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 마지막 인사 >
올스타전은 전 세계 야구 팬들의 축제나 다름없었다.
예전에는 그래도 승리하는 리그에 홈 어드밴티지를 주는 등의 보상이 있어서 선수들이 조금 더 동기부여된 상태로 뛰었다. 하지만 그런 보상이 없어진 요즘은 선수들도 경기장에서 즐기곤 했다.
“헤이 맨! 너무 깔끔하게 친거 아냐?”
“적당히 치라고 던져주는데 이 정도는 쳐줘야지. 첫 번째 공이었으면 못쳤다니까?”
선수들이 하는 대화는 중계를 통해 나가는 건 물론이거니와
“마이크? 진짜 팬이에요. 사진 한 번 가능할까요?”
“정말? 나도 네 팬이야 사무엘.”
“심판님. 부탁드려도 될까요?”
“다리 길어보이게 찍어줘?”
찰칵!
타석에서 하라는 타격은 안하고, 서로 팬이라며, 선수들이 셀카를 찍는 모습도 흔히 찾아볼 수 있었다.
이런 축제의 장에서 웃지 못하는, 웃어도 웃는게 아닌 선수가 하나 있었다.
“멜튼. 왜 이렇게 표정이 안좋아. 괜찮은거 맞아?”
마이너부터 오랜시간 함께해왔던 더지는 록하트의 가면을 금세 알아차리고 옆에 붙어왔다.
‘이제 이것도 끝이겠구나.’
며칠이 지나면 더 이상 더지와는 한 팀에서 뛰지 못한다.
자신을 알아주던 친구와 함께 뛰는 것도 이게 마지막일 것이다.
“진짜 괜찮아.”
“누가봐도 안괜찮은 것 같은데.”
“아냐. 진짜 괜찮다니까. 너 이제 등판 아냐?”
록하트는 선발 출장을 한 뒤 이미 교체되어 들어온 상태다. 반면에 더지는 4회 등판이 예정되어있었다.
“이제 올라가야지.”
“그럼 나 신경쓰지말고, 부상 안 당하게 피칭할 생각이나 해. 나 화장실 좀 갔다올게.”
화장실에 들어온 록하트는 곧바로 좌변기칸 문을 열고 들어갔다.
철컹
문을 잠그고 챙겨온 노이즈캔슬링 이어폰을 끼자 혼자만의 세계에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이제서야 얼굴에 쓰고 있던 가면을 벗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록하트는 한껏 죄고 있던 얼굴 근육을 탁 풀었다. 그러자 둑으로 막혀있던 생각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기분이 너무 이상해.’
정리하기도 힘든 수많은 생각의 파도가 몰려들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은 어제 저녁 있었던 다운과의 대화 때문이었다.
분명 시작은 즐거웠다.
“와! 진짜 끝내준다! 이것 봐 멜튼!”
평소에는 피규어떼기에 전혀 관심이 없는 더지가 흥분해서 소리칠 정도로 글라이드가 만들어온 피규어는 끝내줬다.
왼쪽부터
배트를 어깨에 걸친채 살짝 턱을 들고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드링크워터.
그 옆에서 멋들어진 수염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토머슨.
앞으로 배트를 쭉 뻗은 채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하고 있는 브래넌.
토머슨과 브래넌의 앞에서 불량한자세로 쪼그리고 앉아있는 드레이크.
포수 장비를 차고 드레이크의 옆에 쪼그려앉아 웃고있는 비어만.
그 뒤에는 사인을 받을 때의 시그니처 포즈를 취하고 있는 파인트.
왼손으로 야구공을 굴리고 있는 더지.
그런 더지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는 자신까지.
8인의 올스타가 한데 모여있는, 세상에 단 10개 밖에 없는 피규어는 마음에 쏙 들었다.
“배리처럼 저도 멋지게 포즈 취하게 해주지 그랬어요?”
물론 아쉬워하는 드레이크 같은 선수도 있긴했다만 그조차도 아쉬움 정도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
“다들 마음에 들어한다니 다행이구만! 그리고 이건 우리 구단 최초의 8인 올스타를 이룬 너희들에게 주는 내 마음이야.”
얇지만, 1만 달러짜리의 수표가 담겨있는 봉투는 마음을 푸근하게 만들어줬다.
“올스타전은 이벤트전이야. 재밌게 즐기고, 절대. 절! 대! 부상당할 만한 일은 만들지 말자. 특히 네이트! 너 지난 시즌 올스타전때 일어난 일 알지?”
“알고있어요. 조심할게요. 아니, 근데 왜 저한테만 그래요?”
“넌 올스타전이 처음이잖아.”
“샘도 처음인데요?”
“샘은 너처럼 덜렁거리지 않지.”
“쳇!”
