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 거절할 수 없는 제안 >
이름과 비슷한 붉은 머릿결을 가진 매력적인 외모의 여자.
“스칼렛?”
머릿결과 얼굴이 아니었다면, 아니 얼굴마저도 그저께 밤에 봤던 스칼렛과는 동일인물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평소에 입고 다니는 캐주얼 정장이 아닌 저런 드레스라니!
자신의 변신한 모습에 얼떨떨해하는 다운의 표정을 본 패닝턴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옆에 앉았다.
“왜 좀 달라보여요?”
“오늘 좀 많이 다른데? 오늘 만약 처음 본 사이였으면 넘어갔을수도 있을 것 같아.”
“그 말은 오늘도 안넘어오겠다는거네요?”
“아마도?”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로 두 개 구단 소유한 가족이 될 수 있었는데 아깝네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전혀 아쉬운 표정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다운도 편한 마음으로 그녀의 농담을 받아줄 수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조금 땡기네. 넘어갈까?”
“됐네요.”
그녀는 11이락도 적힌 팻말은 테이블에 놓았다.
“스테이크?”
“아뇨. 색이 다르잖아요. 제껀 샐러드에요.”
“샐러드로 되겠어?”
며칠전 이미 그녀의 어마무시한 식성을 확인한 다음이라 샐러드로 만족할 수 있다는 거짓말은 믿어줄 수가 없었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먹었거든요. 샐러드로 위를 좀 긴장시킨 다음에 천천히 먹어야죠.”
“코스요리처럼?”
“코스요리처럼요.”
“난 또 여기와서 식성으로 내숭떠시나 싶었지.”
“오늘 여기 주최자가 저희 할아버지라고 했잖아요. 그리고 오늘의 스테이크 셰프는 할아버지가 정말 인정하고 아끼는 셰프거든요. 그가 구운 스테이크를 못먹는다는건 오늘 이 자리에서 식사를 하지 못했다는 것과 다름없어요. 저는 오늘 적어도 다섯 번은 먹으러 갈거에요.”
미식가를 자처하는 그녀가 다섯 번을 먹는단다. 그렇다는건 맛은 보장되었다는 말이다.
“나도 빠르게 먹어야겠네.”
“아직 줄이 길지 않으니까 적어도 세 번은 더 가야돼요.”
때마침 그녀가 시킨 샐러드와 다운이 시킨 스테이크가 나왔다.
“하······. 이 향기. 빨리 먹어야겠다.”
스테이크가 풍기는 진한 향기를 맡은 그녀가 전투적으로 샐러드를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다운도 그런 그녀를 보며 스테이크를 썰었다.
‘첫 조각은 역시.”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순수한 고기 그대로 먹는 것이 매너다.
슥슥슥
칼질에 따라 부드럽게 썰어진 고기가 붉은 속살을 내비쳤다.
촤악!
고기를 씹자마자 육즙이 입안 가득 퍼져나갔다.
“와······.”
그새 샐러드를 비운 스칼렛은 다운의 반응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바라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갔다올게요.”
“이왕이면 내 것도 하나 더 시켜줘. 부위는 채끝만 빼고.”
“알겠어요.”
다섯 번 먹어도 질리지 않을 맛이다.
“와 진짜······.”
다운이 감탄사를 내뱉으며 부지런히 혀를 만족시키고 있을때 익숙한 얼굴이 테이블로 찾아왔다.
똑똑
정중히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에 다운의 고개가 들렸다.
“내가 식사를 방해한 건 아니지?”
오리올스 단장인 존 앙헬로스다.
“살짝 방해되긴 한 것 같아요.”
“그 부분은 미안하게 생각해. 나도 저 셰프의 실력을 알거든. 도저히 포기하지 못할만큼 맛이 엄청나지.”
그걸 알면서도 지금 이 식사를 방해하는 거냐는 듯한 다운의 눈빛에 앙헬로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미안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도저히 이야기를 할 틈이 안날 것 같았거든. 저기 저 여자애들 보이지?”
앙헬로스가 가리킨 곳에는 깔끔하게 차려입은 여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글라이드가 말했던 여자들도 사이사이에 끼어있었다. 그들 사이에서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모두 이쪽을 흘끗거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네 식사가 끝나면 쟤들이 널 잡아먹으러 올거야. 그리고 난 저 사이에서 치이고 싶지 않거든. 그러니 잠시만 시간을 내줘. 절대로 너한테 안좋은 이야기는 아니야.”
“이미 제 스테이크에는 좋지 못한데요?”
“장담컨대 조금 식어도 그 맛은 그대로일거야. 심지어 따뜻할 때는 느껴볼 수 없었던 맛을 함께 느낄 수 있지. 그 옆에 있는 가니쉬들과 함께한다면 더더욱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을거고.”
