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머리 MLB 단장-186화 (186/268)

< 186화 - 팬을 위한 선물 >

찌르르르! 찌르르르!

정오가 다 되어가는 시점. 브래넌 가의 초인종이 울렸다.

“내가 나갈게! 아마 레이스 프런트에서 왔을거야.”

“어제 그렇게 노발대발하더니 완전 잘 차려입었네?”

어제 다운과 다시 전화연결이 된 것은 저녁 10시에 가까워졌을때였다.

“왜 전화를 이제야 받아!”

[아 미안. 배터리가 없는줄은 몰랐지. 그리고 이 시기에 나 바쁜거 알잖아.]

“그래서 그렇게 끊었냐!”

상황만 보면 다운이 잘못한건 맞았다. 하지만 브래넌은 경험상 다운이 아무런 이유 없이 ‘너 배달 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시간까지 다운의 연락을 기다린 것이었고.

[미안해. 진짜 바빴어. 원래는 장난 친 다음에 곧바로 전화주려고 했는데 갑자기 코카콜라측에서 와서 미팅이 잡혀가지고. 끝나자마자 연락한거야.]

재차 사과를 한 다운은 브래넌에게 상세한 내막을 알려주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36년간 레이스 시즌권을 보유하셨던 페퍼 여사님이 올해에도 홈 전 경기 들어올 수 있는 시즌권을 받으시게 되었다?”

[그래. 그런데 여사님이 네 열렬한 팬이라잖아. 솔직히 시즌권은 배달이고 자시고 할거 없어. 우리가 여사님 아이디로 티켓만 넣어드리면 끝이니까. 그런데 이번에 한국에서 개막전 하잖아. 그 경기는 물론 원정으로 진행될 예정이지만, 그런 경험 자체가 쉽사리 할 수 있는 경험은 아니니까 여사님을 초대하고 싶거든. 네가 한국행 티켓을 들고 배달가면 여사님께는 정말 특별한 경험이 될거야.]

어제의 통화가 기억난 브래넌이 입을 샐쭉거렸다.

“다운 그 놈이 제대로 설명만 했어도 그렇게 화내지는 않았을거야. 내가 너무 좋다는 팬이 있다는 말만 했어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잘 갔다와.”

릴리의 배웅을 받은 브래넌이 다음 시즌 준비를 위해 홀쭉해진(?) 몸을 이끌고는 현관으로 나갔다.

“아! 배리 나왔어요?”

현관문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온건 크로포드의 얼굴보다는 그가 들고 있는 카메라의 렌즈였다.

“뭐, 뭐야?”

“아 이거 찍어서 구단 유튜브에 올릴 예정이거든요.”

“그런건 못 들었는······. 잠깐. 지금 찍은거 그대로 나가는거야?”

“만약 여사님이 영상 올리는 것에 동의하신다면, 편집해서 올라가겠죠?”

아무래도 나올 때 예상치 못하게 카메라를 본 턱에 표정이 이상했던 것 같다.

“다시 찍으면 안되냐? 내가 다시 나올게.”

크로포드는 무슨 소리냐는 듯한 눈으로 브래넌을 바라봤다.

“배리 연기 못하잖아요. 다시 찍으면 절대 이 느낌 안나올걸요? 그리고 시간 없어요. 갑시다.”

가만보면 크로포드도 사람은 참 좋은데 이상한 부분에서 단호할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그래 가자. 가!”

차에 올라탄 뒤에는 두 사람 다 진지하게 곧 있을 이벤트에 대해 의논했다.

“여사님은 집에 계실거래?”

“네. 여사님에게는 오늘 오후에 구단 직원이 다음 시즌 시즌권과 함께 나가는 굿즈들을 가지고 갈 예정이라고 했어요. 기다리신다고 했으니 아마 직접 나오실거에요.”

“촬영은? 허락받았어?”

“일단 찍고 허락을 받으면 되지 않을까 생각중인데요.”

“아냐. 여사님은 일반인이잖아. 카메라에 익숙한 나조차도 순간 흠칫 놀랐는데, 여사님은 더 놀라실수도 있어. 그 카메라 줌 되지?”

“엄청 잘되죠.”

“그러면 멀리서 찍고 있다가. 내가 여사님한테 말할테니 허락받으면 그때 다가오는걸로 하자.”

“좋아요. 어차피 소리는 배리 목에 달린 그 마이크로 수음하면 되니까요.”

이런저런 사항을 조욜하니 어느덧 페퍼 여사의 집 근처에 도착했다.

