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화 - 배달이나 좀 해라 >
다른 사람들이 탬파에 막 도착해서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을 무렵, 다운은 구진환과 그의 가족들과 만남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많이 설득이 되어서 다행이다.’
보라스는 구진환의 가족들에게 나서서 좋은 말을 해주겠다고 했던 자신의 말을 지켰다. 게다가 다운이 직접 나와서 앞으로 구진환에게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으며, 어떤 식으로 성장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자 레이스에게 한층 긍정적인 방향으로 마음이 기운것처럼 보였다.
“앞으로 구진환 선수가 어떤 커리어를 이어나갈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 레이스를 선택하신다면 결코 후회는 없을겁니다. 저도 최선을 다해 도울 것이고, 저기 있는 저 진성찬 선수도 구진환 선수의 적응을 도울겁니다. 물론 시즌 중에는 불가능하겠지만요.”
“시즌 중에 은제든지 우리 집 와가지고 밥 먹고 가라. 같은 한국 사람끼리 타지에 나와서 생활하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제!”
“그럼 그럼! 성찬이 말 들으셨죠? 루키 리그 팀도 여기서 멀지 않거든요. 해봤자 두 시간 거립니다. 올 시즌에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오갈 수 있는 거리죠.”
물론 싱글 A 팀은 켄터키와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더블 A 팀은 앨러바마에, 트리플 A 팀은 노스 캐롤라이나에 있다. 하지만 그것까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았다. 뭐 그때쯤이면 구진환도 미국생활에 적응을 마치지 않을까?
“우리 진환이 여기 오면 잘 좀 부탁드립니다.”
“어유 당연하죠. 제가 이렇게 나설 정도로 기대를 가지고 영입하려고 하는건데 당연히 잘해드려야죠! 스캇이 다시 한 번 이야기하겠지만, 돌아가시면 드래프트 불참 선언한 다음에 저희 제안을 기다리시기만 하면 됩니다.”
구진환의 가족들과의 면담을 끝낸 다운은 진성찬과 함께 단장실로 돌아왔다.
“후~ 고맙다 성찬아.”
진성찬이 미국에 도착한지는 이제 겨우 일주일이 지났다. 새로운 환경, 시간대에 적응하느라 바쁠텐데 진성찬은 다운이 도움을 요청하자마자 한달음에 달려나와서 구진환의 가족들을 구워삶는데 한 팔을 보탰다.
“에이~ 이런거 가지고 고맙다 카는거 아입니다.”
다운은 손을 내밀어 흔드는 진성찬을 향해 가늘게 눈을 떴다.
“그런 것 치고는 상당히 내 눈치를 보던데······.”
구진환의 부모님과 만나는 내내 진성찬은 그들 몰래 다운과 눈을 맞추며 ‘나 잘했죠? 잘했지?’라는 티를 냈다. 마치 무언가를 요구하려는 사람처럼 말이다.
다운이 그 부분을 지적하자 급소라도 찔린 것 마냥 진성찬의 몸이 움찔거렸다.
“아따 행님 눈치도 빠르셔라.”
“그런 것 치고는 네가 너무 티를 냈어.”
얼음물로 목을 축인 다운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뭔데. 내가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야?”
진성찬은 대답 대신 우물쭈물 거리며 손가락을 꾸물거렸다.
“그게······.”
“대체 뭐길래 답지 않게 미적거리는거야? 말 안하면 나 간다?”
다운이 자리에서 반쯤 일어서자 진성찬이 달려들어 다운을 잡았다.
“아 거 성격 참 급하디. 잠만 기다려보소.”
“배리 은퇴투어 스케줄 맞추고, 새 시즌 시즌 패스 논의하고, 부산에서 머물 숙소 최종 컨펌까지. 너 아니어도 바빠 죽겠거든? 그러니까 부탁할거 있으면 시원하게 빨리 부탁해. 내가 들어줄 수 있는거면 들어줄테니까.”
다운의 말에 진성찬은 결국 주저하던 부탁을 꺼내들었다.
“그 왜 개막전 선발 있잖습니까······. 혹시 내정되어 있십니까?”
왜 말을 꺼내기를 주저했는지 바로 알겠다.
“미국에서 로비가 합법이긴 한데, 그렇다고해서 개막전 선발을 가지고 로비를 받을 생각은 없는데?”
다운의 농담섞인 발언에 진성찬은 화들짝 놀라서 손을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혹시나 내가 들어갈 틈이라도 있나 싶어서 물어본거지! 로비라니! 사람을 뭘로 보고!”