“음식가지고 장난치는거 아니죠?”
“절대. 내가 만약 장난치는거면 당장 오리올스 단장직을 때려치겠어.”
그 정도 각오라면야.
다운은 들고있던 식기를 내려놓은 뒤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좋아요. 무슨 일이죠?”
“메이슨 스탠하우스.”
포커페이스로 유명한 다운의 얼굴이 순간 깨졌다.
이미 깨진 표정을 수습하는건 하수들이나 하는 짓. 다운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저희 팀이 데려가려고 했던 놈을 데려가서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겁니까?”
“워워! 진정해. 그런거 아니니까.”
“그럼 지금 여기서 스탠하우스의 이름을 언급하는 저의가 뭡니까?”
‘나 지금 기분 안좋다.’라는 분위기를 풀풀 날리는 다운에게 앙헬로스가 작은 종이 한 장을 슬며시 내밀었다.
“이게 뭐죠.”
“열어봐.”
운영파트
웨인 헤네시
매일같이 보는 익숙한 이름이다.
“원래 우리는 스탠하우스를 뽑을 생각이 아니었어. 북동부 스카우트가 추천하긴 했지만, 그보다 좋은 선수가 널렸다고 생각했거든. 특히나 너희가 뽑은 래리 코튼은 정말 뽑고싶은 친구였어.”
“그런데요?”
다운의 말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하지만 앙헬로스는 이에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저 친구한테 연락이 온거야. 레이스가 노리는 선수에 대한 정보가 있다는거야. 거기다 ‘다운이 첫 번째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뽑았을 선수.’라는 말까지 하더라고? 거기에서 넘어갔지.”
“그걸 믿으라는겁니까?”
“못믿겠으면 얼마든지 내역을 보여줄 수 있어. 저 친구 나름 폰 명의를 숨기고, 차명계좌로 받는 등의 노력을 하긴 했거든? 그런데 돈만 있으면 저런 아마추어들이 숨긴 정보 따윈 금세 알아낼 수 있지. 내가 원하는대로 일이 풀리지 않더라도 이야기가 끝난 후 이에 관한 정보는 모두 넘겨주도록하지. 내 호의야.”
“대가없는 호의는 없는 법이라고 배웠는데요.”
“누군지 몰라도 잘 배웠네. 그러니 이번 딜을 좀 생각해달라는거야.”
“딜?”
그가 제안할 딜이라면 트레이드 밖에 없을 것이다.
“메이슨 스탠하우스. 원하지?”
“그야 당연하죠.”
저쪽에서 내가 원하는 패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데 숨기는건 불필요한 일이다.
“전체 1번 지명권이 있었다면 그를 지명할거라는 말은 괜히 한 말이 아니거든요.”
“좋아. 메이슨 스탠하우스와 애드리안 카스트로를 줄게.”
애드리안 카스트로는 서비스타임 3년차에 있는 선수로 오리올스의 1루를 맡고있는 선수다.
센터라인이 정해져있는 오리올스라서 1루로 밀렸지만, 기본적으로는 유격수로 길러졌고, 내야 전반을 소화할 수 있는 선수였다.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는 말이다.
‘키가 203cm였나?’
카스트로는 현존하는 내야수들 가운데 가장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큰 키와 건장한 체격에서 나오는 타구속도는 엄청났다. 홈런왕 경쟁을 하는 선수들의 평균 타구속도가 93마일 전후. 레이스에서 가장 힘이 좋다는 브래넌과 비어스의 평균 타구속도가 각각 93.2마일, 94.5마일이었다.
그런데 카스트로는 툭 치는 것 같은데도 미사일 같은 타구를 만들어낸다. 그의 지난 시즌 평균 타구속도는 94.9마일. 거의 95마일에 근접한 기록이다.
그가 가진 문제는 두 개.
첫 번째.
95마일에 가까운 타구속도를 자랑하는 타구의 90% 가량이 5도 미만의 발사각을 기록했다.
지난 시즌의 기록이긴 하지만, 올 시즌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힘은 좋은데 타구를 띄우질 못해서 범타나 안타 정도를 만들어내는 것이 전부였다. 그 엄청난 타구속도를 가지고도 장타율 6할이 안됐다.
두 번째.
부상위험성이다.
빅 사이즈 내야수들이 다들 그렇듯이, 카스트로의 큰 키에서 오는 부상위험성은 다른 내야수들에 비해 매우 컸다. 190cm대의 내야수들도 너무 크다며 코너로 쫓겨나는게 일상다반사다. 그랬는데도 이래저래 부상이 많았다.