“자 그럼 미리 말한대로 갈게요.”

브래넌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모자를 눌러썼다.

“이 집이에요.”

“오케이. 숨어서 잘 찍고 있어.”

“넵.”

브래넌은 레이스 로고가 박힌 상자를 안아들고 페퍼 여사님의 집으로 향했다.

찌르르르!

초인종을 한 번 눌렀을 뿐인데 곧 안에서 인기척이 났다.

“금방 나가요!”

목소리에서 즐거움이 묻어나오고 있다. 그 목소리를 듣자 괜시리 브래넌의 기분도 좋아지기 시작했다.

달칵!

문이 열리고 페퍼 여사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손에는 물이 들려있었다.

“아이고~ 어서와! 먼데 오느라 고생했지? 목도 마를텐데 한 잔 해요.”

브래넌은 다른 곳에 가서 뭔가 함부로 먹거나 마시지 않는 편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정체를 들키지 않게 마스크를 쓰고 있는 상황.

“하하 괜찮습니다! 이게 제 일인걸요.”

그렇게 거절하려는데 페퍼 여사님의 표정이 변했다. 그리고 한 손으로는 입을 가렸다.

“설마······.”

페퍼 여사님은 옆에 있는 신발장에 물을 올려둔 뒤 돋보기를 꺼내 꼈다. 그리고 브래넌의 이곳저곳을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확신한 표정으로 물었다.

“배리 브래넌?”

난감하지만 이미 들킨 상황이다. 더 이상은 굳이 숨길 이유가 없어보였다.

“이걸 바로 들켜버렸네요. 저를 가장 좋아하신다더니 진짠가보네요. 하하하!”

브래넌이 마스크와 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페퍼 여사님이 마치 소녀와 같은 표정을 지으며 입을 막았다.

“어머어머어머어머! 진짜 브래넌이라니! 옷이라도 좀 다른걸 입었어야하는데! 어머어머! 사인을 받아야하는데 펜이······.”

격렬한 팬의 반응은 언제나 프로에게는 고맙고도 즐거운 일이다.

“하하! 어디 안가니까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여사님 그 저희 레이스 유튜브 채널이 있는거 아시나요?”

“그럼! 구독 좋아요 알람설정까지 다 해놨는걸! 호호호!”

“네?”

기계와는 별로 친하지 않을 것 같은 나이신데 40살은 젊게 사시는 것 같았다.

“그럼 설명하기 편하겠네요. 저희 채널 운영하는 친구가.”

“카를?”

이름도 깐 모양이다.

“네. 카를 그 친구가 저기서 찍고 있거든요. 여사님이 만약 업로드를 허락해주시면 저희가 영상을 좀 찍어도 될까요?”

“얼마든지!”

시원스런 허락 덕분에 크로포드는 브래넌과 만나 행복해하는 페퍼 여사님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왜 이렇게 반쪽이 됐어! 내가 브라우니라도 만들어줄까?”

“하하! 괜찮습니다. 다른 곳에서 뭔가 먹는건 조심해야하거든요. 특히 제 심장에 문제가 생긴 뒤부터는 더더욱 먹는건 조심하고 있고요.”

“어머! 홀쭉해져가지고 먹이고 싶은 마음에 실수를 했네! 운동선수한테 먹을걸 주는건 위험하지. 그럼 그럼. 아직 안 깐 탄산수라도 드릴까?”

“부탁드리겠습니다.”

“호호! 잠깐만 기다려봐요! 우리 직원들은 뭐 마실거라도 드릴까?”

“하하! 저희도 같은걸로 주세요.”

잠시 후 간단한 다과와 함께 마실것들이 나왔다. 여사님이 원하는대로 이런저런 대화를 즐겁게 나누는 중 크로포드가 웃으며 시계를 가리켰다.

“여사님 죄송한데 이제 저희가 들어가봐야 할 시간이라서요.”

“어머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바쁜 사람들을 내가 너무 오래 잡고 있었네.”

“하하! 괜찮습니다. 다만 퇴근 전에 들어가서 해야할 일들이 남아있어서요. 배리도 집에 가서 가족들하고 저녁 먹어야하고요. 여사님도 가족들이랑 저녁 드셔야죠.”

순간 페퍼 여사님의 얼굴에서 쓸쓸함이 스쳐지나갔다.

“내 정신 좀 봐. 내가 혼자 밥먹는다고 가족들이랑 저녁먹는 시간이 다가오는걸 깜박했네.”

