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화 - 자신없어요? >
“못 들으신 것 같으니, 다시 한 번 말씀드리죠. 저희는 17년 4억 3200만 달러를 제안하겠습니다.”
토켈슨의 계약총액을 뛰어넘는 북미 프로스포츠 역대 최고액의 계약. 하지만 보라스가 놀란 것은 그 부분이 아니었다.
“그거말고. 다음. 그러니까 세부사항 말이야!”
“우선 계약금은 500만 달러입니다. 그리고 다음시즌, 그러니 2025년부터 2년간 4350만 달러의 연봉을 드리겠습니다.”
여기부터가 다운에게는 들을 것이라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금액이었다. 이미 여기서부터 보라스의 정신은 나가있었다.
‘레이스가? 4350만 달러나? 왜 그런 투자를? 그것도 다운이?’
현 시점 최고의 연봉을 받는 선수는 보라스의 또 다른 고객 중 하나인 뉴욕 메츠의 에이스 미하일 뮐러였다. 그가 받는 연봉은 3년간 매 년 4333만 달러. 그보다 고작 17만 달러가 많을 뿐이지만, 만약 이 계약이 성사된다면 마르코 루이스는 역대 최고의 연봉을 받는 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솔직히 다운으로서도 이 계약은 상당히 무리를 한 계약이었다. 회의 결과 최대한으로 가용 가능한 연봉이 4000만 달러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무리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운은 이게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앤디의 성격상 항상 500만 달러 정도의 여유는 남겨놓지. 그리고 리키를 트레이드하고 그 자리에 알마다를 비롯한 유망한 투수들을 올리면 돼. 거기다가 마이어의 계약 역시 끝나가니까 어느정도 커버가 가능할 것 같아.’
어차피 올 시즌 연봉은 1850만 달러. 이미 그를 영입함으로 인해서 탬파 주변에 있는 수많은 히스패닉계(루이스는 도미니카 출신이다) 팬들을 구장으로 불러들이고, 또 관련된 굿즈를 판매하면서 수익을 끌어올리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후 이어지는 2년간 4350만 달러의 연봉은 충분히 마련할 수 있었다.
다운이 이렇게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이런 계약을 생각한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적어도 3년은 무조건 잡는다!’
올 시즌, 다음시즌은 어차피 잡을 수 있는 선수다. 하지만 그 다음시즌은 FA권리를 얻게된다. 하지만 다운은 여기까지를 레이스가 월드시리즈 우승을 위해 전력을 다하는 시즌으로 보고 있었다.
‘적어도 이 기간 동안에 월드시리즈 우승 한 번, 준우승 한 번은 해야 돼. 베스트는 월드시리즈 우승 두 번이다.’
솔직히 말해서 레이스라는 구단이 구장 하나 옮겼다고 빅마켓으로 도약하기에는 수많은 장애물들이 산적해있었다. 다운이 생각하는 신 구장 오픈빨은 길어봐야 2년. 그 이유는 간단했다.
‘약팀을 응원하고 싶은 팬은 어디도 없으니까.’
이 지역에는 양키스의 스프링 트레이닝 구장이 있고, 그래서인지 양키스의 팬들이 레이스의 팬들보다 많다는 우스갯소리도 들렸다. 지금이야 레이스가 강하니까, 그리고 새로운 구장이 좋으니까 팬들이 몰리고는 있다. 하지만 레이스는 약팀, 양키스는 강팀이라는 이미지가 남아있는 이상은 얼마든지 떠날 수 있는 팬들이라는 걸 잊어서는 안됐다.
그들을 조금이라도 오래 잡아두기 위해서는 구장을 옮긴 레이스는 강팀이라는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심어줘야한다. 그것도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말이다. 적어도 구단 역사상 최초의 월드시리즈 우승, 그리고 추가적으로 월드시리즈 진출 한 번 정도는 더 해줘야지 약팀의 이미지를 벗어난 신흥강호의 칭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래야지 또 다음 스텝을 위해서 유망주들을 끌어모을 유예기간을 벌 수 있어.’
루이스는 아직 몇 경기 뛰지는 않았지만, 3년간의 전력질주기간에 충분히 도움이 될 수 있는 선수라는 것을 경기장에서, 훈련장에서 그리고 선수들과 코칭스태프 사이에서 증명하고 있었다. 그래서 초반의 2년간 4350만 달러라는 역대 최고 연봉을 제안한 것이다.
그리고 다운은 거기다 하나를 더했다.
“2026 시즌이 끝나면 옵트아웃을 넣어드리겠습니다.”
