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화 - 윈터미팅의 밤은 깊어만 가고 >
“약았네요 스캇.”
애초에 1000만 달러에서 최대 1200만 달러까지 받을 수 있는 투수라는 평가를 듣고 있는 투수다. 저 중에서 1200만 달러 정도를 받을 투수라는 기사를 쓴 기자는 분명 보라스가 세팅해놓은 사람일것이다. 그런 투수를 1000만 달러 아래에 놓고 생색을 낸다?
약았다는 소리가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무조건 자네와 우선협상하겠네. 대신 자네는 처음부터 최고의 제안을 써서 내줘. 정말 얼토당토않은 제안만 아니면 무조건 수락하지.]
이 또한 보라스의 약은 수였다.
애초에 다운이 얼토당토않은 제안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어차피 연 1000만 달러 정도의 제안을 받을 수 있는 선수. 얼토당토하지 않은 제안이라면 적어도 800만 달러 이상일거다.
800만 달러의 연봉을 받으면서 3년을 메이저리그에서 적응 겸 자신을 어필하는 기간으로 삼는다. 그리고 만 30세를 맞이하는 시즌에 FA가 되어 다시 한 번 대박을 노릴 수 있는 각이 나온다.
여기서 나오는 손실은 다운을 활용해서 몸값을 올린 케니 네일러의 몸값으로 메꾼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진성찬에게도 다운 인증마크를 찍을 수 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었다. 아직까지 선수를 영입하는데 있어서 큰 손해를 본 적이 없는 다운이다. 그런 다운이 영입한 선수? 다음 3년을 폭망하더라도 “다운이 영입한 선수다! 아직까지 잠재력을 터트리지 못했을 뿐 실력은 충분히다!”라며 커버를 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보라스로서는 전혀 손해볼 것 없는 제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더 줄건 없어요?”
이걸로는 부족하다.
[그걸로 만족은 못하나?]
“스캇이 제 위치였으면 만족했겠어요?”
[할 말이 없구만. 그렇다면······.]
역시 보라스는 여기까지도 생각해놓은 것 같다.
[연 750만 달러에 3년짜리 계약.]
다운이 생각한 최대치보다 50만 달러가 싼 금액이다. 하지만 부족하다. 결국 750만 달러라는 돈을 써야하는건 레이스였으니까.
“그리고요?”
[구진환]
순간 다운이 흠칫했다.
‘어떻게 알았지?’
구진환은 레이스의 동북아시아 스카우트 팀이 적극적으로 추천한 포수 유망주다. 다운이 부임하던 시절 고1 첫 시즌때부터 조금씩 출장하기 시작해서, 2학년때부터는 팀의 주전급으로 활약하기 시작한 선수. 타격 능력도 좋고, 수비도 좋다. 하지만 그에 대한 메이저리그의 관심은 크지 않았다. 그의 포지션이 포수였기 때문이었다.
포수는 투수와의 의사소통이 그 누구보다 중요한 포지션이다. 그러다보니 모국어가 영어가 아닌 선수는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저희는 그 녀석을 데려와야합니다! 영어수업을 지금부터 지원하면 3년 뒤에는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가 될겁니다!”
“영어를 메인으로 익히게 하고, 스페인어도 익히게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 구단 특성상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선수들의 비율이 상당히 많은 편이니까요.”
“최근 늘어나고 있는 히스패닉 선수들의 비율을 생각해본다면 필수라고 생각합니다.”
스카우트 팀의 강력한 추천에 의해 다운은 한국에 있는 부모님의 지인의 지인을 통해 비밀리에 그의 언어공부를 지원해주었다.
물론 위장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울고 투수 중에 괜찮은 친구 있다고 했죠?”
“네. 같은 학년에 유망한 투수가 두 명, 그리고 괜찮은 유격수 자원이 하나 있습니다.”
“그럼 그 친구들에게 관심이 있는 것처럼 최대한 행동하세요. 알겠죠?”
한국에서 운동을 하면서 공부까지 병행하는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듣긴했다. 하지만 구진환은 자신을 추천한 스카우트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매일 잠을 줄여 영어와 스페인어를 공부했고, 스카우트 팀에게 매 달 받은 피드백으로 매 달 더 좋은 선수가 되어갔다.
