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2) >
메이저리그에 새로운 너클볼러가 나타났다!
이 소식은 금세 미 전역으로 퍼졌다.
너클볼러는 파이어볼러들만큼이나 굉장한 마력이 있는 이름이다.
빨리, 더 빨리!
회전을 더 많이!
더 묵직한 공을!
위와 같은 슬로건을 외치는 대부분의 투수들과는 다르게
회전은 최대한 적게
변화는 최대한 많게
느려도 상관없다
를 외치는 이단아.
중력을 거부하는 듯한 현란한 무브먼트의 공은 그걸 지켜보는 관객들과 시청자들의 마음을 훔치곤 했다.
‘이번 공은 또 어디로 휘어질까?’
‘저 타자가 놀랄만한 방향으로 갑자기 꺾이진 않을까?’
이런 기대감을 가지게 하는 공이 바로 너클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사무국에서도 제이콥스의 등판일에 대해 촉각을 세우고있었다.
[제이콥스의 등판일이 정해졌어]
“네. 오시게요?”
[가긴 뭘가. 매치 오브 더 데이로 선정해야하니까.]
‘매치 오브 더 데이’는 MLB TV에서 그 날 하루 무료로 중계를 해주는 경기를 말한다. 결제하지 않아도 레이스 경기가, 제이콥스의 데뷔전을 전 세계 야구 팬들이 볼 수 있다는 말이었다.
“일단은 이번 주 목요일이 유력해요.”
지금은 월요일.
삼 일 뒤다.
[로테이션 상 내일 등판 가능한거 아냐?]
“그렇긴 하죠. 하지만 지금은 원정이잖아요. 그것도 양키스 원정요.”
다른 경기도 아니고 데뷔전이다. 그런 데뷔전을 양키스 원정에서 한다고?
필리스 원정만큼 지랄맞지는 않지만, 그래도 적을 응원하는 수많은 팬들이 널려있는 양키스타디움에서 데뷔를 한다고? 다운은 차마 제이콥스에게 그런 못된 짓을 할 수 없었다.
“목요일에 에인절스와의 홈 경기에 선발로 나갈겁니다.”
[오케이. 그럼 목요일 매치를 바꿔야겠네. 수고해.]
“롭도 수고하세요.”
만프레드와의 통화를 끝낸 다운은 원정팀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그러니까 너는 너클즈가 던질때 손끝을 본단 말이지?”
너클즈는 제이콥스가 라일리 그레거슨과 이름이 같아서 붙은 별명이다.
“네. 제가 그래도 오래 받아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너클즈가 던지는 손을 보면 대강 어디로 공의 탄착군이 형성될지가 보이더라고요.”
“팔 각도는?”
“거의 똑같아요. 그런데 슬라이더 던질때만 팔 돌아나오는게 조금 달라요.”
“그러면 맞을텐데?”
“더블 A까지는 통했어요. 트리플 A 경기부터는 때려내는 타자들이 생기더라고요.”
“다들 눈으로 먹고 사는 타자들이니까 그 정도는 구분해낼 수 있지. 그럼 슬라이더는 되도록 보여주는 용으로 써.아껴뒀다가 볼이 되도록 해서 삼진을 잡는 용으로 말이야. 볼로 가는 가는 공은 또 제구가 어느정도 된다며?”
“정확히는 몸 쪽이 아니라 선수가 있는 반대편으로 가는 공은 제구가 되더라고요.”
“그럼 좌타자 바깥쪽으로 흘러가는 슬라이더는 제구가 되겠네? 우타자 상대로 던질 수 있는 체인지업이 안되는게 조금 아쉽네.”
“던질 수는 있어요. 그런데 완성도가 떨어져서 그런거지.”
“그러면 슬라이더는 백도어 식으로 쓰는게 좋을 것 같아. 한 타석 돌때까지는 결정구로 쓰고, 그 다음 타석들 부터는 네가 잘 생각해서 섞어서 써.”
저 두 사람은 이틀 전부터 계속해서 너클즈를 분석하고 있었다.
“알렉스 너클즈 좀 빌려갈게요.”
윌슨은 어깨를 으쓱하며 얼마든지 그러라는 것을 표현했다. 다운의 손짓에 제이콥스가 따라들어왔다.
“앉아봐.”
“넵!”
아직까지 루키라 그런지 단장을 대하는 것이 무서운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편하게 있어 편하게.”
“넵!”
아무래도 완벽하게 편하게는 안될 것 같다.
“네 데뷔전이 결정됐어.”
“정말요?”