물론 그 표정은 아주 잠깐이었고, 곧 미소에 덮여나갔지만 브래넌은 그 찰나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일단 여사님 저희 선물부터 받으시죠.”

브래넌이 장난 섞인 미소를 지으며 준비해둔 상품권을 내밀었다.

“여사님 혹시 여권은 있으신가요?”

“그럼~”

“저희 개막전이 이번에 한국에서 열리거든요.”

거기까지만 말했는데 페퍼 여사님의 표정이 확 펴졌다.

“혹시 비행 티켓?”

“거기다 숙박권까지 있습니다. 넉넉하게 4박 6일짜리 일정이고요. 숙박과 항공은 저희 레이스 측에서 제공해드릴겁니다. 물론 식사는 알아서 하셔야 하지만요.”

페퍼 여사님은 예기치 못한 초대와 선물에 눈에 띄게 기뻐했다.

“여권은 있으시다고 했으니 비자 신청은 지금부터 해주셔야하고요. 저희 측 직원이 티켓 발급을 도와드릴겁니다. 여사님이 수락하셨으니 방도 여사님 이름으로 잡아둘거고요. 궁금하거나 필요하신 것 있으면 여기 명함에 있는 이 번호로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크로포드는 윙크와 함께 명함을 건네주었다.

“내가 이런걸 받아도 될까······? 난 그저 시즌권을 가지고 경기를 열심히 보러갔을 뿐인데······.”

생각보다 받는 선물이 크다는 것이 떠오른 모양이다. 브래넌은 그런 그녀를 향해 미소지었다.

“이건 36년간 우리 레이스를 응원해주신 분을 위한겁니다.”

그러다가 뭔가가 생각났는지 브래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생각해보니 감사인사를 안했네요.”

브래넌은 정중히 고개를 숙인 뒤 페퍼 여사님과 포옹을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여사님과 같은 분들이 36년간 저희를 응원해주셨기 때문에, 항상 힘을 내서 경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돈도 많이 벌어서 새로운 집도 얻었고요. 여사님이 자격이 없으면 저희 레이스 팬 중에서 이런 대접을 받을 자격은 그 누구도 없을 겁니다. 자부심을 가지세요.”

페퍼 여사님은 생각지도 못한 말에 감동했는지 눈시울이 살짝 붉어졌다.

“내 평생 프로 선수에게 이런 말을 눈 앞에서 들을 줄은 몰랐어.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앞으로도 쭈욱 오래 사셔서 50년 연속 시즌권 보유 기록은 세우셔야죠.”

“호호! 그래볼까?”

여사님이 다시 살짝 기분이 좋아지신걸 확인한 브래넌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러셔야죠. 적어도 제가 명예의 전당 가는건 보셔야죠. 아닙니까?”

명예의 전당에 입후보하기 위해서는 메이저리그에서 10년 이상을 뛰고, 은퇴한지 5년이 지나야한다. 베테랑 위원회를 통해 헌액되는 방법이 아니면 75%의 득표율을 넘겨야지만 헌액이 될 수 있다.

브래넌은 3000안타도 때리지 못했고, MVP를 수상한 전적도 없었다. 그의 장점은 꾸준한 홈런 뿐. 600홈런을 넘기지 못한 지금은 명예의 전당이 간당간당하지만, 600홈런만 넘기게 된다면 이견의 여지없이 첫 턴에 75%의 득표율을 넘길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 말은 곧 적어도 7년은 더 사셔야 한다는 것.

“아, 그리고 저도 선물을 드려야죠.”

브래넌의 말에 페퍼 여사님과 크로포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물이 또 있어?”

“따로 준비한 선물이 있었어요?”

“물론이지. 우리 레이스를 응원해주고 날 좋아해주는 페퍼 여사님과 같은 팬에게 선물할 수 있는건 구단만의 특권이 아니라고.”

씨익 웃어준 브래넌이 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릴리. 오늘 저녁식사에 한 분을 초대하고 싶은데 혹시 가능할까? 응. 오늘 만나러 간다고 했던 우리 레이스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날 응원해주시는 멋진 여사님이 계시거든. 내가 요즘 식단을 한다고 먹을걸 거절한게 너무 마음에 걸려서 꼭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역시 자기가 최고야. 조금 이따가 봐! 사랑해!”

전화를 마친 브래넌이 여사님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숙녀를 에스코드하듯 찬찬히 손을 내밀었다.

“Mrs. 페퍼. 저와 저희 가족에게 부디 식사를 대접할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브래넌의 말에 페퍼 여사님이 다시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 186화 - 팬을 위한 선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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