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머리 MLB 단장-222화 (222/268)

< 222화 - 할 수 있을거다 애송아 >

메이저리그 최약체 팀인 로열스에게 패배한 레이스 선수단의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그저 한 경기일 뿐이야. 그리고 원정이었잖아. 남은 경기들에서 승리를 따내면 그만이다! 다들 오늘은 잊고 내일 경기 준비하자!”

캐시가 어떻게든 팀을 북돋으려는 말을 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것도 한두번이지, 오늘만큼은 통하질 않았다. 다들 머리로는 ‘그래 그저 162경기 중에서 한 경기일 뿐이야!’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가슴은 메이저리그에서 최약체 팀에게 졌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해서

“내일은 무조건 이겨야 해!”

라고 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일 경기의 선발은 메이저리그에서 처음으로 선발출장을 경험하게 되는 알렉스 알마다였기 때문이다.

올 시즌 불펜으로 나서서 15.2이닝 동안 5실점을 하면서 메이저리그에 잘 정착하고 있는 알마다였지만 선발등판은 처음이다. 홈도 아닌 원정에서 데뷔 첫 선발등판을 시키는 것도 미안한데, 연패를 끊으라고 어깨에 짐을 지우는 것만큼은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호텔로 돌아온 캐시는 다운과 마주했다.

“베이커나 에르난데스를 올리는게 낫지 않을까?”

캐시의 말에 다운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에 한 경기를 보자면 두 사람을 올리는게 낫죠. 하지만 지금 같이 가용할 수 있는 선발들이 사라지는 상황이 후반기에도 없으리란 법은 없죠. 그때마다 불펜데이를 돌릴 수도 없잖아요. 결국에는 미래에 선발로테이션에 합류할 알마다가 뭔가를 보여줘야해요. 로열스 타선은 그걸 경험하기에 아주 좋은 첫 상대고요. 케빈도 다 동의해놓고 왜 그래요?”

단장이 선수단을 구성하는 권한이 있다고는 하지만, 어떤 선수를 내보낼지를 결정하는 권한은 오롯이 감독에게 있었다. 아무리 다운이 알마다를 선발로 쓰자했다고해도 캐시가 거절하면 그만이라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캐시가 이렇게 말하는건 불안하기 때문이었다.

“알지. 아는데 불안해서 그래. 지난 등판 이후 고작 이틀 쉬었어. 그리고 선발등판인데 너무 부담주는 것 같잖아.”

“지난 등판에서 고작 공 다섯 개 던졌어요. 그리고 본인도 할 수 있다고 했다면서요.”

“빅리그에서 선발기회야! 여기서 못하겠다고 말할 투수가 있을 것 같아? 하겠다고 해놓고 엄청 벌벌떨고 있겠지!”

몸을 떠는 시늉을 하는 캐시를 보고 다운이 피식 웃었다.

“그럴 것 같아서 조언해줄 사람을 하나 보내놨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 뒤는 내일의 알마다에게 맡기자고요.”

***

“선발등판이라니! 선발!”

알마다는 방에서 베게에 얼굴을 묻고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다.

“하! 선발!”

빅리그에서 선발로 등판하는 것. 그것도 자신이 나고 자라고 응원했던 레이스의 선발투수로 마운드에 서는 것은 그의 오랜 꿈 중 하나였다. 오랜 꿈이 이뤄져서 기뻐하기만해도 시간이 모자란데, 알마다의 표정은 기쁨과 걱정이 동시에 섞여있었다.

팀의 상황 때문이었다.

“하······. 선발이라니. 그것도 연패 중에······.”

오늘 패배까지 합해서 총 8연패다.

어떻게든 패배를 끊어내야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선발등판 일정이 잡힌 것은 자연스레 부담감을 동반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천장을 바라보며 복잡한 심사를 정리하고 있는 와중 누군가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

“누구세요.”

“조나.”

팀의 에이스이자 선망하는 선수! 조나 파인트의 목소리에 알마다는 침대에서 튀어나와 문을 열었다.

“잠시 이야기 좀 할까?”

파인트가 손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물론이죠!”

파인트는 알마다를 데리고 호텔에 있는 바로 향했다.

