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 나는 백업 외야수다 >
3일 동안의 꿀같은 휴식을 마친 레이스 프런트에는 좀비들이 바글바글거렸다. 역시나 휴식 뒤 첫 출근은 피곤하기 그지없었다. 이는 파트장들에게도 적용되는 패시브였다.
“으어어어······.”
“왜 이렇게 죽어가는거야 피트?”
“휴식하는 내내 손주 놈들이랑 놀아주느라 진이 다빠졌어.”
“넌 그래도 손주놈들이라도 있지. 나는 그 손주놈들이 없다고!”
“미키랑 조니 사이에서는 소식없대?”
“이봐 피트. 미키라고 미키. 미키의 미래 계획에서 애는 5년은 뒤에 있을걸?”
한탄하는 거스의 뒤로 미키가 들어왔다.
“걱정마세요 아빠. 5년은 아니고 3년 뒤니까요.”
“그거 참 고맙구나.”
손주 이야기를 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하나 있다.
“그러다가 다운보다 늦게 자식보는 거 아녀?”
글라이드의 참전에 또 다시 할아버지 60대 3인방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단장님도 자식 보신답니까?”
“그러고보니 단장님이랑 여자친구분이랑 식사하신댔죠? 어땠습니까?”
“괜찮은 애더라고. 마음같아서는 바로 혼인신고 딱 해놓고 싶은데, 요즘 젊은 애들은 동거를 먼저 하거나 사실혼으로만 지내는 경우도 많다고 하더라고.”
“미키랑 조니 놈도 사실혼 관계로만 지내고 있잖습니까.”
“아빠. 우리는 결혼 전에 그냥 잠시 살아보는거라니까? 내년에는 결혼할 생각 있어.”
미키의 말에 로벨은 들어본 적 없다는 듯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눈치는 있었기에 ‘그런 이야기 한 적 없잖아?!’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단장님은 언제 결혼하신답니까?”
“여자친구도 블루제이스 홍보팀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았고, 다운 그 녀석도 계약기간 내에 우승 못하면 다른 구단 단장 자리 알아봐야하잖아? 그래서 아직까지는 결혼은 생각이 없는 모양이더군.”
글라이드는 아쉬운듯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오랜긴간 여자친구가 없었던 다운이 연애를 하는 것만으로도 어느정도는 만족한 모양인지 크게 아쉬워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또, 또 손주 이야기 하고 계시죠?”
다운이 글라이드에게 눈을 흘기며 회의실로 들어왔다.
“난 아무말도 안했다. 시작은 피트랑 거스가 했어.”
“저희는 그저 저희 손주 이야기 했을 뿐입니다.”
“구단주님이 그냥 쌓인게 좀 많으셨나봅니다. 허허!”
세 노인의 능구렁이같은 대처에 다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에 앉았다.
“다들 잘 쉬고왔으니 일합시다 일.”
우선 해결해야할 일은 역시나 외야수에 관한 것이다.
“쉬는동안 트레이드 뉴스는 보셨을거라 생각합니다.”
다운이 한 마디를 던지자 방금까지 있었던 장난스러운 분위기는 온데간데 사라졌다.
“저도 그 뉴스 봤습니다. 이스트우드가 에인절스로 넘어갔더라고요.”
“에인절스와 딜을 해서 이스트우드를 데려오는건 어떻습니까? 댄이 올린 리포트 봤는데 일리가 있던데요?”
“나도 그거 읽어봤는데, 수비만 조금 포기하면 정말 괜찮아질 것 같더라고.”
“죄송하지만 에인절스에서는 아마 이스트우드를 절대로 내보내지 않을거에요. 지금 에인절스의 외야진을 보면 그들도 여유가 없다는걸 알 수 있을거에요. 주전 중견수인 마이크 토켈슨이 엉덩이 부상으로 4월 중순에 복귀할 예정이고, 차기 중견수 감으로 여겨지고 있던 데이브 마쉬도 시즌을 마치자마자 팔꿈치 뼛조각제거 수술에 들어갔죠. 아무리 빨라도 6월에 복귀할 수 있을거에요. 저스틴 패티슨하고 로베르토 나바에즈가 외야 두 자리를 채우고, 이스트우드까지 외야에 들어가겠죠. 백업은 어떻게든 마이너에 있는 친구들로 채우고요. 토켈슨도 복귀한 첫 달에는 무리시키지 않을테니 적어도 전반기는 끝나야 에인절스 외야진에 여유가 생긴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네요.”
미키의 말이 맞다. 에인절스는 여유가 없기 때문에 절대로 이스트우드를 내주지 않을 것이다.