버럭한 진성찬은 이내 태세를 바꾸어서 또 슬그머니 중얼거렸다.
“그래도 사직 팬들한테 둘러쌓여갖꼬 몇 년이나 개막전 치르던 사람이 바로 나 진성찬 아니겠습니까? 예? 외국인 용병들도 거기서 처음 가가지고 딱 던지면 팬들 성화에 놀래갖고 제대로 던지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네가 개막전에는 제격이다?”
“아 물론 그 조나 파인트 그 양반하고, 리키 더지랑 둘 다 좋은 투수인건 너무 당연하지. 근데 나도 그렇게 떨어지는 투수는 아닌데다가, 홈 어드밴티지라는게 있잖습니까.”
“사직에서는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다?”
“적어도 누구한테도 쉽게 지지 않을 자신은 있다고 자부하죠. 제 사직 개막전 성적 보시면 3년간 무팹니다 무패. 그리고 사직에서 제가 던진 경기 중에서 지난 3년간 퀄리티스타트 못한게 딱 한 번 밖에 없어요. 이런 놈 뒀다 뭐할겁니까? 네? 그러니까 무조건 날 써달라는것도 아니고, 개막전 선발이 내정된 것만 아니면 저한테도 기회를 한 번 주십쇼. 진짜 잘할 자신 있습니다. 네?”
간절한 듯 말하는 진성찬의 눈을 한동안 무심하게 쳐다보던 다운이 피식 웃으며 눈을 돌렸다.
“참내. 성찬아. 한국에서는 어땠는지 난 잘 몰라. 근데 우리 구단은 네가 정말 잘할 것 같고, 개막전 선발로 알맞다는 생각이 든다면 주저없이 널. 아니 그 누구라도 쓸 준비가 되어있어. 굳이 네가 이렇게 나서서 이야기 할 필요는 없었다는거지.”
다운의 말에 진성찬이 멋쩍은 듯이 뒷통수를 긁었다.
“그래도 행님한테 직접 듣고 싶었습니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아예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하긴 상대가 조나 파인트인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게 이상한 것일지도 모른다. 다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개막 선발 따내고 싶으면 스프링 트레이닝이나 잘 준비해와.”
“넵!”
“그렇다고 너무 오버페이스는 하지 말고.”
“스캇이 맨날 전화와가지고 똑같은 말 합니다. ‘Keep your pace!’ 이제 영어로도 그 문장 만큼은 익숙할 정도라니까요.”
“푸핫! 그거 스캇 성대모사한거야?”
“닮았죠? 와이프도 완전 똑같다고 인정했거든요. Keep your pace!”
“큭큭! 그만 웃기고 그거 마시고 알아서 집에 가.”
다운은 보라스 성대모사를 하는 진성찬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단장실을 나왔다.
“피트! 앤디! 브래드! 2번 회의실로 오세요!”
세 사람은 일사불란하게 일어나서 다운의 뒤를 이어 회의실에 들어왔다.
“앤디랑 브래드부터 시작하죠.”
러셀이 먼저 스타트를 끊었다.
“지난 시즌 판매한 시즌 권은 풀 시즌 1000장, 하프 시즌 20000장으로 전부 매진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개근자는 몇 명이죠?”
시즌권 보유자 가운데 하프시즌 41경기 중 40경기, 풀 시즌 82경기 중에서 80경기를 개근한 사람에게는 다음 시즌에도 동등한 시즌권이 부여된다. 개근하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 수록 레이스에게는 손해가 된다. 하지만 인간인 이상 1년 내내 부지런하기는 힘들다. 아무리 보상이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풀 시즌권 보유자 중에서 홈 전 경기에 보러 오신 분은 이번에도 올랜도에 사시는 안나 페퍼님 한 분입니다.”
“역시.”
36년 연속 시즌권 보유권자이시자 2022년에도 홈 전 경기를 보러 오셨던 분 답다.
“기록을 찾아보니 지난 3년 동안 홈 경기에는 빠지지 않고 오셨더라고요.”
“경이롭네 정말.”
야구 경기라는게 평일에도 있고, 주말에도 있다. 어떤 주에는 경기가 꽉 차 있을 때도 있고, 어떤 주에는 원정밖에 없어서 경기가 없을때도 있다.
그런 다양한 상황에서도 지난 3년간 홈 경기를 전부 보러 오셨다는 건 대단한 업적이었다.
