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화 - 윈터미팅의 밤은 깊어만 가고(3) >
“스캇. 한 번 보죠.”
[오케이. 지금 바로 내려가지.]
“바로요?”
같은 호텔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새벽 3시가 넘어가는 시간임에도 보라스는 곧바로 아래에 내려왔다. 조금 놀라웠던 건 진성찬이 아주 말짱한 모습으로 함께 나타났다는 것이다.
“레이스 단장 정다운입니다. 이 시간에 피곤하실텐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성찬은 다운의 한국말을 듣고는 얼굴이 환해졌다.
“이야! 여서 이렇게 한국말 쓰는 사람을 만나네. 반갑습니다! 행님이시죠? 크! 편하게 성찬이라고 불러주이소!”
“아, 네. 그건 계약을 하면······.”
“제가 이래뵈도 외로움이 많은 사람이거든요. 그리고 또 밥심으로 야구하는 사람이어가지고. 근데 들으셨을랑가 모르겠는데 집사람이 몬올수도 있다아입니까. 얼마전에 총기 사고도 그렇고, 집사람이 아예 영어를 못해가꼬. 저야 뭐 통역이랑 같이 붙어가지고 팀원들이랑 놀면 되는데 집사람은 그게 안된다입니까. 그래가꼬 앵간하면 한국사람 있는 팀으로 가고 싶었는데, 아뿔싸! 메이저리그에 한국선수 씨가 말라삣네?”
“다저스에······.”
“경찬이햄요? 그 햄 안친합니다. 맨날천날 만나면 ‘우승 못해봤으면 입 닫고 있어라.’, ‘신인왕도 못땄으면서 뭔 말이 그렇게 많아? 조용히 좀 해.’ 이래 말한다입니까. 사람이 쌀쌀맞아가지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이유로 입을 닫으라고 한 것 같지는 않은데······.
“블루제이스에 진한이 행님도 있긴한데, 그 팀은 아예 리빌딩이라서 저한테 관심없다카데요. 그래가꼬 한국인 없는 팀 가야하나 싶었는데, 이렇게 단장님이 한국인인 팀이 있었네!”
“굳이 따지자면 저는 한국인이 아니······.”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네? 이렇게 한국말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한거 아니겠슴까? 아, 물론 영어를 아예 안배우겠다는건 아니니까 오해는 하지마이소. 맨날 영어만 쓰면 외로울 수도 있는데 그 부분을 우리 단장행님이 채워주실 수 있다는 점이 아주 매우 마음에 든다는 말이니······.”
가늘어진 다운의 눈이 옆에 있는 보라스를 향했다.
“아하하······. 이 친구 이거 그만해도 될 것 같은······.”
“스탑? 스타압? 아니 통역도 없이 와가지고 한국말도 이래 오래 몬하고 있었는데 여서 멈추라고? 그래는 몬한다. 노! 아이 원 투 톡 윗 코리안 오케이?”
계약 전이라면 얼마든지 에이전시를 갈아치울 수 있는 지금 상황에서 진성찬은 절대 갑이었다. 그러다보니 보라스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하하 오케이 오케이!”
다운은 그런 보라스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이렇게 말이 많은 성격이라는건 못들은 것 같은데요.”
“나도 이 정도까지 말이 많을줄은 몰랐어. 한국에서는 이렇게까지 많지 않았다고, 이렇게 말이 많다는 평가도 없었고!”
“통역은 어따 두고왔어요?”
보라스는 웃는 낯으로 중얼거렸다.
“본인이 ‘영어회화를 빨리 익히려면 통역은 없는게 나을 것 같다.’고 말해서 일부러 안데리고 온거라고. 나는 계속해서 통역을 붙여준다고 말했어.”
“그래서 영어만 쓰던가요?”
“폰을 이용해서 열심히 쓰긴 하더군.”
의지 하나만큼은 알아줄만 한 것 같다.
“여튼 행님. 저랑 계약할라고 하시는거 맞죠?”
“그건 조건에 따라······.”
“조건예? 뭐 별거 없습니다. 그냥 여기 있는동안 머물 집 하나 해주시고, 저랑 매 주 한 번 밥 같이 먹어주이소.”
“그건 돈에 따라······.”
“아 돈! 중요하죠. 근데 뭐 어차피 500만 달러 이상 줄거 아입니까? 경찬이 햄 때문에 한국 투수들 값이 떨어져서 그 정도로 평가받고 있다카더라고요. 거기다가 뭐 플로리다 주에는 그 뭐고? 그 세금 없다매요. 그래갖고 실수령액은 더 많다고 하드만요. 미국에서는 생짜 신인인데 한국보다 돈도 많이 벌고, 메이저리그 경험도 하고! 뭐 적당히 그 정도면 만족합니다! 솔직히 알 두 쪽 달고 야구하기로 마음먹었으면 메이저리그는 함 밟아봐야하는거 아입니까? 꿈을 이룬다는게 더 중요하죠!”