여기서 보라스는 두 번째로 넘어갈 뻔 했다.
옵트아웃은 선수가 스스로 FA를 선언할 권리다. 구단이 아무리 계약 이행을 원한다고 하더라도 저 권리가 있다면 선수는 시장에 나와서 새로운, 더 좋은 계약을 할 권리가 생기게 되는 것이었다. 초기에는 이 계약이 구단에게 지나치게 불리한 옵션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왜냐하면 선수가 직전 시즌에 좋은 활약을 하면 권리를 행사하고, 폭망하면 원래 계약을 이어나가며 먹튀를 할 수 있는 조항이었으니까. 단장인 다운 역시 옵트아웃은 쓰레기같은, 보라스 같은 에이전트가 돈을 더 뽑아먹기 위한 조항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왜?
에이전트는 계약 총액에 따른 퍼센트를 계약 당시에 받아 챙길 수 있고, 옵트아웃을 선언한 다음에는 또 새로운 계약 총액에 따라 수수료를 챙길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번 경우는 좀 다르다.
우선 실패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
대부분의 경우 옵트아웃이 정말 엿같은 이유는 바로 에이징 커브에 있었다. 옵트아웃 조항을 넣을 정도로 메이저리그 탑 급의 선수들이 FA 권리를 얻는 대부분의 나이는 20대 후반. 옵트아웃 조항이 발동되는 시기는 보통 30대 초반이다. 그 쯤이면 잘 하던 선수들도 슬슬 배트가 느려지고, 선구안이 무뎌지며, 구속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러다보니 어쩌다 반짝하면 옵트아웃해서 더 좋은 계약으로 다른 구단에 가버리고, 에이징 커브에 직격당해서 성적이 수직하락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원래의 계약으로 구단에 남는다.
하지만 루이스의 가장 큰 강점은 어리다는 점이다. 올 시즌 기준 23세. 옵트아웃을 선언한 다음인 27년에도 26세에 불과하다. 부상이라도 당하면 모를까, 이 기간 동안에 레이스에서 에이징 커브에 직격당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고 확신할 수 있다.
게다가 역대 최고액의 연봉을 2년간 받은 뒤 FA시장에 나가도 26세라는 어린 나이라는 것은 보라스에게도 매력적인 조건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정도라면 스캇도 거절할 명분이 없을거야.’
이 정도로 좋은 제안을 했으면 당연히 그에 따른 디메리트도 있는 법이다.
“옵트아웃을 선언하지 않을 시 2027년부터 2030년까지 4년간은 3500만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만약에 계약을 한다 하더라도 다운은 99.9% 보라스와 루이스가 옵트아웃으로 나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0.1%의 확률로 루이스가 레이스에 남는다고 할 수도 있었다. 이 경우 나가게 될 3500만 달러도 적은 금액은 아니다. 하지만 이 기간동안에도 3500만 달러를 투자하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탬파와 플로리다 지역에는 히스패닉 계열의 젊은 층이 상당히 많은 편이었다. 도미니카 출신의 루이스는 이 팬 층을 한데 모아줄 수 있는 스타 중 하나였다. 드레이크와 함께 히스패닉 팬들을 구장으로 불러들일 수 있는 그런 티켓 파워를 지닌 스타 말이다.
그리고 3년간 달린 이후의 레이스는 이후 4~5년 정도는 어린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며 유망주를 끌어모으고 팜을 재건할 예정이었다. 리빌딩과 컨텐딩을 동시에 하는, 일명 리툴링을 거치면서 다운은 레이스를 다저스나 양키스와 같은 지속가능한 강팀. 누가 나가더라도 괜찮은 유망주가 남아있는 비옥한 팜을 만들 생각이었다. 그 기간 동안의 분전을 위해서 비어만, 드레이크와 함께 루이스가 중심을 잡아준다면 3500만 달러는 결코 아까운 금액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 기간을 리툴링으로 잡으면 남은 선수들의 연봉이 신인급으로 줄어드는 것도 한 몫 하겠지.’
뭐 어찌됐건 여기까지는 보라스와 루이스에게 유리한 조건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 다음부터는 완벽히 레이스가 유리한 조항들이 이어졌다.
“2031년부터 2035년까지 5년간 연봉 2500만 달러, 그리고 이후 3년간은 1500만 달러. 계약의 마지막 3년은 1000만 달러로 연봉이 차례로 줄어들겁니다.”
놀람으로 물들었던 보라스의 얼굴은 어느새 차분해져 있었다.
“너무 줄어드는거 아냐?”
