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 Thank you for your service(2) >
“첫 번째는 뭐 뻔한 사연입니다.”
다섯 살짜리 아들과 세살배기 딸 몰래 전역 일자를 잡아둔 아버지의 사연이다.
아주 흔하면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스테디셀러. 특히나 어쩔줄 몰라하는 어린 아이들의 반응은 지켜보는 사람들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오르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일단 보류하자.”
메모리얼 데이가 속해있는 시리즈 앞의 행사나 시구는 남은 사연들을 위해서 일부러 비워놓았다. 그 중에서 하루 쓰면 될 것 같았다.
“자 더 내놔봐. 스테디셀러를 제일 앞에 배치했다는건 더 좋은 이야기가 있다는 거잖아.”
다운이 하고싶은 말을 거스가 대신했다.
“두 번째는 첫 번째 사연을 살짝 꼬아낸 사연입니다.”
첫 번째 사연은 아이들 몰래 뭔가를 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사연은 당하는 대상이 성인이다.
“어머니가 딸하고 짜고 아버지를 속이는거네?”
“네.”
해외파병에서 돌아와 이제 전역하는 여군이 11살짜리 딸하고 짜고 남편을 속이는 그런 내용이었다.
“딸이 아빠한테 이야기하지 않을까?”
“아무리 떨어져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딸은 어머니와 친한 법이죠. 저도 아버지보다는 할머니랑 더 친했어요.”
홀아버지 밑에서 자란 미키의 말이라 그런지 뭔가 더 신뢰가 가는 느낌이다. 거스는 상처받은 표정으로 미키에게 항의했다.
“아우치! 다음번엔 깜박이 좀 켜고 들어와주겠니?”
“공격할 생각은 없었는데 공격이 된 모양이에요 아버지?”
“내가 죄를 많이 지은 모양이구나. 반성하도록 하마.”
하여간 유쾌한 부녀다.
“이어지는 파병때문에 아버지가 많이 지쳤던 모양이에요. 게다가 요즘엔 유럽에 큰 일도 있었잖아요?”
“그쪽으로 파병갔었대?”
“아뇨. 그래도 같은 군이니까 걱정이 되었겠죠. 아버지가 밤마다 궁상맞게 맥주 한 캔 까면서 엄마 사진 한 번, 레이스 경기 한 번 보는걸 이제 더는 못 지켜보겠다고 썼네요. 하하!”
딸이 참 똑부러지는 것 같았다.
“귀엽네.”
“딸은 어떻게 꼬셨대?”
“뭐 별거 있겠어요? 저 나이대 여자애들이 서먹서먹한 아버지를 위해서 야구 타켓 내밀면서 ‘아빠. 같이 가자.’ 한 마디만 하면 그냥 따라올걸요?”
미키의 말에 거스가 또 한 번 눈을 크게 떴다.
“그거 웬지 예전에 내가 당한 적 있는 방법인 것 같은데? 기분탓이냐?”
“글쎄요?”
거스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미키를 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여튼 재미있는 사연이네요. 마지막 사연은 뭐야?”
“마지막으로······.”
마지막 사연은 조금 무거운 사연이었다. 전역 후 트라우마를 앓았던 아들에 대한 사연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사랑과 도움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하긴 했지만, 이제는 남 앞에 서는게 무서워져버린 아들.
“파병때 얻은 트라우마라······. 어떤 일로 얻은거래?”
“어린 아이가 다가와서 놀아주던 동료가 눈 앞에서 날아갔다더군요.”
“저런······.”
중동쪽 파병이었던 모양이다.
“전역한 뒤에도 끝없는 인간 불신 때문에 엄청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랬겠지······.”
그런게 있다고 머리로는 알고 있더라도, 직접 겪어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다가오는 사람이 모두 테러범처럼 보였을것이다.
“다행히 어떻게든 트라우마를 극복하는데는 성공했다더라고요. 부모님과 형, 조카, 여자친구까지 매일 다가가서 그를 안아주면서 치료했다고 하더라고요. 문제는 그로 인해 생긴 자기 비판이었습니다.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데 까지는 3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고, 예전에 있었던 좋은 몸과 의욕은 사라져버린지 오래였으니까요. 전역 후 연락오던 경호회사나 민간군사기업에서 오던 연락도 끊긴지 오래였죠. 28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자신은 더 이상 사회에서 쓸모없다는 생각을 한답니다.”
“신청한 사람이 누구라고?”
“부모님입니다. 부디 자신의 아들에게 고생했다고. 그리고 너는 이 사회에서 전혀 쓸모없는 존재가 아니라고 격려의 박수를 쳐줬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야기에 회의실이 침묵에 휩쌓였다. 그 고요함을 뚫고 다운이 입을 열었다.