진성찬의 나불거림에 다운의 입꼬리가 살며시 말려올라갔다.
“아~ 500만 달러?”
달러라는 단어가 두 사람의 입에서 나오자 보라스의 웃는 낯에 살짝 금이 갔다. 빠르게 폰으로 뭔가를 입력한 보라스는 번역기를 재생했다.
- 이봐 진. 나 없이 돈 이야기 하지마. 재난이 일어날 수 있다!
미안하지만 재난은 이미 일어났다. 다운은 앞 포켓에 있는 마이크를 톡톡 두드렸다.
“500만 달러를 말씀하신 것 같던데······.”
에이전시에서 가능할 것 같은 금액을 낮춰부르는 경우는 흔히 있는 일이다. 기대를 낮춰놓고 높은 계약을 성사시키면 시킬수록 자신의 능력을 더 잘 알아줄테니까.
그럼 언론을 통해 뿌린 1300만 달러짜리 찌라시는 뭐냐?
선수 본인도 영어를 배우는 중이고, 가족도 영어를 못한다. 심지어 저 기사는 메이저 언론사가 아니라 1인 언론사일수도 있는 ‘워싱턴 스포츠 페이퍼 미디어.’라는 곳에서 쓴 기사. 한국 기자가 퍼나르지 않는 이상은 접할 일은 전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보라스도 저렇게 작업을 쳐놓은 것일테고.
‘여기서 능력을 증명한 다음에 계속해서 자신의 고객으로 잡아둔 뒤, 3년 뒤에 대박을 터트리는게 원래 계획이었겠지.’
한국어를 하는 단장을 만날건 염두에 두지도 않았을테니, 금액에 있어서는 걱정도 하지 않았을거다. 어차피 모든 대화는 자신을 통해 이루어졌을테니까. 하지만 진성찬이 다운과 직접 이야기를 하게 되면서 그의 계획은 틀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다운은 그 틀어진 틈새를 아주 잘 활용할 생각이었다.
“진성찬씨.”
“네 행님!”
“미안하지만 아직 금액적인 부분에서 협상이 잘 안돼가지고 확답을 드리기는 힘듭니다. 성찬씨도 알겠지만 보라스가 돈에 있어서는 양보를 잘 안해서······.”
“얼마달라 카든데요?”
“750만 달러 달라고 했는데······.”
순간 다운의 머리가 빠릿하게 돌아갔다.
‘750만 달러도 그리 비싼 금액은 아니다. 그런데 500만 달러를 불렀다 이거지? 그럼 우리가 500만 달러를 부를 근거도 충분하긴 해. 아니면 아예 여유가 그 정도 밖에 없다고······. 아냐. 우리 여유가 500만 달러밖에 안된다고 하는건 말이 안돼.’
그리고 추후 보라스와의 관계를 고려해서라도 눈탱이를 치는건 지양해야했다.
‘리키와의 계약도 고려해야해.’
록하트가 떠나고 난 뒤 심경의 변화가 꽤 있었는지, 더지는 브래넌과의 대화를 통해서 ‘어느정도 자존심만 세워준다면 팀에 남을 생각이 있다.’라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렇기에 다운은 아예 보라스와 척을 지는 행동은 할 수 없었다.
‘적정 선을 지켜야한다!’
생각을 정리한 다운이 말을 이었다.
“솔직히 그 정도도 리스크가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알다시피 윤경찬이 너무 망해버리는 바람에 말이죠.”
“그럼 레이스에서 제안할 수 있는 금액은 어느정도인가요?”
“600만 달러가 최대치입니다.”
이 정도 금액으로는 보라스가 만족하지 못할거라는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다운은 빠르게 뒤에 조건을 붙였다.
“대신 최대 200만 달러 수준의 옵션을 걸겠습니다. 150이닝, 10승, 20경기 선발 출장, 퀄리티스타트 10회에 각각 50만 달러씩을 걸죠.”
다운이 원하는, 그리고 레이스가 원했던 한국에서 진성찬이 보여주었던 모습이 나오기만 한다면 쉽사리 타낼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리고 저 정도 활약을 해준다면 800만 달러는 아깝지 않지.’
보라스의 신경을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동기부여도 하고, 망했을 경우도 대비한다. 지금 상황에서 다운이 제안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보라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통번역기를 통해 다운이 하는 말을 이해한 그는 곧바로 반박을 날렸다.
“잠깐 다운. 750만 달러도 충분히 깎아준 금액이라는걸 알고있을텐데?”