오늘은 4선발인 슈어홀츠가 등판한다. 그리고 내일은 오프너가 등판하는 날.
“수요일부터 이어지는 에인절스와의 홈 4연전에서 두 번째 경기에 널 내세울거야.”
원래 계획은 첫 경기에 그를 세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일 있을 경기는 오프너가 등판하는 날. 필연적으로 불펜의 소모가 많아질 수 밖에 없는 날이었다.
‘데뷔전을 치르는 투수를 믿을 수는 없지.’
메이저리그 데뷔전에서 흔들리지 않고, 평소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에 불과했다. 지금 저렇게 잘하고 있는 파인트조차도 메이저리그 첫 경기에서는 4.2이닝 6자책점을 떠안고 무너져내렸다.
투수들이 그렇게 무너지는 이유 대부분은 오버페이스다.
보통 루키 투수가 올라오면 3회까지는 잘 막아낸다. 타자들이 그간 메이저리그에서 상대하지 못했던 투수기에 정보가 없어서이다.
그들이 잘 던져서가 아니라 빅리그 타자들이 공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첫 타석에서 제대로 못치는 것인데, 그걸 모르는 애송이들은 신나서 공을 뿌려댄다. 그러다가 한 타석이 돌고 난 두 번째 타석부터 얻어터져 나가는 것이다.
얻어맞으니까 힘이 더 들어가고, 체력은 더 빨리 소진되고, 쓸데없이 들어간 힘 때문에 실투는 더 많아진다. 그렇게 첫 데뷔전이 패전이 되는 것이다.
너클즈도 마찬가지다.
너클볼러는 체력소모가 덜하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클볼러가 힘이 들어가면 더 위험하다. 쓸데없는 힘이 들어가는 순간, 너클볼에 회전이 들어갈테고, 그러면 너클볼은 그저 치기 좋은 배팅볼로 변환될테니까.
너클즈가 무너질 경우를 대비해서 출격할 수 있는 불펜이 필요했다. 그래서 다운은 가장 믿을 수 있는 파인트의 등판 다음날로 그의 데뷔전을 잡은 것이다. 올 시즌에도 평균적으로 7이닝 이상을 던져주었던 파인트라면, 불펜을 최대한 쉬게 해줄테니까.
“언제죠?”
너클즈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난다. 마치 보석과도 같은 저 눈빛을 혼자 보고 싶어서 데뷔전을 따로 통보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사흘 뒤 목요일이야.”
“드디어······.”
드디어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격하는 너클즈를 위해 잠시 기다려주었다.
“너클볼러이니만큼 당연히 선발로 나설거고, 네가 원한다면 그 날 포수는 네가 원하는 대로 맞춰줄 수 있어.”
“제시. 무조건 제시요.”
“그럴 줄 알았어. 그럼 그 날 선발 마스크는 제시가 함께 쓸거야. 그리고 그 날 행사는 꽤 클 예정이야. 현존하는 모든 너클볼러들이 새로운 너클볼러의 탄생을 지켜보기 위해서 올테니까.”
“알고있어요.”
애초에 저걸 요구한게 너클즈였다. 너클볼러들이 있는 단톡방에 있는 투수 중에서 새로운 너클볼러가 메이저리그 데뷔하는 경기는 모두 가서 응원해주는 전통이 있다고 했다.
현재 살아있는, 은퇴한 너클볼러는 총 여섯 명. 그 여섯 명은 구단이 준비한 좌석에서 경기를 관람할 예정이었다.
“디키에게 시구한다고 했던거 기억하냐고 물어봐줘.”
너클즈의 스승이나 다름없는 R.A. 디키는 예전에 그의 데뷔전에서 시구를 하고싶다고 한 적이 있었다. 다운은 그걸 기억해 끄집어 낸 것이다.
“당연히 기억하죠. 얼마전에도 스케줄 다 비워놨는데 언제 데뷔전 하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좋아. 그러면 시구자는 정해졌고. 부모님은? 당연히 오시지?”
“네.”
“조금 있다가 연락드리고, 몇 분이 오시는지 알려줘. 구단에서 최대 10자리까지는 마련해줄 수 있어. 비행기 티켓도 물론이고. 숙소까지도 마련해드릴 수 있어.”
이제 막 콜업된 너클즈는 당연히 레이스에 집이 없었다. 그래서 구단이 임시로 제공해주는 호텔 생활을 하고 있는데, 이 호텔에 가족들을 묵게 해줄 생각이다.
“물어본 다음에 바로 말씀드릴게요!”
