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화 - 배려는 배려일 뿐 >
9월은 한 시즌을 마무리하는 달이다.
이 한 달에서의 활약이 시즌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도, 혹은 시즌을 실패로 이끌어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 고로 마지막 한 달! 딱 한 달만 더 달려보자!”
선수들의 시선을 받으며 열정적인 연설을 한 사람은 곧 단호한 얼굴을 풀고는 한 마디를 덧붙였다.
“라고 단장님이 전하라고 했어.”
그런 말을 한 사람은 단장보좌인 댄 프레슬리.
“댄도 한 마디 해봐요!”
“맞아 댄! 이제 한 마디 할 때 됐잖아!”
“아니면 노래라도 한 곡 뽑아줘!”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되는 몇 달 전 같았으면 선수들의 반응에 당황했을 프레슬리다. TV속에서만 보던 선수들이 앞에서 친근하게 말을 걸어오는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따.
하지만 이제는 어느정도 자리가 익숙해졌는지, 선수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이번 경기 위닝시리즈 하면 돌아오는 길에 노래 하나 뽑아줄게요.”
“오? 정말?”
“크~! 역시 이래서 댄이 좋아! 단장님은 이런 부탁 들어주지도 않는다고!”
“그래도 다운만큼 좋은 사람도 드물지.”
“맞아. 그래도 한 말은 지키는 사람이니까.”
선수들 사이에서 다운의 신뢰도는 아주 높았다. 지금까지 내뱉은 말을 지키지 않은 적도 없었고, 선수들에게 레이스에게도 미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목표를 향해 착실히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들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단장님 뭐한다고 안오셨대?”
“중요한 일이 있으시대요.”
***
그 시각 다운은 스테이시 로저스와 영화관에서 나오고 있었다.
“영화 어땠어요?”
다운의 질문에 스테이시가 슬며시 웃었다.
“영화 내용보다는 누구와 함께 보는지가 중요한게 아닐까요?”
다운은 한 방 맞았다는듯이 이마를 탁 쳤다. 그런 다운을 보며 스테이시는 뒷 말을 이었다.
“재미있었어요. 재키 로빈슨이라는 사람이 있다는건 알았지만, 그의 일대기는 전혀 몰랐으니까요.”
다른 여자였다면 모르지만, 스테이시는 로저스 가문에서도 꽤 야구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축에 속했다. 심지어 내년에는 지금 있는 로저스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블루제이스 마케팅팀으로 자리를 옮길 수도 있다고 했다.
“특히나 피 위 리즈를 맡았던 배우가 꽤 인상깊었어요.”
리즈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다저스의 레전드 유격수이자 당시 다저스의 주장으로,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극에 달해있던 당시 시기에 재키 로빈슨은 팀원으로 받아들이는데 동의한 사람 중 하나였다.
“잘생기고, 타격도 잘하던데요? 물론 키가 좀 작긴 했지만.”
“피 위가 그래서 붙은 별명이니까요. 근데 또 유명 배우는 아니던데.”
“애초에 이 영화 자체가 그렇게 엄청난 예산이 투입된 영화는 아니잖아요?”
두 사람은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며 주변을 걸었다.
두 사람이 영화를 본 건 데이트라는 목적도 있긴 했지만, 더 큰 목적이 있었다. 바로 글라이드 파크와 연결된 쇼핑몰과 시설들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꽤 잘 꾸몄네요. 이쪽에서 나와서 곧바로 쇼핑몰로도, 경기장으로도 갈 수 있도록 위치도 좋고요.”
“애초에 그럴 의도로 만든거니까요. 또 감상을 계속 이야기해봐요.”
“로저스 센터처럼 호텔이 들어서지 못하는건 아쉽네요. 그랬으면 수입이 꽤 됐을텐데요.”
“저도 그 점은 아쉬워요. 그래도 시에서 안된다고 하니 어쩌겠어요.”
두 사람은 영화관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꺾어서 글라이드 파크로 향하는 길에 들어섰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레이스의 자동 출입구군요?”
메이저리그 30개 구단 중 유일하게 E-티켓을 100%도입하고 있는 구단이 레이스다. 그래서 레이스는 관리자가 한 명만 있으면 되는 자동 출입구를 곳곳에 설치할 수 있었다.
“이 기기는 뭐에요?”
“포토 티켓이에요.”
“포토 티켓?”
“여기 카메라가 있잖아요?”