무려 2년을 투자한 끝에 드디어 그가 영어와 스페인어로 의사소통을 원활히 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말을 들었다. 게다가 다가오는 24시즌 KBO 최대어라는 수식어 역시 붙었다.
얼마 뒤 사직야구장 답사를 위해 한국에 갈 때, 레이스는 그를 위해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는지까지 모두 설명할 계획이었다. 그렇게 공감대를 형성한 뒤, 다음 시즌 중반에 국제계약을 통해 그를 데려올 예정이었다.
그와 함께 스카우트를 시작했던 투수 중 하나인 김재영 역시 레이스로 데려올 생각이었고.
‘설마 보라스가······?’
아니다.
보라스가 이미 그의 이름을 내뱉은 순간부터 설마가 아니라 무조건이다.
“구진환이랑 계약하셨나봐요?”
[계약까지는 아니고, 그냥 조언자 정도지. 아무래도 미국 시장에 대해서 잘 모르다보니 부모님들 입장에서는 불안한 모양이더라고. 그러다보니 나처럼 한국 유망주들을 데려가본 사람에게 도움요청도 오는거고. 아, 아직 자네는 자식이 없어서 잘 모르려나?]
구진환은 꽤나 입이 무거운 친구라는 보고를 받았는데, 부모님은 아닌 모양이다. 뭐 부모님 입장에서는 사기당하는건 아닌지, 우리 아들이 미국에 가면 더 힘들어지는건 아닌지에 대한 걱정이 많을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이해하고 넘어가야겠지.
“휴······. 그래서 그 친구를 다른 곳으로 빼돌리려고요?”
[그럴리가! 자네가 이미 침을 다 발라놓은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다른 곳으로 돌리겠어?]
“수틀리면 돌리겠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전혀. 하지만 괜찮은 한국 유망주가 없냐고 물어보는 몇몇 다른 구단의 관계자들에게 어떤 정보가 넘어갈수도 있지. 아직 그 친구들은 구진환 이 친구가 영어와 스페인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건 모르거든.]
이래서 보라스가 싫다.
지난 2년간 다운과 레이스의 지원 아래 성장해온 구진환이다. 당연히 레이스에게 호의적을 수 밖에 없다. 여기서 만약 ‘부모님에게 내가 안좋은 말을 하면 어떻게 할텐가?’라고 했다면 다운은 콧방귀를 꼈을지도 모른다. 이번 방한때 부모님을 완벽히 안심시킬 수 있을 정도의 청사진을 들고갈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이유로 다른 구단이 적당히 찔러보는 정도로는 레이스와 그의 계약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미 구진환과 레이스 사이에는 2년에 걸친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영어와 스페인어에 능하다는걸 알게 된 다른 구단들이 과연 적당히 찔러보는 것에서 그칠까? 올 시즌 최고의 유망주라는 평가를 받는 구진환이 언어까지 된다는데?
‘절대 아니지.’
무조건 데려오려는 구단이 있을 것이다. 특히나 양키스와 브레이브스, 다저스처럼 다음 시즌 지명 순위는 낮지만 명성이 높은 팀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내 부탁을 들어준다면, 자네가 지키길 원했던 비밀을 같이 지켜주도록 하지. 그리고 다른 구단이 다가오더라도 자네 편에 서는게 무조건 이득이라는 점 역시 부모님들께 주입해주기도 할테고.]
다운은 미국 내에서, 그것도 메이저리그 관계자들 사이에서 평가가 높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인지도는 미국에 비해 상당히 떨어진다. 당연히 구진환의 부모님들도 다운의 말보다는, 한국에서도 유명한 보라스의 말을 더 신뢰할 것이다.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딜 같은데? 아닌가?]
“하아······.”
외통수다.
“진짜 성격 나쁜거 알죠 스캇?”
[하하! 자네만하겠어? 그럼 우리 사이 딜은 받아들여진거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그런걸로 하시죠. 지금 통화 다 녹음되어 있습 니다. 나중에 발뺌하면 안돼요.”
[물론이지. 내가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사람인줄 아나?]