자주 숙여야하는 내야 수비의 특성상, 계속해서 거구를 숙이고, 역동작을 하는 등의 행동들이 몸에 엄청난 부하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오리올스의 주전 1루수를 맡고 있었다.
왜?
그가 가진 파워가 너무 매력적이었으니까.
이번 시즌 초반 카스트로는 엄청난 진기록을 세웠다.
4월 한 달 간 때린 안타를 모두 홈런을 만들어낸 것이다.
물론 고작해봐야 여덟 개에 불과했고, 4월간 최다 삼진 기록이라는 불명예도 함께 안았다. 하지만 공을 띄우기만 하면 장타가 터진다는 것을 보란듯이 증명하는데에는 성공한 것이다.
덕분에 곧죽어도 ‘파워! 홈런!’을 외치는 앙헬로스 가문의 비호를 받고 주전 1루수로 있었던 것이고.
뭐 어찌됐건 그들이 저 둘을 미끼로 내세우려는 이유는 뻔했다.
“원하는게 멜튼입니까?”
바로 록하트를 원하는 것이다.
“맞아. 멜튼 록하트를 줘.”
현재 오리올스 라인업에서 구멍이라고 불릴만한 포지션은 1루와 불펜이다.
엄청난 파워에 준수한 수비력을 지니고 있지만 1할을 간신히 넘기는 타율은 타선의 흐름을 번번히 끊어먹곤 했다. 오리올스가 더 좋은 흐름을 타기 위해서는 그를 대체할 수 있는 타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록하트는 거기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퍼즐이었다.
“멜튼을 영입해서 3루를 메우고, 기존에 3루수를 맡고 있던 더니든을 1루로 보내시겠네요.”
갭 플레이어로 2+1년 계약으로 오리올스에 입단한 더니든은 올 시즌 3루수를 맡아 좋은 활약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3루수로 뛰기에는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바로 어깨가 약하다는 것이었다.
어깨가 약하다보니 바운드 송구는 물론이고, 잡아야 할 주자를 못잡는 경우가 점점 쌓였다. 어느 누가 보더라도 그게 엄청난 스트레스가 되었을 것이라는건 알 수 있을 것이다. 시즌 초반에는 좋던 타격이 점차 내려가기 시작한 것도 수비 때문일 것이었다.
만약 록하트가 오리올스로 간다면 3루는 록하트가 맡고, 기존에 3루를 맡고 있던 더니든은 수비부담이 덜한 1루를 맡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오리올스로는 더할나위 없는 타선을 가질 수 있을 것이고.
“올해에 바로 승부수를 띄우시려는 겁니까?”
“내가 생각하는 야구는 흐름이야. 그리고 이 흐름을 타지 못하면 아무리 내가 계획한 승부수가 좋다고 하더라도 우승을 따낼 순 없어. 세상 모든게 계획대로 돌아가는건 아니거든. 그러니 기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조금 더 완벽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할 일 아니겠어?”
말이야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심각한 걸림돌이 있었다.
“우리가 함께 타이틀 경쟁하는 사이인 건 아시죠?”
바로 레이스와 오리올스가 같은 지구라는 것 말이다.
양키스가 제 2의 제국을 꿈꾸며 언제나 우승경쟁을 할 것이다. 와일드카드 팀이 네 팀까지 늘어남에 따라, 세 자리가 배정될 수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지구당 한 자리 정도를 더 노리는 것이 정석이다. 만약 록하트가 오리올스로 넘어가게 된다면 레이스는 강력한 경쟁자 하나를 더 만들게 되는 것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손으로 말이다.
게다가 록하트의 계약기간은 아직 1년 반이 남았다. 다운이 생각하는 승부의 해가 내년이라는걸 감안했을 때, 오리올스는 저 강력한 타선을 적어도 내년까지 유지할 확률이 높았다.
아무리 오는 대가가 좋아도, 주저할 수 밖에 없는 이유였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앙헬로스는 몸을 한 층 앞으로 숙였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처음이자 마지막 파이어세일이야. 메이슨 스탠하우스, 애드리안 카스트로, 여기에 40인 로스터에 들어있는 선수 밖에서 그 어떤 선수라도 둘 더 내주지. 내가 줬던 내부자 거래정보까지 포함하면 절대 네가 손해보는 제안은 아닐꺼라고 생각하는데······.”
앙헬로스의 얼굴에 대부의 한 장면이 겹쳐 보였다.
‘I’m gonna make him an offer he can’t refuse.’
마치 그 장면처럼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 눈 앞에 내밀어졌다.
“유효시간은 오늘 자정까지야. 잘 생각해보라고.”
< 133화 - 거절할 수 없는 제안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