자판기 처럼 보이는 티케팅 기기는 구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카메라가 바라보는 곳에는 ’Stand here’ 이라고 표시된 블럭이 있었다.
“아! 그럼 여기에서 서서 기념이 될 수 있는 사진을 찍는거군요!”
“맞아요. QR코드로 티켓을 인증하고, 일정 금액을 더 내면 글라이드 파크를 배경으로 한 자신들의 사진이 담겨있는 특별한 티켓을 가져갈 수 있는거죠. 트로피카나 필드였으면 절대로 못했을테지만······.”
트로피카나 필드의 그 구린 외관을 가지고 누가 사진을 찍고 싶겠는가? 삐까뻔쩍한 글라이드 파크니까 가능한 이야기다.
생각지도 못했던 세일즈 포인트에 스테이시가 혀를 내둘렀다.
“대체 이런건 어디서 생각해오는거에요?”
“저희 마케팅 팀장이 일을 엄청 잘하거든요. 제가 듣기로는 한국의 영화관이 자주 이용하는 수법이라고 하더라고요. 물론 그쪽에 있는 야구단도 이미 써먹고 있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와······. 그건 또 어디서 들으셨대요?”
“저희 파트장은 귀가 전 세계에 있거든요.”
“같은 파트인데 안꿀리려면 더 열심히 해야겠네요.”
그러면서 그녀는 자판기를 가리켰다.
“저희도 저 아이디어 가져가도 되나요?”
“얼마든지요.”
레이스가 가장 먼저 시작한 것도 아니고, 한국에서 먼저 시행한 것이다. 게다가 레이스가 먼저 유행시키기 시작한다면 어차피 다른 구단들도 다 알게 될거다. 굳이 다운이 나서서 막을 이유는 없다는 말이다.
게다가 100% E-티켓을 이용하는 레이스였기에 쉽게 적용할 수 있었던 것이지, 실물 티켓을 따로 파는 구단이라면 약간 더 복잡한 절차를 생각해야할거다.
그리고 또 특이한 점이라고 한다면 오피셜 스토어가 구장에 들어가기 전에 있다는 점이었다.
“오피셜 스토어가 구장에 들어가기 전에 있네요?”
물론 다른 구단들도 구장 밖에 오피셜 스토어가 있긴했다. 보통은 티켓을 사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외부에 하나, 그리고 내부에 하나씩을 배치하곤 했다.
“여기 말고도 구장 내부 2층과 1층에도 스토어가 있어요. 1층 매장은 구장 쪽 출입문에는 E-티켓으로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해놨고요.”
만약 실물 티켓이었으면 하나하나 검사하느라 힘들었을거다. 하지만 E-티켓을 모두 사용하다보니 직원을 따로 배치하지 않고도, 저렇게 출입하도록 만들어 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럼 오피셜 스토어가 총 세 개인가요?
“여기는 몰과 영화관, 그리고 글라이드 파크의 교차로죠.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매장들을 보세요.”
나이키, 아디다스, 퓨마 등 스포츠 브랜드들이 이어져있었다.
“스포츠 브랜드들을 하나하나 보면서 오다가 레이스에게 관심이 있는 팬이라면, 여기 있는 공식 스토어에 들어오겠죠. 그리고 뭔가를 사갈 수도 있을거고요.”
“여기는 구장에 출입하기 위한 관중이 아니라 일반적인 쇼핑객들을 위한 스토어라는거네요.”
“맞아요. 그래서 조금 더 캐주얼한 상품들 위주로 진열해놓을 생각이에요.”
다운은 스테이시를 이끌어 출입구에 섰다.
“이건 트로피카나 필드에 있는 출입문하고는 다르네요?”
트로피카나 필드에 있는 자동 출입문은 삼단 쇠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QR코드를 찍으면 쇠봉을 밀고 지나갈 수 있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여기 달린 문은 기본적으로 두 짝의 유리로 되어있었다. 생긴것으로만 봤을때는 양 옆으로 슬라이드 되어 열릴 것 같았다. 게다가 유리문 앞에는 허리정도 높이까지 올라와있는 플라스틱 차단문이 하나 더 있었다.
“지금 트로피카나 필드에 있는 출입문은 솔직히 좀 오래 됐잖아요? 그만큼 하자가 많았어요. 이번 시즌에 트로피카나 필드에 만원경기가 꽤 있었던거 아시죠?”
“알죠.”
시즌패스로 인해서 초반에 엄청난 관중들이 매 경기 몰려왔었다.
