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화 - 백넘버 플리즈(2) >
백넘버
시작은 별 것 없었다.
같은 유니폼을 입고 뛰는 선수들을 조금 더 쉽게 구분하기 위해서 기입한 것이 그 시초였으니까.
초창기에는 타순에 따라 부여되었는데,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이 3, 4번이었던 것도 그들이 3번과 4번을 주로 쳤기 때문이었다. 이후에는 포지션에 따라 번호가 주어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제한은 풀렸고, 영구결번이라던가, 선수 본인이 애착하는 번호를 계속해서 달고 나가는 등의 변화가 생겼다.
그래서 지금은 등번호 그 자체가 해당 선수를 대표하기도 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다.
지금 시대에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나 토켈슨의 27번과 켈리의 23번일 것이다. 지금도 수많은 야수 루키들이 그들을 따라서 27번과 23번을 다는 추세였다. 외야수 1위와 유격수 1위 선수가 달고있는 번호이다보니 자연스럽게 인기가 많을 수 밖에 없었다.
레이스에서도 23번은 드레이크가 달고 있었다. 본인 말로는 켈리보다 더 유명한 23번 유격수가 될거라고 선택했다는데, 누가봐도 켈리가 다는 23번이 멋있어보이니까 선택한 것 같았다.
또 떠오르는 번호라고 한다면 호시노 쇼헤이의 17번이 있겠다. 투타겸업으로 메이저리그에 엄청난 족적을 남기고 있는 그는 점차 메이저리그의 아이콘이 되어가는 중이다. 최근 마이너리그에서 늘어나고있는 수많은 투타겸업 선수들이 가장 원하는 번호가 3번(베이브 루스의 번호)과 17번이라고 하니, 몇 년 뒤 쯤에는 메이저리그에서 수많은 17번 선수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다운은 트레이드가 완료된 뒤 마르코 루이스와 통화를 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팬들에게 인사를 하고 떠날 수 있게 됐네요.]
“이 정도쯤은 이해해줘야죠. 또 필요한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세요. 우리 레이스는 선수들이 원하는 바를 최대한 들어주기 위해서 노력하는 팀이니까.”
다운의 말에 루이스는 당당하게 한 가지를 요구했다.
[그럼 22번 배번을 받을 수 있을까요?]
“음······. 지금 당장 빈 번호가 아니긴 한데······.”
레이스에서 22번은 패트릭 비어스가 달고있는 번호였다.
“일단은 한 번 말해볼게요. 혹시 모르니까 지금 팀에서 비는 배번을 스캇한테 보내놓을테니까, 확인하고 몇 개 골라놔주세요.”
[알겠습니다. 하지만 꼭 22번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개인적으로 제 징크스가 걸려있는 번호라서 말이죠. 양도하는 선수에게도 보답할테니까 부디 생각해봐달라고 전해주세요.]
무슨 징크스인지 궁금했지만, 다운은 꾹 참았다. 어차피 보라스에게 물어보면 다 나올테니까.
아니나다를까 보라스에게 물어보니 답은 곧바로 나왔다.
[루이스가 어릴때는 32번을 달고 뛰었어.]
“엘스턴 하워드의 번호네요.”
엘스턴 하워드는 양키스 최초의 유색인종 선수로, MVP도 받았던 적이 있는 선수였다. 평소 양키스를 좋아한다고 알려진데다가 흑인인 마르코 루이스가 좋아할 이유는 충분한 번호였다.
[근데 문제는 양키스에 간다고 하더라도 그 번호는 쓸 수가 없잖아?]
“영구결번이니까요.”
[그래서 루이스는 매 번 양키스에서 영구결번되지 않은 번호 중에서 남는 번호로 바꿔달면서 뛰었어.]
“매 경기요?”
[뭐 어릴때니까 가능한 이야기지. 그래도 내셔널스와 계약한 이후에는 한 달에 한 번 남는 번호로만 바꿨어.]
“······ 그것도 정상은 아닌데요?”
[뭐 남한테 피해주는건 없잖아? 유명한 메이저리거라면 모르겠지만, 고작해봐야 유망주가 번호바꿔댄다고 상품에 문제가 생기겠어 뭐가 일어나겠어?]
“그야 그렇죠.”
[여튼 계속해서 번호를 옮겨달던중에 22번을 달고나서 계속해서 좋은 일이 생겼어.]
