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 올스타 위크(3) >
다운은 지금까지 자고 일어났는데 세상이 달라진 기분을 딱 한 번 느껴본 적 있었다.
그냥 양키스 단장을 맡아서 팀에서 말한 선수들을 방출시켰을 뿐인데, 세상 모든 양키스 팬들한테 미쳤냐고 욕을 먹고 있었다.
그 날 이후로 다시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좋은 기억도 아니었으니 굳이 느끼고 싶은 마음도 없었고.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레이스가 내 구단이 된다고?’
지금까지는 명예회복에 대한 동기부여가 끝이었다. 우승을 이뤄내서 날 버린 양키스를 엿먹이는 것. 구단주인 글라이드와 친분이 있어서 친근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내 구단’이라는 느낌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부터는 달랐다.
이제는 레이스가 ‘내 구단’이라는 생각이 팍팍 들었다.
물론 아직까지 월드시리즈 우승을 해야한다는 과업이 남아있기는 했다. 하지만 다운은 자신이 있었다. 그 정도 자신감도 없이는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다운은 곧바로 짜놨던 계획들을 재확인했다.
- 구장 이전
- 팬 끌어들이기
- 스몰마켓을 벗어나 미들마켓으로 자생할 수 있게 만들기
- 새 구장 이전 전에 팬들 유지
- 글라이드 파크 시대의 메인이 될 선수들 영입하기
- 새로운······.
지난 1년 반 동안 대부분의 계획은 성공했다. 이대로라도 명예회복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내 구단이라면?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난 1년 반 중 가장 아쉬운게 뭐지?”
지난 포스트시즌에서의 탈락?
그건 그럴 수 있었다. 세상 어떤 팀도 부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고, 레이스에는 그 부상이 포스트시즌에 몰아서 터졌을 뿐이었다.
백업을 준비해놓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지난 시즌 레이스의 목표는 포스트시즌 경험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유망주들에게 포스트시즌 경험을 주었다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역시 스탠하우스 놓친게 제일 아쉬워.”
가장 최근에 일어난 일이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리올스에게 스탠하우스를 빼앗긴 것만큼 아쉬운 일은 없었다. 어느모로보나 스탠하우스는 차기 레이스 외야의 핵심이 될 수 있는 선수였으니까.
포수 - 사무엘 비어만
유격수 - 네이선 드레이크
중견수 - 메이슨 스탠하우스
이렇게 이어지는 센터라인만 구축한다면 적어도 이들이 함께 머무는 기간 동안에 센터라인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이번에 데려와야겠어.”
오리올스가 스탠하우스에게서 뭘 본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들려왔던 소문에 의하면 그를 뽑아야한다고 강하게 밀어붙인건 오직 북동부 스카우트 한 명. 수뇌부는 아직 그의 진가를 모른다.
“최대한 모를 때 데려와야 돼.”
스탠하우스의 진가를 알기 시작하면 앙헬로스는 절대로 그를 내놓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스탠하우스를 노린다고 하면 분명 내주지 않으려고 할텐데······.”
오리올스와 레이스는 같은 지구다. 앙헬로스는 분명 다운이 정말로 노리는 것을 내놓지 않으려고 할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스탠하우스는 1라운더라 더더욱 지키려고 할 확률이 높았다.
“대가로 뭘 제안해야할지 감도 안잡히네.”
비어만의 트레이드때랑은 상황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 당시에는 오리올스가 원하는 바가 명확했다.
추후 프런트라인 선발을 맡아줄 수 있는 선발 유망주들.
비어만이 지난 시즌 레이스의 차기 안방마님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긴 하지만, 오리올스 측에서도 크게 배를 아파하지 않았다. 그 당시 받아갔던 바즈와 매닝스는 올 시즌 오리올스의 1, 2선발로 완벽하게 자리를 잡으면서 없어서는 안될 선수들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오리올스가 어떤 선수를 원할지 짐작조차 가질 않았기 때문이다.
“2위라······.”
2위를 달리고 있는 현 상황은 분명 앙헬로스가 예측했던 상황은 아닐 것이다. 지난 시즌까지만해도 탱킹을 하고 있었던 오리올스의 목표가 순식간에 컨텐딩으로 바뀔 이유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하지만 타이밍이 너무 좋았다.