“트로피카나 필드의 수용인원이 몇 명인지 아세요?”
“25000석이죠.”
“그런데 만원 관중때 추산된 관중들이 25000명이 넘었던 적이 꽤 있었어요.”
“네? 그게 가능해요?”
“가능하죠. 저희는 아시다시피 반 정도는 무인으로 출입하잖아요? 경기 도중에 경기장 밖에 있는 흡연 부스를 이용하고 재출입하는 것 조차 모두 무인으로 이루어지죠. 그렇다면 여기서 생기는 문제가 뭐겠어요?”
“티켓의 재활용.”
“맞아요. 직원이 최소 한 명은 있다고 하지만, 그들도 절대 모든 출입자들을 확인할 수는 없어요. 오직 확인은 기계로만 가능하니까요. 누가 구장으로 들어온 뒤에 폰을 넘겨줘도 되고, 어린아이 같은 경우는 그냥 차단봉 아래로 슥 들어왔을거에요.”
다운의 말에 스테이시가 아미를 찌푸렸다.
“그럼 상주하는 직원을 늘리면 되잖아요.”
“그렇게 하면 해결은 되겠죠. 하지만 저희는 오히려 직원을 없앴어요.”
“네? 왜죠?”
“그렇게라도 들어오시는 팬들이 감사하니까요.”
“아······.”
트로피카나 필드에서는 한 명, 한 명의 관중이 소중했다. 그래서 다운과 글라이드를 위시한 프런트는 그렇게라도 해서 들어오는 팬들을 막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이곳으로 넘어오기 전의 마지막 시즌이니까 한 시즌 정도는 봐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하면 티켓을 사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허탈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희가 티켓홀더들을 위한 이벤트를 많이 하는거죠.”
올 시즌 홈 경기에서 자잘하게나마 이벤트가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작게는 음료나 커피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선수와의 사진, 사인볼, 유니폼까지도 주곤 했다. 그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하지만 새 구장에서는 다 막힐겁니다.”
“딱 봐도 그래보이네요.”
바닥부터 천장까지 꽉 막혀있는 출입문 어디에도 틈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어떤 누구도 저 사이로 폰을 건넨다던가 티켓을 건넬 수는 없을 것이었다.
“이걸로 건너와요.”
다운이 임시 사원증을 그녀에게 건넸다.
“이걸 찍으면 열리는건가요?”
“아뇨. 여기 있는 플라스틱 문은 그냥 밀고 들어가는거에요. 정확히는 한 사람만 카운트 하기 위한 문이죠. 한 명이 지나가면 플라스틱문은 반대쪽 문이 열리기 전까지는 절대 열리지 않아요.”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이 있을때도 유용하겠네요.”
“맞아요.”
삑!
사원증을 찍자 유리로 된 문 두 짝이 반대쪽을 향해 열렸다.
“슬라이드가 아니네요?”
“슬라이드는 다칠 위험이 있거든요. 특히나 아이들 같은 경우는 그 사이에 끼일 가능성이 있죠.”
말을 듣지 않는 어린 아이들을 위한 배려이면서도, 자동출입문으로 인한 사고로 구단이 고소당하지 않을 구석을 만들어놓은 것이었다.
“시스템상으로 사람이 지나가서 반대편 플라스틱 문을 딱 여는 순간.”
탁!
활짝 열렸던 유리문이 다시 굳건히 닫혔다.
“어때요?”
“시스템상으로는 완벽하네요. 그런데 지금보다 출입하는 속도가 조금 느려지지 않을까요?”
“그래도 사람이 직접 검표하면서 관중들을 입장시키는 것보다는 훨씬 빠르죠. 게다가 이 사람들이 왔다갔다하는 것까지 생각한다면 더더욱 비용은 줄어들거고요.”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자 글라이드 파크와 이어진 100미터 정도 되어보이는 다리가 눈 앞에 나타났다.
다리는 글라이드 파크의 지붕과 같은 모양의 구조물과 유리로 덮여있었다.
“창문이 없어서 답답하기는 하네요.”
“그래서 위에 벤틸레이션을 만들어놨죠.”
다리를 건너가자 비어있는 매장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여기는 매점들이 들어오나봐요?”
“그럴 예정이죠.”
그렇게 답하는 다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마치 무슨 문제라도 있는 사람처럼 말이다.
“매점에서 속이라도 썩여요?”
“네. 배려가 당연한 권리인 줄 아는 사람들이 있어서요.”
< 148화 - 배려는 배려일 뿐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