“댄이 추가로 추천했던 두 명이 내야수만 아니었다면 정말 좋았을텐데. 따로 영입할만한 선수는 없죠?”
“이미 제가 연휴동안에 최대한 알아봤습니다. 그런데 전혀 매물이 없어요.”
다운이라고 연휴 내내 쉬고있었던건 아니었다. 단장들에게 연락을 돌려봐도 돌아오는 답은
[우리도 지금 남는 외야수가 없어.]
혹은
[값이 좀 비쌀텐데 괜찮겠나?]
라는 말만이 돌아왔다.
물론 중간에서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보라스에게서 연락이 오긴 했다.
[괜찮은 외야수 하나 있는데 어때? 조지 크레이ㅁ······.]
그리고 되도 않는 선수를 추천해서 곧장 통화가 끊겼다.
“결국 해결하는 방법은 비싼 대가를 내주고 사오거나, 내부적으로 해결하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겠네.”
“에스코바에게 외야수업을 시키는건 어떻습니까? 에스코바의 수비 센스라면 외야수도 충분히 맡아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의사를 한 번 물어보고 본인이 원한다면 타진해보세요. 카스트로는 외야수비 좀 어때요? 지난 시즌에 조금 출전해봤다면서요.”
거스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써먹을 수준이 아닙니다. 외야 수비 자체에 센스가 없어요.”
“차라리 덕을 좌익수로 출장시키는건 어떻습니까?”
“이제서야 1루 수비에 적응하고 자리잡았잖습니까. 안그래도 좌완 상대 타격이 좋지 못해서 흔들리는데, 포지션까지 변경시키면 더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거스는 흘로첵을 외야로 쓰자는 말에 단호하게 반대를 외쳤다.
“차라리 트리플 A까지 경험이 있는 외야수들에게 전부 기회를 줘보는 건 어떻습니까?”
“흐음······.”
다운이 침음을 삼키며 생각에 빠졌다.
“트리플 A까지 올라온 경험이 있는 외야수들이 총 몇 명이나 있죠?”
“메이저리그 로스터에 올라온 선수를 제외하고는 여섯 명입니다.”
거스의 손이 화면과 연동된 패드를 빠르게 조작했다.
“가장 먼저 프레드 올라루스가 있습니다.”
올라루스는 다운의 아픈 손가락 중 하나였다. 좋은 포텐셜을 지닌 유망주라 말린스를 거치면서까지 데려왔는데 기대대로 성장해주질 못했다. 정확히는 타이밍이 안맞아도 너무 안맞았다.
그가 트리플 A를 씹어먹고 있을 타이밍에는 레이스의 외야진이 너무 건재해서 자리가 없었다. 그 반대로 올라루스가 1군에 필요할 타이밍에는 그는 항상 부상자 명단에 있었다.
두 시즌 동안 당한 부상만 하더라도 총 6번. 그렇게 두 시즌을 부상에 발목잡히며 보내고 난 올라루스는 트리플 A에서도 그저그런 성적을 내는 평범한 선수가 되어버렸다.
“부상 재발 가능성이 높은 햄스트링 쪽에 고질적인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포텐셜만큼은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최근 부상이 지난 8월이었죠?”
“네. 그것도 또 다시 햄스트링 부상이었죠.”
“커리어 네 번째 햄스트링 부상이었네요.”
“복귀했을 때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의 수비력을 보여줄 수 있는지가 관건이네요.”
“타격쪽도 그렇습니다. 햄스트링 부상을 당한 선수들 중에서 복귀하고나서는 자신의 스윙을 돌리지 못하는 선수들이 많으니까요. 게다가 지난 시즌 마지막에 당했던 부상이 햄스트링에서 엉덩이까지 올라올 가능성도 있다고 했습니다.”
엉덩이 쪽은 스윙할 때 힘이 실리는 대표적인 하체 부위였다. 그 부위에 부상을 당하면 타자는 강한 타구를 만들어내기 힘들었다. 강한 타구를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 미덕인 요즘 트렌드를 생각한다면 매력적인 타자로서의 올라루스의 매력은 추락할 것이다.
하지만 부상이 없다면, 그리고 예전의 그 빛나는 재능을 잃어버리지만 않았다면, 올라루스는 레이스에게 큰 힘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좋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기회를 한 번 줘보도록 하죠.”
“다음은······.”
나머지 다섯 명은 대동소이한 이유로 메이저리그에 올라오지 못하고 있는 선수들이었다.