“잭콕 한 잔. 이 친구는 논알콜로 아무거나 한 잔.”

앞에 있는 바텐더가 우아하면서도 절도있는 손놀림으로 주문한 칵테일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알마다의 눈은 그를 향해있지 않았다.

‘분명 무슨 조언을 해주기 위해서 부른걸꺼야!’

이 상황에서 잘 써먹힐 팁이라던가, 상대의 약점에 대해서 설명해주기 위해서 온게 아니라면 파인트가 자신을 따로 불러낼 이유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서 말해주세요!’

하지만 알마다의 생각과는 다르게 파인트는 눈앞에 있는 바텐더가 칵테일을 줄때까지 그 모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테드.”

그 바텐더의 이름이었다. 테드라는 바텐더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웃으며 답했다.

“네.”

“바텐더 생활을 하신지 얼마나 되셨죠?”

“12년 됐습니다.”

“꽤 오래 하셨네요.”

“그렇죠.”

“테드도 견습시절이 있었죠?”

“당연하죠.”

“견습때는 메인 바텐더 옆에서 칵테일 제조를 돕기만 했을거고요?”

“그게 모든 견습이 하는 일이니까요.”

“그리고 나서 처음으로 홀로 바에 서게 되었을 때 어땠나요?”

파인트의 질문에 그때가 떠올랐는지 테드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엉망이었죠. 주문도 잘못쳐내고, 재료를 잘못 넣기도 하고, 잔도 두 개나 깨먹었죠. 한 손님한테는 ‘난 분명히 블루 하와이를 시켰는데 레드 하와이가 왔어!’라는 말까지도 들었죠.”

“많이 혼났나요?”

“제 평생 혼났던 것 중에서 가장 크게 혼났습니다. 선임한테 저는 재능이 없다고, 이따위로 할거면 바텐더 그만두라는 말까지 들었죠. 솔직히 다음날 별로 출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하셨죠?”

“했죠. 그러니까 어제 저를 혼냈던 그 선임이 눈을 부라리면서 말하더군요. ‘오늘도 어제만큼 실수하면 죽여버린다!’라면서요.”

“다정한 선임이네요.”

“친절한 사람이었죠.”

알마다는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엄청나게 혼을 냈던 그 선임이 대체 왜 다정하면서 친절한 사람인지. 그리고 자신에게 조언을 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파인트는 왜 바텐더와 이런 대화를 하고 있는지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꽤나 흥미진진했기에 귀에 담아두고 있었다.

“이야기 고마워요 테드.”

두 사람의 칵테일이 앞에 놓이자 파인트는 팁을 테이블에 올려뒀다.

“알마다.”

드디어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알마다가 힘을 잔뜩 준 채 답했다.

“넵!”

과연 이 위대한 투수는 나에게 어떤 팁을 줄 것인가?

내가 할 수 있는 팁을 주겠지?

하지만 이번에도 그의 예상은 틀렸다.

“난 아직도 내 메이저리그 첫 선발 등판을 기억해.”

“모든 경기를 기억한다고하지 않으셨나요?”

“그러려고 노력하지. 해봤자 고작 1년에 30경기 안팎이잖아. 하지만 그 중에서도 데뷔전과 데뷔 첫 선발등판은 생생하게 기억해. 그 당시 마운드의 단단함이라던가, 던졌던 공에 대한 느낌 같은것들도 말이야.”

앞에 있던 잭콕을 한 모금 머금은 파인트가 말을 이었다.

“대부분의 투수들은 빅리그에서 불펜으로 조금 뛴 다음에 선발 등판을 경험하지. 나도 그런 선수 중 하나였어. 그리고 내 첫 선발등판은 어땠는지 알아?”

“아뇨.”

“엉망이었어. 5이닝만 던지고 내려오자고 마음먹고 던졌어. 삼진은 8개 잡았지만 볼넷도 5개가 있었고, 심지어 몸 맞는 공도 하나가 있었지. 그래서 3점을 내줬고. 그렇게 5회동안 82개의 공을 던지고 마운드를 내려왔지.”

“잘 한거 아니에요?”

5이닝 3실점이면 퀄리티스타트는 아니지만 데뷔 첫 선발등판으로는 잘한 축에 속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어진 파인트의 말에 알마다는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아니지. 그 다음에 6회에도 등판해서 3점을 더 내줬거든.”