“평생을 그렇게 살아오신거 아니었어요?”
[뭐 그렇게 말한다면 할 말은 없다만, 이번 일은 두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지지는 않으니까.]
하긴 진성찬이 아무리 한국에서 좋은 활약을 했다고는 하지만, 보라스를 에이전트로 둔 그를 원하는 구단은 한정적이었다. ‘그’ 스캇 보라스가 나서서 1000만 달러 이상을 원한다는 말을 하고 다니는 투수다. 모험을 원하거나 확신이 있는 구단이 아니라면 결코 그에게 다가갈 수 없을 것이다. 다운조차도 1000만 달러 이상은 너무 리스크가 크다고 생각하고 빠져있었을 정도니까.
수요가 고정된 상황에서 진성찬의 가격이 변동되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보라스 역시 네일러의 가격을 쥐고 흔들기로 마음을 먹었을 것이고.
“뭐 그렇다면야······.”
속이 쓰리긴 하지만, 크게 손해를 보는 딜은 아니었다. 저쪽이 이쪽의 이미지와 보증을 쓰는 대신, 이쪽에서는 정보를 지키고, 괜찮은 투수 하나를 괜찮은 가격에 영입할 권한을 얻었으니까.
[이걸로 벨링엄 건은 갚아줬네.]
“진짜 소름돋는다. 그걸 담아두고 있었어요?”
해밀턴 고등학교에서 코디 드링크워터와 만났을 때, 벨링엄에게 관심이 없는 척을 했던 것을 아직도 담아두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맡았으면 1라운드 초반은 무조건이었어!]
“네, 네. 그러시겠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다운은 캘린더에서 스케줄을 띄웠다.
“진성찬에 대해서는 저희가 다시 한 번 검토하고 연락드릴게요. 혹시 어필하고 싶은 점이 따로 있나요?”
[어차피 연봉이랑 계약기간은 고정하기로 한데다가, 자네가 알아보면 다 알게 될텐데 굳이 내가 어필을 해야하나 싶기는 한데······. 그래도 한국에서 부산 시호크스를 우승시켰다는 점은 자네 상상 이상으로 대단한 일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네.]
“그 부분에 있어서 중점적으로 보도록 하죠. 만약 영입할 생각이 있으면 미팅은 언제부터 가능하죠?”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지. 해외 FA로 메이저리그에 진출을 하는 선수가 윈터미팅에도 안오는건 자세가 안되어있다고 볼 수 있지. 레이스에서 준비만 된다면 얼마든지 불러올 수 있어.]
“알겠습니다. 그럼 곧 다시 연락드리도록 하죠.”
전화를 끊은 다운이 책상에 엎어졌다.
“하아······. 진짜 진빠진다. 진빠져.”
보라스와 만나거나 통화할때마다 수명이 뭉텅이로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구단이 뭘 원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써야하는 정보가 어떤 것인지, 어떻게 하면 최고의 이득을 끌어낼 수 있는지를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보라스다. 저러니 업계 최고의 에이전트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는거겠지.
다운은 자리에 일어나서 파트장들이 있는 옆의 회의실로 들어갔다.
“통화는 잘 하고 오셨나요?”
“여자친구 분이셨나?”
“에헤이! 그런거 물어보는거 아냐 이 친구야!”
음흉한 표정으로 떠드는 아재들을 향해 다운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랬으면 좋았을텐데 말이죠. 아쉽게도 여우같은 보라스랑 통화하고 왔어요.”
보라스라는 말에 파트장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싹 굳었다. 그만큼 보라스라는 이름은 프런트에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이름이었다.
“무슨 일이랍니까?”
다운은 그와 했던 이야기를 싸그리 이야기했다.
“그럼 우선은 진성찬에 대해 알아봐야겠군요.”
자신이 나서야 할 때라는 것을 안 미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딱 세 시간만 주시죠. 진성찬이 자고 일어나서 가장 먼저 먹는 것이 무엇인지까지 싸그리 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눈을 돌려 시계를 확인하니 오후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윈터미팅도 잠자긴 그른 것 같다.
< 172화 - 윈터미팅의 밤은 깊어만 가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