수비는 되지만, 타격은 안되는 그런 선수들이다보니 사실상 대수비로만 쓸 수 있는 선수들이라고해도 무방했다.
“그들 중 한 명이라도 타격이 터져주기를 바래야죠. 그래도 주전급 세 명은 있잖습니까. 백업한테 너무 많은 설 바라지 않는게 속편할겁니다.”
“그야 맞는 말이지만······.”
이번 시즌 우승을 위해서 최고의 전력을 갖춰놓고 싶은게 단장인 다운의 마음이었다. 프런트도 그 마음을 모르는건 아니었다. 하지만 상황이 받쳐주질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자자! 분위기도 환기할 겸, 단장님에게 건의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러셀이 손뼉을 치며 침울한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야수 중 하나를 메이저리그 스프링 트레이닝 명단에 추천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재무를 담당하는 러셀이 추천하는 선수라니!
파트장들의 귀가 쫑긋 올라갔다.
“누군데요?”
“로렌 앳킨슨.”
이름이 나오자마자 미키가 설명을 시작했다.
“25살 168cm의 단신 유격수로 내야 전 포지션이 가능한 선수입니다. 빠른 발과 퍼스트스텝이 좋다는 평가를 받고있습니다. 저희 팜에서 나온 내야수답게 어떤 내야 포지션에 넣어도 1인분 이상의 수비는 한다는 평가입니다. 하지만 글러브질이 부드럽지 못해서 쉬운 바운드를 못맞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작은 체구와 좋은 선구안을 활용해 출루율은 좋은 편이지만, 타격의 정확도와 파워는 상당히 아쉽습니다. 특히 체구가 워낙에 작기 때문에 파워 측면에서는 좋아질 가능성이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미키의 설명에 러셀이 웃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한 가지 설명이 빠졌어 미키. 바로 앳킨슨이 영화에서 주연급 조연을 맡았던 배우라는것 말이야!”
러셀의 말에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영화에 나왔다고요?”
“그것도 조연으로?”
“독립영화 같은데에서 조연 맡은거 아니에요?”
러셀이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영화 42는 다들 들어봤지?”
“그야 당연하죠.”
“재키 로빈슨의 생을 그린 영화로 이번에 꽤 히트했잖아요.”
물론 글로벌 시장에서는 그렇게 히트를 치진 못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 팬이라면 한 번 쯤은 봐야하는 영화로 평가받았다.
다운 역시 스테이시와 함께 그 영화를 본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 영화에서 피 위 리즈를 맡았던 배우가 바로 앳킨슨이죠!”
러셀의 말에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아! 그 선수!”
“어쩐지 배우 치고는 야구를 잘하더니!”
“어디서 많이 봤다 싶었어!”
거기까지 알게되자, 러셀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꽤 인기를 얻었나봐요?”
“네. 요즘은 저희보다 네티즌들이 훨씬 빠르잖아요? 레이스 팬 커뮤니티에서 ‘한 번 쯤 메이저리그에서 뛰는걸 보고싶은 선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거든요. 메이저리그에는 뛸 수 없을지 몰라도, 시범경기까지만 뛰게 해주면 구단 홍보라던가, 재정에 큰 도움이 될겁니다. 흐흐!”
역시나 러셀은 러셀이다.
“어떻게 생각해요 거스.”
“메이저리그에 못 올릴 레벨은 아닙니다. 저희 팀 내야가 빵빵하지만 않았더라면 기회정도는 받을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올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거스가 그렇게 말하면 믿을만하죠. 올려봅시다. 그리고 그에 따른 홍보도 앤디가 알아서 해줘요.”
다운의 허락에 러셀이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만 믿으십쇼!”
러셀 덕에 침울했던 분위기가 살짝 살아났다. 살짝 살아난 분위기 속에서 거스가 다운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추가적으로 한 명 더 외야 백업 경쟁 명단에 넣고싶은 선수가 있습니다.”
거스의 말에 다들 고개를 갸웃했다. 레이스의 내규에 의해 트리플 A를 한 경기라도 경험한 선수들만이 빅리그를 밟을 수 있는 자격을 얻는다. 그리고 그 자격을 얻은 선수들은 이미 방금 모두 말했다.
“설마 트리플 A 경험이 없는 선수를 올리자는겁니까?”
마이너리거들은 모든 단계를 거쳐야지 메이저리그에 올라갈 수 있다는 규칙을 만든 사람 중 하나가 바로 거스다. 그런 거스가 지금 그와 정 반대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메이슨. 한 번 올려보시는건 어떻습니까?”
< 182화 - 나는 백업 외야수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