“그래도 총액은 4억 3200만 달러죠. 원하시던 북미 프로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계약 총액. 그걸 스캇 보라스가 따내는겁니다. 거기다가 뮐러의 시즌 연봉 총액 역시 넘어섰고요.”
“그래. 뭐 여기까지는 그렇다 쳐.”
보라스도 다운이 얼마나 많은 양보를 했는지는 알고 있었다. 초반에 저 정도의 돈을 챙겨준만큼 후반부에 적게 받더라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리고 왜 이런 금액을 세팅했는지도 이해하고 있었다.
‘루이스가 늙어서 제 역할을 못할때는 적은 연봉을 주고, 그동안에 새롭게 잘 큰 선수들에게 많은 연봉을 주면서 페이롤을 관리하겠다는거겠지.’
여기까지는 이해한다. 총액에 시즌 최고연봉까지 맞춰줬으니까 할 수 있는 이해다. 하지만 저 조항만큼은 눈엣가시였다.
“아까 옵트아웃 달라고 했던건 무슨 말이야. 그건 왜 빼고 말해?”
보라스가 이해할 수 없는 건 바로 다운이 구단에게도 옵트아웃을 할 권리를 달라고 했던 것이었다.
“2030년 종료 이후. 여기서 저희에게 옵트아웃을 주시죠.”
“구단에게 옵트아웃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뭐 팀옵션이라고 이름붙여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이후에 11년의 계약이 더 남았는데 팀옵션이라고 붙이는건 이상하잖아요? 그리고 이게 루이스나 스캇한테도 큰 손해는 아닐거라 생각하는데요?”
2030년. 이 시즌이 끝나면 계약서 상의 루이스의 연봉은 3500만 달러에서 2500만 달러로 급감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나이는 이 다음 시즌은 2031년에도 고작 30세. 대부분의 선수들이 FA 선언을 처음하게되는 바로 그 나잇대다.
“만약에 마르코가 우리 기대에 못미치면 저희도 남은 계약은 그만할 권리는 있어야죠. 그리고 저희는 2500만 달러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만, 그때쯤 되면 선수들 연봉도 더 오를거고, 그 정도 이상의 가치를 한다고 생각하는 구단들이 있을만도 하잖아요?”
솔직히 궤변이다.
그때쯤이면 연봉이 오르더라도 2500만 달러는 최상급의 선수들이나 받을 수 있는 연봉일 것이다. 그리고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글라이드가 다운을 구단주들만 참석가능한 곳에 끌고다니는걸로 봤을 때, 이 바닥에서 레이스의 차기 구단주는 다운으로 굳혀진 상황.
선수보는 눈이 좋은 다운이 루이스와의 계약을 종료한다? 그건 빨아먹을게 더 없다는 것을 확인사살해주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다운이 가진 ‘선수 보는 눈이 좋은’이라는 이미지가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 때 팽당한 루이스가 2500만 달러보다 더 좋은 연봉을 받으면서 남은 11년의 계약을 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다운이 그런 보라스의 생각을 과연 놓쳤을까?
“헤이 스캇. 잘 생각해봐요. 11년의 계약이잖아요. 11년.”
그러면서 계약기간에 선을 그었다.
“앞선 6년간 저희가 지급하는 금액은 총 2억 3200만 달러. 그리고 뒤의 11년간 지급해야할 금액은 총 2억 달러.”
그러면서 다운은 도발적인 웃음을 띄웠다.
“스캇이라면. 그리고 만약 금액이 줄어드는 계약이 아니라, 전통적인 방식으로 금액이 유지되거나 증가하는 계약을 만들어낸다면, 이걸 뛰어넘는 계약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아요?”
마치 ‘왜? 자신없어요?’라고 묻는 듯한 다운의 얼굴에도 보라스의 속은 차분했다.
‘1500만 달러를 받는 3년, 그리고 1000만 달러를 받는 3년을 2500만 달러. 아니, 하다못해 2000만 달러로만 만들 수 있다면?’
보라스의 머리가 어지럽게 돌아갔다.
‘선수보는 눈이 좋다.’는 다운의 이미지
vs
선수를 잘 포장해서 파는 자신의 능력
성공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능력보다 자신의 능력을 더 높게 치는 법이다.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성공했으니까.
촥!
보라스의 손이 거칠게 다운의 손에 들려있던 계약서를 빼앗아갔다.
“마르코와 함께 검토해보도록하지.”
그의 말에 다운이 씨익 웃었다.
“기다리도록하죠.”
< 209화 - 자신없어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