“오케이. 데뷔전 정해졌다고 신나가지고 나다니다가 다치지 말고, 조심해. 데뷔전 통보 받고 날뛰다가 다치는 놈들 수두룩하게 봤어.”
“조심! 또 조심할게요!”
“그래. 그럼 가서 제시 좀 불러와.”
“넵!”
활기찬 표정의 너클즈가 나가고 곧이어 톰슨이 다운이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저도 데뷔전인가요?”
“너클즈가 말했어?”
“안들어도 쟤 표정 보면 딱 무슨 이야기 들었는지 감이 오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래서 언제인가요?”
“목요일.”
“사흘 뒤네요.”
잔뜩 흥분하던 너클즈와는 다르게 톰슨은 아주 차분했다.
“에인절스겠네요. 목요일이면 순서상 선발은 개럿 홈즈일거고······. 최근에 에인절스 타선이······.”
차분하다 못해 벌써부터 분석을 하고 앉아있다.
“그건 일단 넣어두고, 가족들은 몇 자리 필요해?”
톰슨의 집은 클리어워터에 있다. 탬파베이 권역에 속한 지역이니만큼 숙식이나 비행기표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근처에 가족들이 있다고 한 것 같은데?’
다운이 알기로는 톰슨의 가족들은 꽤 대가족이었다. 클리어워터 지역에만 친가와 외가 모두 있었고, 이모네 가족도 탬파에 거주하는걸로 알고 있었다. 그것만 따져도 10명이 넘어간다.
그런데 톰슨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부모님 자리 정도면 될 것 같은데요?”
라고 말했다.
“할아버지나 할머니들도 오지 않아?”
“오기야 할 것 같은데, 굳이 부를 필요 있을까요?”
이건 좋지 않다.
표정부터 느낌까지 좋은게 하나도 없다. 다운은 이런 말을 하는, 그리고 이런 분위기를 풍기는 선수들이 어떤 이유로 이렇게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감 부족과 죄책감.’
데뷔전이라는 엄청난 경기지만, 톰슨은 자신의 실력이 부족하다는걸 알고 있었다. 그의 콜업은 단계를 밟은 것이 아니라 너클즈의 전담포수로 딸려온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죄책감 역시 그래서 발생한 것이다. 여기에서야 그런 말이 오가지 않겠지만, 만약 트리플 A 정도로만 내려가도 팀원들에게 자격이 되지 않는 사람이 편법을 이용해서 자리를 차지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먹을거다.
저런 대우를 받으면 ‘뭐 어쩌라고? 니들이 잘하던가?’라고 반응하는 선수가 있는 반면, ‘미안. 내가 운이 좀 좋았어서.’라며 미안해하는 선수가 있다. 그리고 톰슨의 반응을 보니 그는 후자인 것 같다.
‘매일 윌슨에게서 뭔가를 뽑아내려고 하는것도 그걸 조금이라도 덜기 위한 일환이겠지.’
내 능력이 여기 있어도 될 정도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증명하기 위해서 톰슨은 저런 노력을 하는 것이다.
‘아쉽지만 해줄 수 있는게 별로 없네.’
이런 상황에서 잘하지도 못하는데 어설프게 ‘넌 할 수 있어. 자신감을 가져!’라고 해봤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걸 경험상 알고 있었다.
이럴때는 의례적인 말을 해주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이봐 제시. 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일단은 네 생에 다시 오지 않을 메이저리그 데뷔전이야.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 것보다는 그냥 경기를 즐겨. 빅리그에서 뛰는 네 모습. 한 번쯤은 상상해봤을 거잖아. 아냐?”
다운의 말에 톰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봤죠.”
“나도 해봤는데 네가 안해봤겠어?”
다운의 말에 톰슨의 눈이 커졌다.
“단장님도요?”
“왜이래? 나 대학떄까지 야구했었어. 한때는 메이저리거가 꿈이었지. 물론 부상 때문에 접었지만.”
“아······.”
“네 남은 커리어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다시 없을 데뷔전이잖아 그치? 나 같은 사람은 꿈만 꾸던 빅리그 데뷔전 말이야. 가족들도 다 초대하고, 즐거운 축제처럼 즐겨봐.”
다운의 이야기에 톰슨이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족들에게는 내가 따로 전화해서 물어볼게. 그러니 너클즈랑 경기를 즐길 생각만 해.”
“네.”
상반된 성격의 이 두 애송이가 펼치는 데뷔전이 어떻게 될지 기대된다.
< 144화 -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온다(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