“일단 첫 번째는 시리즈 첫째 날이나 둘쨋 날로 미루자고.”
메모리얼 데이는 시리즈 마지막 날이다.
“남은건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연인데······.”
미키가 먼저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저는 세 번째 사연이 마음에 들어요. 두 번째 사연은 제 어린 날을 생각나게 하지만, 가슴이 먹먹해지는, 도와주고 싶은 사연은 마지막 사연이었어요.”
“나도 마지막 사연에 한표.”
“저도 마지막에 한 표 주겠습니다.”
그렇게 메모리얼 데이에 주인공이 될 사연이 정해졌다.
***
삐비비비비비!
알람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으으으으······.”
댄 프레슬리는 귀를 파고드는 알람을 피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다가 결국 항복하고 몸을 일으켰다.
시계는 고작해야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흐아아아······.”
오늘은 가족들과 함께 야구를 보러가기로 한 날이다. 어제 비록 늦잠을 잤지만 이렇게 이른 시간에 일어나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일어났니 댄?”
“네.”
어머니와 함께 이제는 습관이 된 포옹을 하고난 뒤 냉장고로 향했다.
“어제 몇 시에 잔거야?”
“평소처럼요?”
평소처럼이라면 아침 해가 뜨는 걸 보고 잤다는 말이다.
“일찍 자라니까.”
“잠이 안오던걸요.”
“그래도 어떻게 일어났네.”
“야구 보러가는데 어떻게 안가겠어요.”
시즌 패스라는 미친 상품 하나로 인해서 요즘 레이스의 경기 티켓은 거의 포스트시즌 수준으로 구하기가 힘들었다.
“레이스가 매 경기 거의 매진이라니.”
“말도 안되는 일이지.”
“그러니까요.”
“크리스틴한테 감사하렴.”
7년째 만나며 이제는 거의 가족같은 여자친구, 크리스틴이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양가 가족들을 포함해 여섯 장의 티켓을 구하는데 성공했다.
“크리스틴한테는 항상 고맙죠.”
“말로만 그러지 말고.”
그러면서 조심스레 명함 한 장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웬 레스토랑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이게 뭐에요?”
“아버지가 레스토랑 예약해 두셨다더라. 경기 끝나자마자 가면 될거야. 절대 네가 예뻐서가 아니라, 크리스틴한테 맛있는 것 좀 사먹이라며 주셨어.”
불과 6개월 전만해도 이런 곳에 갈 수 없었던 댄이다. 이게 아버지 나름의 사랑표현이자 응원이라는걸 이제 아는 나이였기에 댄은 웃었다.
“어련하시겠어요.”
“크리스틴이랑은 몇 시에 보기로 했니?”
“아마 두 시 쯤일거에요. 오늘 반차쓴다고 하더라고요. 무슨 경기 본다고 반차까지 쓰는지······”
“다 너랑 다니고 싶어서 그런거지.”
“알아요. 3년 동안 이리저리 못다녔던거 다 풀어줘야죠.”
순식간에 씻고 나온 댄은 차고로 나갔다.
부우우웅!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낡은 머스탱이 아직 죽지않았다는 듯 엔진소리를 울려댔다.
‘이렇게 낡은 머스탱도 쓸모가 있는데······”
또 다시 우울한 생각을 하려는 자신의 머리를 한 번 때려준 댄은 크리스틴네 집으로 차를 몰았다.
차를 세우기 무섭게 크리스틴네 현관문이 열렸다. 차에 타자마자 웰컴키스를 한 크리스틴이 배시시 웃었다.
“일찍왔네?”
“네가 이렇게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 일찍왔지.”
“역시 7년차 기사다워.”
“네이네이. 어디로 모실깝쇼 마담?”
“트로피카나 필드로 가자.”
“에? 벌써?”
“그 날 경기장에 오는 사람들은 하루종일이라도 주차 무료거든. 쓸 수 있는건 써먹어야지.”
“알뜰도 하셔라. 자! 출발합니다! 벨트 매십쇼!”
두 사람과 같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는지 경기가 여섯 시 반에 시작함에도 불구하고 2시 반의 트로피카나 필드 주차장은 벌써 25%가량 차 있었다.
“가자!”
댄은 크리스틴의 손에 잡혀 그녀가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점심을 먹고 데이트를 하다보니 어느덧 시간은 6시가 되어있었다.
“우리 없으면 부모님들 못들어가시는거 아냐?”
“무슨 소리야. 요즘 시대가 어느시댄데, 이미 티켓 다 발송해놨어.”