당시 레이스에서 받아간 바즈와 매닝스는 물론이고, 파이어리츠에게 잭 아르무트를 내주면서 받아온 채드 유킬리스와 앤드류 맥칼리스터가 각각 주전 유격수와 주전 중견수에 자리를 잡았다. 게다가 올 시즌을 앞두고 영입한 갭 플레이어들이 너무 잘해주고 있었다.
“앙헬로스도 이 상황이 아직까지는 당황스러울거야.”
코어 유망주들이 주전으로 자리잡는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탱킹 페널티를 피하기 위해서 적당한 수준에서 영입한 갭 플레이어들이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터져줄 줄은 꿈에도 몰랐을거다.
“앙헬로스가 필요한 선수가······.”
그나마 현재 오리올스에서 죽을 쑤고 있는 포지션이 1루수와 불펜진이다. 하지만 이들 중 다운이 줄 수 있는 선수는 없다.
현재 쓸만한 불펜진은 고대로 입원실에 가있는 상황이고, 1루수는 흘로첵이 유일하다.
“재머만 좀 괜찮았어도······.”
기대를 걸고 말린스와의 스왑딜로 영입한 코너 재머는 트리플 A에 와서 고전하고 있었다.
당장에는 드링크워터가 1루 백업까지 봐주고는 있지만, 그가 가고 나면 재머라도 올려 써야했다.
“그렇다고 드링크워터를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고······.”
드링크워터와의 계약에 부득이하게 트레이드 하게 되는 경우 다저스와 맞붙을 수 있는 내셔널리그 팀으로의 트레이드 할 것이 명시되어 있었다.
아메리칸리그 팀인 오리올스로는 보낼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쟤네가 원하는 걸 우리가 들고있지를 않네.”
일단은 저쪽이 컨텐딩인지, 리빌딩을 계속하고 있는지를 확인해야한다. 그래야지 원하는 것을 내줄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저녁에 슬며시 떠봐야겠다.”
어떻게든 떠보면 앙헬로스가 원하는 바가 나올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그의 심중을 읽을 수 있는 찬스가 일찍, 그리고 쉽게 찾아왔다.
***
“하하하! 다운 이것 좀 봐! 너무 잘 나오지 않았어?”
“약간 그런 느낌 들지 않아요? 세상을 구할 8인의 용사!”
“너무 잘 뽑혔다.”
“평생 가보로 간직할게요 구단주님!”
자신들이 멋진 포즈로 모여있는 피규어에 선수들은 굉장히 만족해했다.
“자네들이 만족한다니 다행이구만. 앞으로도 계속 열심히 해주게 하하!”
선수들과의 일정을 마친 다운은 글라이드와 함께 차에 올라탔다.
“여기로 가자.”
다운은 글라이드가 내민 주소를 네비게이션에 넣었다.
“그냥 택시타고 가면 안돼요?”
운전대를 잡은 다운이 불만을 토로했다.
“그런 곳은 택시타고 가는거 아냐.”
“렌트로 차 빌려가는건 괜찮고요?”
“아무 문제없지.”
“운전기사가 있어야 하는 룰은 없나보네요.”
“요즘 운전기사를 쓰는 사람이 더 드물다고 하더구나. 그리고 나한테는 정다운이라는 좋은 운전기사가 있는데 굳이 다른 사람을 고용해야 할 필요는 없지.”
글라이드는 다운의 얌전한 운전이 만족스러운 듯 시트에 몸을 뉘였다.
“그나저나 어제 한 말은 진심이세요?”
“어떤 말? 손주 보고싶다는 말?”
“아니 정말······.”
“내가 너한테 말장난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뭐가 있겠냐?”
하기사. 글라이드가 굳이 다운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우승만 해. 그러면 구단은 네거야.”
“기간은 충분히 줄거죠?”
“5년으로 부족해?”
“중간에 해임만 시키지 마세요.”
“걱정 마. 그럴 일은 없을테니. 그나저나 이번 파티에서 진짜 여자 좀 찾아봐.”
속에 있던걸 다 털어놔서인지 글라이드의 요구가 한층 집요해졌다.
“아니 그놈의 여자 타령은 진짜······.”
“잘 생각해봐. 월드 시리즈 우승, 손주 안아보기 등등. 제니가 못했던걸 내가 여기서 다 하고 올라가야 말해줄거 아냐. 내가 딱 천국 갔는데 제니가 ‘레이스 월드 시리즈 우승은 봤수? 손주는 안아봤고?’라고 물으면 내가 할 말이 없잖아 할 말이! 내가 여기서 살아있는 동안 겪어봐야, ‘내가 우승도 시켰고, 다운이 꼬셔가지고 손주도 보고 다 해봤소!’ 라고 말해볼 수 있을거 아냐?”