“하프 시즌권 중에서는?”
“총 47명이 40경기 이상을 관람했습니다.”
“생각보다 적네요?”
하프 시즌권 보유자들은 풀 시즌권 보유자들에 비하면 훨씬 널널한 조건이었다. 82경기 중에서 40경기 이상만 보러오면 되니까.
“솔직히 100명은 그냥 넘어갈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하프 시즌권만 20000장이 팔렸다. 그렇기 때문에 100명은 우습게 넘길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만약 그렇게 되면 이번 시즌 하프 시즌권의 시즌패스에서는 하프 시즌권을 그대로 주는것이 사라질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 고작 47명 만이 40경기 이상을 관람했다.
“부지런하게 움직이는게 힘들긴 하죠.”
“그것도 퇴근시간에 저 빌어먹을 다리를 뚫고 오는건 더 힘들고.”
“올 시즌에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보러올 수도 있다는거겠네요.”
세 사람이 장담컨대 트로피카나 필드의 빌어먹을 교통상황이 분명히 한 몫 했을거다.
“그럼 폐지는 없던일로 하는게 좋을까요?”
“네. 일단 한 시즌 더 운용하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당장에 크게 부담이 되는 것도 아니고, 이번 시즌 새로운 구장에 더 많은 팬들을 불러오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테니까요.”
“그럼 지난시즌하고 비슷한 식으로 합시다. 대신 상품권은 레이스 공식몰 및 푸드코트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고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요청사항이 있습니다.”
심슨의 말에 다운이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까 페퍼 여사님이 3년간 홈 전 경기를 보러 오셨다고 말씀드렸는데, 저희가 보답을 한 번 더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 시즌에도 꽤나 챙겨드렸다. 하지만 이런 충성심 높은 팬들에게는 아무리 잘해줘도 지나치지 않았다. 구단이 충성팬들에게 잘하는만큼 충성팬들은 더 늘어날 것이고, 구단에 변치 않는 사랑을 줄테니까.
“그래서 생각한건데, 페퍼 여사님께 직접 다음 시즌의 시즌권을 배달가는건 어떻습니까?”
다운은 피식 웃으며 밖을 가리켰다.
“카를이 제안했다는데에 10달러 걸죠.”
분명히 크로포드라면 ‘이거 찍어서 유튜브에 올리면 대박날겁니다! 엄청 홍보될거라고요!’라고 외쳤을 것이다. 심슨과 러셀도 같은 장면을 상상했는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카를이 아니라 제가 먼저 제안한겁니다.”
“아 저런······.”
“구단 이미지를 홍보하기에 너무 좋은 기회라서 말이죠. 10달러 주시죠.”
다운은 지갑에서 10달러를 꺼내 심슨에게 넘겼다.
“배달은 누가 갈 예정이죠? 우리 직원들이 가봤자 별 의미도 없을테고······. 페퍼 여사님이 제일 좋아하는 선수가 누구인지 혹시······.”
이유는 모르겠지만, 심슨이라면 분명히 조사해왔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다를까 심슨이 이미 준비했다는 듯한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레이스의 리더. 레이스 선수 중에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가능성이 가장 높은 선수. 그리고 올 시즌을 마무리하는 바로 그 선수.”
배리 브래넌은 어째 빠지질 않는다.
폰을 꺼낸 다운은 저기 집에서 몸을 근질거리고 있을 브래넌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브래넌의 걸쭉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뭐하고 있냐? 바빠?”
[나? 당연히 바쁘지! 다음 시즌에 안쓰러지려면 열심히 몸을······.]
브래넌이 자신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려고 할때, 다운이 말을 끊었다.
“할 일 없다고?”
[아니 나 바쁘······.]
“안 바쁘면 나와서 배달이나 좀 해라. 날짜는······.”
[F······.]
뭔가 욕설이 들린 것 같을땐 회의실의 평화를 위해 무시해주는게 인지상정.
“내일이라도 바로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내일 어때? 운전은 카를이랑 홍보팀에서 해줄거야. 너희 집 앞으로 모시러 갈테니까 내일 점심 쯤 준비하고 있어.”
[야 잠ㄲ······.]
뚝
전화를 끊은 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간대요.”
우우웅~
다시 진동이 울렸지만 다운은 살포시 수신거부를 눌렀다.
“그······.”
“갈거에요. 걱정말고 카를보고 내일 준비하라고 하세요.”
< 185화 - 배달이나 좀 해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