그가 알려준 ‘좋은 일은’ 총 4가지였다.
1. 루키리그에서 처음으로 5타수 5안타 사이클링 히트를 했다.
2. 싱글 A로 콜업됐다.
3. 아버지가 백수를 벗어나 일을 구했다.
4. 어머니를 괴롭히던 만성적인 근육 관절통이 사라졌다.
뭐 그 뒤로도 잠시 다른 번호를 달았더니 성적이 떨어졌다가, 22번을 다시 다니까 성적이 좋아져서 콜업이 되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더 있긴 했다는 비슷한 좋은 일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더 들을 필요는 없었다.
“근데 너무 당연한 이야기들이잖아요. 성적이야 언제든 오르락내리락 할 수 있는거죠. 루이스를 따라 온 가족이 이주를 했으니 당연히 백수셨던 아버지는 언젠가 일을 구하게 됐겠죠. 그리고 루이스 가족 어릴때 그렇게 부유하진 않았잖아요? 영양상태가 좋아지니 당연히 어머니도 면역력이 오르고, 근육에도 힘이 붙었겠죠. 통증은 그에 따라 사라졌을거고.”
[나도 똑같은 생각이야. 하지만 저런 일들이 일어난 타이밍이란게 계속해서 맞아떨어지면, 선수라는 족속들은 그걸 징크스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어. 마르코도 그 선수 중 하나고. 사실 마르코가 조금 심한 감은 없잖아 있지.]
“또 다른 징크스도 있어요?”
[나머진 사소한 것들이야. 스타디움 잔디를 밟을때는 꼭 왼발이 먼저 들어가야한다던가, 수비할 때를 제외하고 파울라인을 밟으면 그날 공격이 망한다던가, 내셔널스 파크 홈 더그아웃 두 번째 계단은 밟지 않는다던가, 공이 날아오기 전에 글러브를 두 번 때리고, 두 번을 접어줘야한다던가······.]
끝도 없이 나올 기세다.
“잠깐만요. 몇 개나 되는거에요?”
[내가 알고 있는건 59개 정도?]
“알고 있는거요?”
[구장별 징크스도 있다는데, 거기부터는 나도 질려서 더 안물어봤거든.]
징하다 진짜.
“그렇게하면 안피곤하답니까?”
[그래야 본인이 마음이 편하다는데 어쩌겠어? 자네도 알겠지만 야구선수에게 멘탈리티가 얼마나 중요한데. 여튼 꼭 22번 달수있게 해줘. 아마 마르코라면 시계나 차 정도는 하나 해줄거야.]
“이야기는 해볼게요.”
[부탁하네. 마르코가 잘하길 바라는건 너도 나도 똑같잖아.]
문제는 다운이 비어스가 22번을 고집하고 있다는 이유를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친구 번호였지 아마······.”
비어스와 함께 메이저리그를 꿈꾸던 친구가 부상을 당해서 야구를 그만뒀다. 그 친구가 부상을 당한 뒤 야구를 그만두게 되자, 그를 대신해서 그가 평소 달던 22번을 계속해서 달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확실한건 배리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다음날 아침 다운은 브래넌의 방에 찾아갔다.
쾅쾅!
“배리. 일어나 밥먹으러가자!”
문을 부술듯한 다운의 노크에 브래넌이 반쯤 잠긴 눈을 비비며 나타났다.
“아······. 왜 벌써 깨우고 있어······.”
“어차피 지금쯤 일어날거였잖아.”
“10분은 더 잘 수 있었다고.”
“그럼 차 안에서 자. 내가 맛있는데 알아놨어.”
브래넌은 음식을 좋아한다. 그것도 짧은 비시즌마다 가족들과 해외를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경험하는 것을 좋아했다.
꽤 미식가로 알려진 다운이 맛있는데를 알아놨다는 말이면 그를 꼬시기에는 충분했다.
“I’ll be right back.”
이라는 말과 함께 사라진 그가 1분만에 바지와 후드를 걸치고 나왔다.
“가자!”
하여간 브래넌은 단순해서 좋다.
“우리가 맞이할 음식의 이름은?”
“부산에 왔으면 돼지국밥을 먹어봐야지.”
“대쥐극밥?”
“돼지고기를 넣은 국밥이야.”