“하지만 저희 부모님도 안 쪼으시는걸······.”
“난 부모님 같지 않다 그거냐?”
어제 그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저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어진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아무 말도 하지말고 그냥 오늘 가서 딱 여자들 만나봐. 알겠어?”
“네······.”
다운이 백기투항하자 글라이드는 신이 나서 태블릿을 들어올렸다.
“내가 미리 조사를 좀 해왔지.”
“무슨 조사요?”
“이번 파티에 참가하는 처자들 중에서 참한 처자들에 대한 조사를 좀 해왔지. 네가 지금까지 만나왔던 여자들과 대조해봤을 때, 가장 마음에 들어할만한 친구들로 뽑아봤단다.”
그러고보니 글라이드는 지금까지 다운이 만났던 여자들을 모두 알고 있었다. 간단한 데이트, 원나잇부터 오래 만나왔던 사람까지도 말이다.
“그걸 말하는게 아니었는데.”
술 한잔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던 과거의 자신이 미워지려고 한다.
“좋아요. 어디 한 번 보기나 하자고요.”
“사진은 도착해서 봐. 지금은 운전이나 집중하고. 여기 있는 친구들 전부 너희 부모님과 긴밀한 협의를 거쳐서······.”
“우리 부모님과도 이야기가 다 됐다고요?”
“당연한 말을.”
어쩐지 무대뽀로 들어오시더라니.
다운은 파티장에 도착할때까지 귀에 딱지가 앉을만큼 여자들에 대해 들었다.
“키는 놓고 내리시면 됩니다.”
발렛파킹하는 직원에게 차를 맡긴 두 사람은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사진은 네 폰으로 보내놨다.”
확실히 글라이드는 다운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네 스타일들 아니냐?”
“흠······. 반박할 수가 없네요.”
이걸 좋아해야할지 싫어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다운의 표정에 글라이드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옆구리를 툭툭쳤다.
“그러니 잘해봐. 알겠지?”
“이야기는 해볼게요. 크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파티라면 딱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화려함
하지만 여기 파티장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냥 깔끔하게만 차려입어도 된다더니······.”
격식있는 차림을 한 사람도 있지만, 그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은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었다. 다운을 비롯한 젊은 사람들은 캐주얼하면서도 적당히 깔끔한 옷을 입고 있었다.
“다들 일하다가 와서 의상같은건 신경 쓰지도 않았을게다. 격식은 일이 없는 우리 같은 노친네들이나 차리는거야.”
점점 이런 자리도 현대화 되어가는 것 같았다.
“어차피 구단주들 얼굴 대부분 알고있지 않냐?”
“알기야 하죠.”
“늙은이들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넌 가서 아까 본 그 처자들이랑 이야기나 나누도록 해라. 알겠지?”
“일단 배는 좀 채워야하지 않을까요?”
“오늘 내내 저 영감들이랑 배를 채울텐데 벌써부터 그럴 필요는 없지. 배고프면 저기가서 채우고 움직여.”
“그래야겠네요. 배가 고프면 뇌가 안돌아서요.”
한국인은 역시 밥심 아니겠는가.
글라이드와 찢어진 다운은 곧바로 스테이크 냄새가 풍겨오는 곳으로 향했다. 역시 급이 급이다보니 부위부터 사이드까지 하나하나 설정할 수 있었다. 게다가 옆에는 곁들일 와인까지 추천해주는 소믈리에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드릴까요?”
“채끝부위 미디움레어로요.”
“곁들일 와인 추천해드릴까요?”
“아뇨. 좀 이따가요.”
다운의 주문을 받은 셰프는 8이라고 써져있는 팻말을 건넸다.
“아무 테이블에 앉으셔서 기다리면 저희 직원이 서빙하러 갈겁니다.”
마음같아서는 고기가 구워지는 과정을 보고 싶었다. 눈 앞에서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는 고기를 지켜보는 것만큼 기대감을 끌어올리는 것은 없으니까.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건 없어보일수도 있을 것 같았다.
팻말을 받아든 다운은 근처의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다운이 자리를 잡자마자 누군가가 다운의 테이블로 찾아왔다.
“합석해도 될까요?”
< 132화 - 올스타 위크(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