다운이 주의사항에 대해 이야기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기분은 좋았다.
“아, 그리고 코디랑 멜튼은 잠깐 나 좀 보자.”
이때부터가 시작이었다.
드링크워터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팀으로 갑니까?”
그의 말에 록하트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올 시즌부터 트레이드 블락에 올라있다는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운이 자신을 보내는건 7월 마지막의 마지막. 트레이드 데드라인이 임박했을 때일 것이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단이 굴러가는 것을 제대로 알지는 못하지만, 그때가 자신들의 몸값이 제일 높이 올랐을때라는건 알고 있었으니까.
“브레이브스로 갈거야.”
다운의 말에 드링크워터의 표정이 환해졌다.
“좋네요. 아주 좋아요.”
록하트도 드링크워터의 올 시즌 원동력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다저스에 대한 복수.
브레이브스는 페넌트레이스에서도 아직 다저스와의 3연전이 남아있다. 게다가 지난 시즌에도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다저스를 꺾은 장본인. 그들의 전력이라면 이번에도 다저스를 꺾는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근데 거긴 카를로스 앙헬 주니어가 있잖아요?”
“네가 가면서 앙헬 주니어는 3루로 갈거야.”
“저는 1루를 보겠네요.”
“그리고 가끔 외야수를 보게되겠지.”
“제가 간다고 해서 브레이브스 주 전력이 빠진 건 아니죠?”
“유망주 둘 데려왔어.”
“퍼펙트!”
박수를 친 드링크워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주 일어선 다운을 끌어안았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살아날 줄 알고 있었다는 말을 하는건 쉽다. 하지만 정말로 기회를 준 구단은 다운과 레이스였다. 드링크워터 입장에서는 재활을 도와준, 그리고 몸값을 올려준 은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야말로 지금까지 잘해줘서 고맙다. 덕분에 우리 애들도 많이 배울 수 있었고, 우리한테 좋은 선수까지 주고 떠나줘서 너무 고마워. 브레이브스 운영팀장이랑 단장 번호 바로 메시지로 보내줄테니까. 필요한거 있으면 그쪽에다가 바로 말하면 돼. 네 라커는 어떻게 해줄까?”
“라커에 배트랑 남는 외야 글러브 하나밖에 없기는 한데, 따로 애들한테 말해서 나눠주겠습니다.”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한 드링크워터는 다운에게 번호를 받고는 방을 나갔다.
다음은 자신의 차례였다.
“저도 트레이든가요?”
“맞아.”
다운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어디로 가나요? 브레이브스?”
다운은 고개를 좌우러 저었다.
“만약 같은 팀으로 간다면 같이 말해줬겠지. 하지만 아니야. 넌 오리올스로 갈거야.”
“아······.”
아까도 말했지만, 트레이드를 아예 생각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트레이드라는 것이 눈앞에 턱하고 다가오니까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애들이 말한게 이런건가?’
레이스에는 트레이드로 합류한 사람들이 많았다. 비어만과 우드먼은 오리올스에서, 서머스는 타이거스에서, 비어스는 가디언스에서 트레이드되어 왔다. 그 외에도 토머슨, 슈어홀츠와 같은 선수들도 트레이드로 레이스에 들어왔다.
그들 중에서는 토머슨이나 슈어홀츠처럼 트레이드 되어서, 원래 있던 팀을 탈출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 반면 지금 자신처럼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트레이드는 예상했거든? 내가 너무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가끔나가면 잘해. 구단 입장에서는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었겠지. 그래서 집도 정리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어. 그런데 막상 트레이드 된다고 하니까 아무 생각도 안나더라. 지금까지 날 응원해주며 좋아해주고 기다려준 팬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마이너부터 함께해온 동료들이랑 헤어지는 것도 너무 이상했어. 가족과도 같은 사람들이랑 헤어지게되는거잖아? 물론 좋은 일도 있었고, 나쁜 일도 있었지. 그런데 가족이란게 그런거잖아? 어떨때는 죽일듯이 싸우다가도, 또 죽고 못사는 그런 사이. 그런 사람들이랑 헤어져서 새로운 팀으로 가야한다는 사실에 아무 생각도 안나더라.”
서머스가 저런 말을 했을 때 록하트는 웃었다.
“하하! 그건 알이 아는 사람이 너무 없어서 그런거 아니야? 나는 아는 사람 많아서 괜찮을 것 같은데?”
“아냐. 진짜 가봐. 다르다니까?”
“난 절대 괜찮을 것 같아. 야구는 결국 비지니스잖아?”
오산이었다.
‘비지니스는 개뿔!’
그러기에는 마이너리그까지 합해서 총 6년 반 동안의 지난 세월들이, 짧은 자신의 인생에서 25%가량을 차지했던 그 기간들이 너무 길었다.