“흠······. 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오면 먹어야한다고?”
“시그니처 음식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럼 도전해봐야지.”
“근데 돼지 누린내 같은 것 때문에 은근히 호불호가 갈리나봐.”
“괜찮아. 내가 동남아에 가서도 향신료 팍팍 넣어 먹었던 사람이야!”
두 사람은 돼지국밥 집에 들어가서 각자 한 뚝배기씩 주문했다.
“수육은 뭐야?”
“그냥 돼지고기 삶은거야.”
“저것도 시킬까?”
“일단 한그릇씩 먹고 생각하자.”
그 사이에 이모님께서 물과 물티슈를 주고 갔다.
“캄사합니다!”
이제는 어느덧 익숙해진 한국어 감사인사를 한 브래넌이 영어로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네가 별 일 없이 날 아침부터 부르지는 않았을거아냐.”
고작 10분이라고는 하지만, 브래넌이 아는 다운은 선수의 휴식을 방해하면서까지 이렇게 어딘가를 가자고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분명히 자신이 필요한 무슨 일이 있을 것이다.
다운도 굳이 숨길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편하게 말을 꺼냈다.
“루이스가 22번을 원해.”
“아! 그래서였구만.”
브래넌은 곧바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알아차렸다.
“그런거라면 날 잘 찾아왔네.”
브래넌이 입꼬리를 올렸다.
“한국에 오는 비행기에서 패트릭이랑 이야기를 했었어. 근데 친한 친구랑 싸웠다는거야.”
“왜?”
“그 친구가 ‘난 죽은것도 아닌데 왜 내 등번호 달고 뛰냐? 난 이제 네가 원래 달던 등번호로 뛰는걸 보고싶다!’라고 했나봐.”
“오~ 그래?”
어쩌면 생각보다 쉽게 일이 해결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다운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서 패트릭은 뭐라고 했대?”
“이제는 22번도 내 번호라고 너보단 내가 더 유명한 22번이 나라면서 티격대다가 싸웠다는데, 걔가 하는 걸 보니 바꾸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더라고.”
“원래 달던 번호가 몇 번이었는데?”
“거기서 재미있어지는거지.”
그러면서 브래넌은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27번?”
“정답~”
다운의 표정이 다시금 일그러졌다.
“그럼 결국 못주는거잖아.”
27번은 브래넌의 시그니쳐와도 같은 번호다. 은퇴도 안한 브래넌의 번호를 넘길수는 없었다.
“만약 방법이 없었다면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겠지.”
“어떤 방법이 있는데?”
“내가 신인때 달던 번호가 있어.”
“47번이지.”
“그 번호를 달고 난 뒤에 1년간 좋은 활약을 해서 27번을 달 수 있게 됐지.”
브래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
“그러니까 네 말은 지금 우리 팀에서 비어있는 47번을 패트릭에게 주고, 다음 시즌부터 27번을 달게 하자는 말이지?”
“맞아. 거기에 ‘배리도 47번을 달았던 한 시즌동안 좋은 성적을 냈었어!’라는 말을 덧붙이면 더 좋아하겠지. 거기다가 내 번호는 영구결번 예정이잖아. 아냐?”
“거의 그렇지. 네가 우리 유니폼 입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면 더더욱 확실하고.”
“그 부분은 걱정마. 내가 600홈런 달성에 실패하고 명예의 전당에 못가는 경우는 있을지 몰라도, 핀 스트라이프를 입고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는 일은 절대 없을테니까.”
“그렇다면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바로 그 해에 영구결번이 되겠지?”
“그렇다면 레이스에서 27번을 달 수있는 마지막 선수는 패트릭이 되겠네. 그런걸로 잘 꼬셔봐.”
말을 마친 브래넌은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다울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뭘 그렇게 빤히 보고 있어?”
다운은 그에게 대답하는 대신 이모에게 크게 소리쳤다.
“이모 여기 수육 대자 하나요!”
그리고는 브래넌에게 다시 고개를 돌렸다.
“더 먹고 싶은거 있어? 이거 마치고 또 디저트 맛집같은데 갈까? 내가 다 알아놨는데.”
“네가 다 사는거지?”
“아유~ 당연하지! 말만해 말만!”
물론 그렇다고 너무 시키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 202화 - 백넘버 플리즈(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