“그래서 옵션으로 그 이상을 드리겠다고 한거잖아요. 제가 마냥 이득을 보겠다고 한 것도 아니고, 이 정도면 스캇으로서도 충분히 받아들일만한 제안 같은데요? 아니면 달성할 거라는 믿음이 없으세요?”
“그렇게 도발해도 안되는건 안되는거야 다운. 옵션질을 할거였으면 700만 달러에 300만 달러짜리 옵션을 덕지덕지 붙였겠지.”
“하지만 본인은 500만 달러 이상을 원한다고 했잖아요. 일부러 스캇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을 정도의 금액을 맞춰준건데 말이죠.”
“그 부분이 더 기분이 나빠. 내가 딱 허용할 수 있는 선에 딱 걸치는 그 제안. 그래서 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동족 혐오가 있는건 보라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그렇다고해서 저희 제안 아예 거절할건 아니잖아요?”
“그야 당연히 아니지. 차라리 650만 달러에 150만 달러 옵션을 넣는건 어때? 어차피 20경기 출장은 150경기에 출장하면 충분히 달성할 수 있는 옵션이잖아. 그리고 자네도 100만 달러라는 고정지출이 사라졌으니 좀 더 마음이 편할테고. 대신 집은 우리가 알아서 해결하지.”
“600만 달러에 150만 달러 옵션으로 가죠. 생각해보니까 제가 매 주마다 선수와 따로 밥을 먹어줘야한다는 건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는거더라고요. 스캇도 시간이 돈이라는걸 알잖아요. 그것도 스캇이나 저처럼 결정권자의 위치에 이른 사람들의 시간은 더 비싸고요. 그런 제가 직접 한국식의 밥을 먹어준다? 그것도 3년 동안? 이루말할 수 없을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항상 시간이 돈이라는 말을 달고 사는 보라스였기에 다운의 말에 직접적으로 반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트레이드를 하게되면 그 모든 조항은 없는 조항이 되어버리는게 아닌가? 그렇다면 트레이드 거부권을 주게.”
“설마 저희가 3년안에 트레이드를 하겠어요? 그냥 가시는게 어때요?”
“어차피 트레이드를 하지 않을 생각이면 트레이드 거부권을 줘도 상관없겠구만. 아, 마이너리그 거부권은 당연히 주겠지?”
진성찬이 이미 이룬것을 생각한다면 마이너리그 거부권 까지는 줘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윤경찬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건 장담할 수 없었다. 그에게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는 노릇.
“드려야죠. 하지만 1년을 채우면 거부권이 생기는걸로 하죠. 1년차에는 적응기가 필요할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되면 150만 달러를 못 받을 수도 있잖아.”
“하지만 마이너리그로 내려가야만 할 정도의 성적이라면 어차피 150만 달러어치 옵션은 달성하지 못할텐데요?”
“어차피 달성하지 못할거라면 수준이 조금이라도 높은 메이저리그의 경기에 출장하면서 경험을 더 쌓는게 이득이지.”
어차피 다운은 적당한 선에서 진성찬을 잡는게 이득이다. ‘한국말을 할 줄 아는 관계자가 있는 곳’을 원했던 진성찬은 레이스와 계약을 하고싶어했다. 마지막으로 보라스는 다운을 이용해서 다른 쪽에서 이득을 보길 원했다. 더불어 진성찬이 원했던 조건을 들어주는 계약을 할 수도 있고 말이다.
서로가 적당한 선에서 손을 잡는게 이득이라는 것을 알고있다보니 두 사람은 이것저것 재는 대신에 원하는것을 두고 착실하게 싸웠다.
“계약서 다시 한 번 확인하죠.”
“680만 달러에 120만 달러짜리 옵션. 트레이드 거부권과 1년차 4, 5월에만 제한적으로 적용되는 마이너리그 옵션. 그리고 자네는 의무적으로 주에 한 번은 성찬과 함께 밥을 먹어줘야한다. 다 들어가 있구만.”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서 조용히 있던 진성찬이 활짝 웃으며 펜을 들었다.
“사인하면 되죠?”
“그래.”
보라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진성찬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리고는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보통은 ‘잘 부탁합니다,’ 라는 말이 나와야 정상인 상황. 하지만 진성찬은 달랐다.
“자! 그럼 편하게 밥 무면서 이야기나 하시죠 행님! 제가 할 이야기가 무척이나 많······.”
다운은 신나서 떠들어대는 진성찬을 보며 옆에 있는 프레슬리에게 손짓을 했다.
“댄. 한국어 좀 배웠다고 했지?”
다운이 한국인이다보니 프레슬리도 한국어를 어느정도는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자고로 짬은 때려야 제 맛.
“스프링 트레이닝 전까지 말을 듣는 수준까지 끌어올려와.”
< 174화 - 윈터미팅의 밤은 깊어만 가고(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