2연투는 기본이고, 경기가 힘들었던 최근 3연투, 4연투까지 해야했던 불펜진들이 얼마나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지 익히 알고 있었다.
‘오늘 경기는 최대한 맞춰잡는다는 마인드로.’
다시 마음을 다잡은 알마다가 연습구를 이어던졌다.
“피쳐 라스트 쓰리!”
마지막으로 세 개의 공을 더 던지고 난 뒤 타자가 들어오기 전 윌슨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운드를 향해 뛰어왔다.
“오늘 공 좋아. 그러니 경기 전 세운 플랜대로 딱 가면 될 것 같아. 1회는 싱커와 포심. 그리고 슬라이더 두 개 정도 시험해보는걸로 하자. 나머지는 일단 1회 마치고 다시 이야기해보자. 괜찮지?”
“네.”
“따로 원하는거는?”
“경기 전에 이야기했던대로 최대한 제가 경기를 오래 끌고갈 수 있게, 그리고 맞춰잡는 쪽으로 리드해주세요. 힘이 너무 들어가거나 빠져있으면 사인주시고요.”
“오케이.”
윌슨이 홈플레이트 뒤로 돌아가 마스크를 썼다. 그리고 곧이어 로열스의 1번 타자가 타석에 들어섰다.
윌슨의 첫 번째 사인은 몸 쪽으로 말려들어가는 싱커.
타석에 약간 붙어있는 상대 타자를 물러나게 만들려는 의도가 있어보이는 사인이었다.
‘제구! 그러면서도 너무 약하지 않게!’
슈우우웅!
알마다가 던진 공이 안쪽 낮은 코스로 정확히 꺾여들어갔다.
파아아앙!
평소보다 살짝 낮은 위치. 심판에 따라 스트라이크가 되기도 하고, 아닐수도 있는 위치이기도 했다. 게다가 살짝은 빠진 것 같은 위치였지만, 윌슨이 잡는 순간에 살짝 끌어당겼다.
그 덕일까?
“스트라이크!”
심판의 콜은 스트라이크.
시작이 좋다.
지금 저 위치에 스트라이크를 받아냈으니 이제 로열스 타선은 조금 더 존을 넓게 보면서 공략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레이스 투수들 중에서 처음으로 공을 미트 안에 욱여넣었다는, 선발만이 느낄 수 있는 그 기분이 입꼬리를 당기고 있었다.
하지만 웃음짓기엔 이르다. 이제 막 경기를 시작하는 첫 스트라이크를 넣은 것 뿐이었으니까. 알마다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최대한 끌어내렸다.
‘비슷한 위치에 싱커 한 번 더. 하지만 조금 더 존에서 벗어나게.’
스트라이크가 되어도 좋고, 타격을 해도 정타에서 벗어나도록. 혹은 볼이 되어도 좋다.
사인에 담긴 의미를 해석한 알마다가 다시 한 번 비슷한 곳으로 공을 던졌다.
슈우우웅!
딱 봐도 아까와 비슷한 위치의 공. 이미 한 번 그 위치에서 스트라이크를 받아냈기에 로열스 타자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1. 그 쪽 존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타격을 한다.
2. 한 번 더 지켜본다.
그리고 그의 선택은 첫 번째였다.
‘오늘 첫 선발등판인 놈의 기를 죽여놔야지!’
그의 배트가 로열스 팬들의 기대감을 가르며 세차게 휘둘러졌다. 하지만 생각보다 공은 더 높게, 그리고 몸쪽으로 더 말려들어왔다.
따악!
먹힌 타구가 3루수 정면으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타격음이 들리자마자 앞으로 대쉬를 시작한 서머스가 맨손으로 공을 잡았다. 그리고 달려오던 모션 그대로 러닝스로우를 시전했다.
맨손으로 잡아 빠른 타이밍에, 그것도 서머스의 강력한 어깨를 바탕으로 한 강하고 정확한 송구가 비어스가 낀 1루 미트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파아아앙!
결과는 너무나 확연했다.
“아웃!”
공 두 개로 첫 타자 아웃.
수평을 그리고 있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26개 남았다.'
< 223화 - D-2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