다운은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해서인지 아예 정지해버린 록하트를 내버려두었다. 몇 분 뒤, 어느정도 생각이 정리된 록하트가 입을 열었다.
“저는······ 비싸게 팔렸나요?”
처음으로 물어보는 질문이 비싸게 팔렸냐라니. 다르게 해석하면 ‘나는 레이스에게 중요한 사람이었습니까?’라고도 받아들일 수 있는 질문이었다.
다운은 록하트의 질문은 있는 그대로 해석하는 대신 후자와 같이 해석했다.
“아주 비싸게 팔렸어. 메이저리그 급 하나, 메이저리그 레디 급 하나, 올해 1라운드에 지명된 선수, 그리고 유망주 하나 더까지. 고작 선수 두 명에 간 코디랑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히 비싸게 팔렸어. 그렇지 않았다면 난 내년 트레이드 마감시한까지도 널 데리고 있었을지도 몰라.”
다운의 말에 쳐져있던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며 올라왔다.
“그거 다행이네요.”
다운은 애써 웃으며 말하는 록하트의 옆으로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동안 잘해줘서 고맙다 멜튼. 오리올스 가서도 건강하게, 그리고 엄청난 활약을 해서 우리 구단이 줄 수 없었던 엄청난 계약을 따내길 진심으로 바랄게.”
“네······.”
“그리고 이건 네 선택에 달려있는건데, 올스타 위크가 끝나고 우리 스케줄 기억나?”
이제 자신과는 상관없는 스케줄을 물어보는 다운이 의아했지만, 록하트는 순순히 기억하는 것을 말했다.
“홈경기였지 않아요?”
“맞아. 상대가 오리올스야.”
“아······.”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트레이드 된 직후에 바로 친정팀의 홈 경기라니.
“그래도 네가 우리 구단의 핵심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잖아. 그리고 내가 알기로 네가 우리 구단에 가지는 애정도 꽤 큰 편이고. 그래서말인데, 시리즈 첫 경기에 마지막으로 레이스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할 기회가 있는데. 어떻게 할래?”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이 있을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게 되는거에요?”
“물론 모든 경기를 뛰지는 않을거야. 딱 수비 한 이닝. 한 타석만 소화할 예정이야. 그리고 바로 교체. 안타를 쳐도 대주자로 교체 될 예정이야. 그래서 오리올스도 허락을 해줬고. 사실 오리올스가 허락하지 않더라도, 네가 원했으면 내가 트레이드를 늦춰서라도 해줬을거야.”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다운이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인물이었다.
“어떻게 할래?”
“생각 좀 해봐도 되나요?”
“얼마든지.”
여기까지가 어제 있었던 일이다.
‘팬들이 내가 마지막 인사를 하는걸 좋아할까?’
‘오리올스에서 싫어하지는 않을까?’
‘레이스 마지막 경기에서는 잘하고, 오리올스 경기에서 못하면 어떡하지? 그러면 욕먹으려나?’
‘그 반대는? 레이스 팬들이 야유를 퍼부을까?’
머리가 복잡하다.
적어도 내일 아침까지는 이야기해줘야 다운도, 그리고 오리올스도 이후 계획을 짤 수 있을테니까.
쾅쾅쾅!
문을 부술듯한 노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쾅쾅쾅!
“어이 멜튼!”
브래넌의 목소리다.
“고민이 많을거다. 그래도 머리 비워. 타석에서 고민을 많이하는 타자는 결국 아웃될 뿐이야. 어디에서 하든 야구는 야구일 뿐이야. 아무 생각하지 마.”
“그게 잘 안된다면요?”
“어쩔 수 있나. 내비둬야지.”
어이없는 답에 실소가 터져나왔다.
“푸흡! 그게 뭡니까?”
“내 마음대로 모든게 되면 그게 인생이겠어?”
록하트는 이어폰을 넣은 뒤 화장실 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피식 웃고있는 듬직한 브래넌을 포함해서
“똥 다 쌌냐?”
“눈시울이 벌건 것 같은데?”
“운거 아니지?”
“내가 말했잖아. 멜튼 은근히 감성적이라니까?”
“괜찮지?”
“나도 떠나는데 왜 너만 죽상이냐?”
같이 온 레이스 팀원들이 있었다.
“세상 그 어떤 구단도, 트레이드로 떠나는 선수에게 팬들에게 인사할 기회를 주지 않아.”
맞는 말이다. 구단을 대표하는 레전드라면 모를까, 트레이드로 떠날 선수에게 그런 대우를 해주는 구단은 없었다.
“팬들에게 인사도 할 겸 우리랑 제대로 마지막으로 한 이닝 뛰자. 나머진 그 뒤에 생각해.”
< 138화 - 마지막 인사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