“푸핫! 그게 뭐에요! 5회까지만 던지고 내려오는거 아니었어요?”

“뭐 감독은 그렇게 말했지. 하지만 상황이라는게 있잖아? 그 당시 로열스는 팬들이 기대하면서 볼 수 있는 슈퍼루키가 필요한 상황이었고, 그 루키가 첫 선발등판에서 5이닝동안 3실점을 82구로 끊어내고 내려왔지. 네가 감독이라면 무슨 생각을 하겠어?”

“음······. 투구수도 충분하니까 퀄리티스타트 정도는 챙겨주자?”

“우리 감독도 그렇게 생각했지.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난 5회만을 상정하고 힘을 쏟아부었어. 82구밖에 던지지 않았지만 이미 내 팔은 공을 아까처럼 던질 수 없을 정도로 지쳐있었지. 그러니 뭐 볼넷, 안타, 홈런으로 무너졌지. 그렇게 슈퍼루키의 선발 데뷔전은 악몽 그 자체가 됐지.”

즐거운 듯 말하고 있지만, 그 당시 파인트의 마음은 썩어 문드러졌을 것이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그랬을 것 같으니까.

“최악이었겠네요.”

“아니? 최고의 데뷔전이었어.”

“네?”

파인트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으며 말했다.

“만약 그 경기에서 내가 잘했잖아? 그러면 내가 최고의 선수라고 생각했을거야. 그 날 나는 당시 최고의 타선이라는 말을 듣던 양키스의 타선에게서 삼진을 8개나 뽑아냈거든. 쓰레기같은 제구에도 타자들이 치질 못한다며 자만했겠지. 그대로 끝났다면 제구를 고칠 생각도 안했을거고, 50구가 넘어가면 슬라이더가 들쭉날쭉해진다는 것도 몰랐겠지. 어느정도로 힘을 배분해야 6회 이상을 던질 수 있다는 것도 몰랐을거야. 내가 최선을 다한다면 당시 리그에서 잘나가던 그 타자조차도 내 공을 건드릴 수 없다는 것도 알았고, 이름도 모르던 포수가 쌩쌩한 상태의 내가 던진 몰린 공과, 지친 상태의 내 공을 담장 밖으로 넘겨버릴 수 있다는 것도 알게되었지. 처음으로 선발 등판을 한 그 경기. 2시간 57분짜리 경기에서 내가 맡았던 1시간 52분의 매 분 매 초가 내가 성장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줬어. 내가 망쳐버린 그 한 경기가 아니었다면 나는 절대로 지금과 같은 투수가 될 수 없었을거야.”

누구도 넘볼수 없는 대 투수의 경험담에 알마다가 숨을 죽였다.

“알마다.”

“네.”

“잘하려고 하되, 잘하려고 하지마.”

아리송한 말이다.

“선발 투수의 최고 덕목은 삼진을 잡는게 아니야. 관중들에게 엄청난 임팩트의 피칭을 하는 것도 아니야. 최고의 선발투수는 항상 우리 뒤를 지켜주는 불펜투수들이 한 이닝이라도 쉴 수 있게 이닝을 먹어줄줄 알아야 해. 넌 이것만 잘하면 돼. 나머지는 수비한테 맡겨.”

“그럼 잘 던질 필요가 없는건가요?”

“눈 감고도 칵테일을 만드는 테드도, 지금은 항상 사이영 컨텐더가 된 나도, 데뷔전은 망쳤어. 누구도 너에게 잘할걸 기대하고 있지 않아. 그저 딱 하나. 이닝만 먹어주면 돼. 넌 그거 하나만 잘하면 되는거야.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공 하나하나에 네 생각을 담아 던져. 네 인생에 다시는 오지 않을 첫 선발 등판 경기의 매 분, 매 초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도록 말이야. 실패에서 배우고, 도망가지 않는 사람은 결국 성공하게 되어있어. 테드나 나처럼.”

남은 잭콕을 들이킨 파인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큰 손으로 알마다의 머리를 덮었다.

“너도 할 수 있을거다 애송아.”

< 222화 - 할 수 있을거다 애송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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