“난?”
“나랑 같이 들어가면 되니까 아무 문제없어.”
하여간 정말 빈틈없는 여자다.
움찔
사람들의 옷깃이 스칠때마다 반사적으로 댄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걸 본 크리스틴이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
댄은 손을 들어올리며 크리스틴을 안심시켰다.
“괜찮아. 마음은 괜찮은데 몸이 자동으로 반응하는 것 뿐이야. 내 눈을 봐. 예전처럼 불안해하지 않잖아.”
흔들림없는 댄의 눈을 확인한 크리스틴은 한층 업된 텐션으로 스토어를 가리켰다.
“이번 시즌 밀리터리 유니폼인가봐! 진짜 예쁘게 나왔다.”
“그러네?”
평소에는 밀리터리 무늬가 혼재된 유니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시즌은 레이스의 상징색인 군청색을 바탕으로 하는 정복같은 디자인이었다.
“같이 사자.”
“자, 잠깐!”
크리스틴이 들어가서 유니폼을 주문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두 사람의 이름이 적힌 유니폼이 나왔다.
“원래 이렇게 빨리 되는건가?”
“베테랑들이신가봐. 그냥 슥삭하니까 마킹까지 되던데?”
“그래?”
“그래! 그러니까 빨리 가자!”
크리스틴에게 떠밀려 간 오늘의 좌석은 더그아웃 바로 옆 좌석이었다.
“왔니?”
“어서 앉아. 여기 진짜 좋다.”
먼저 와있는 양가 부모님들이 자리에 만족하며 떠들고 있었다.
“세상에! 여길 구한거야?”
사람들을 만나기 힘들어할 때도 유일하게 보던게 스포츠 경기들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오랜 시간 함께한 건 역시 매일 플레이하는 레이스의 경기. 그런만큼 댄의 팬심은 엄청났다.
“세상에 저기 보여? 지금 배리 브래넌이 지나갔다고! 오 마이 갓! 조나 파인트도 저기 있어! 오늘 선발도 아닌데!”
호들갑을 떨며 기뻐하던 댄이 정신을 차렸다.
“잠시만. 근데 여기 비싸지 않았어?”
원래도 비싼 자리인데 무려 여섯 자리다.
“우리 두 사람 자리 말고는 부모님들이 지불하셨어. 야구를 좋아하는 널 위한 이른 생일선물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이 정도면 내 생일에 기대해도 되겠지?”
“대체 뭘 얼마나 해줘야할까?”
댄의 눈에는 하트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흔치않은 자리에 와서 이것저것 보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덧 경기 시작 10분 전이 되었다.
“행사 하려나보다.”
“그러게.”
- 경기 시작에 앞서 메모리얼 데이 행사를 진행하겠습니다.
“그저께는 전역한 친구가 돌아와서 애가 울었고, 어제는 여군이 몰래 돌아와서 남편이 울었어.”
댄은 신나게 어제와 그제 경기 전 행사에서 있었던 일에대해 말했다.
크리스틴은 그런 댄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래?”
“진짜 상상도 못했어. 난 솔직히 어제도 아이가 울 줄 알았거든? 그런데 남편이 울다니. 진짜 엄청난 반전이었지.”
“만약 네가 같은 일을 당하면 안 울거야?”
“음······. 네가 파병을 갔다가 갑자기 돌아오면 마음이 찡 할 것 같기는 한데, 울지는 않을 것 같아. 내가 또 네이비 출신 아니겠어?”
“흐음······. 그렇단 말이지?”
“날 울리기는 힘들걸? 하하! 그나저나 오늘은 뭘까? 레이스라면 뭔가 일반적인건 안할것 같은데말이지······.”
“너무 궁금하다.”
“나왔다! 저 사람이 레이스 단장인 다운 정이야.”
어느새 홈플레이트 옆에 나온 다운이 주변을 둘러보며 인사했다.
[아 아! 안녕하십니까! 레이스 단장인 다운 정입니다. 월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경기장을 가득 채워주신 것에 감사인사를 드립니다.]
고개숙여 인사한 다운이 손목을 툭툭치며 말을 이었다.
[여러분께 더 많은 감사를 전하고 싶지만, 경기는 제 시간에 시작해야하기 때문에 빠르게 오늘의 사연 가겠습니다!]
조막막한 레이스의 전광판에 익숙한 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바로 옆에 있는 크리스틴이었다.
“어?”
크리스틴은 검지를 입에 대고는 전광판을 향해 턱짓했다.
- 제 남자친구는······.
크리스틴은 댄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은 어떤지에 대해 덤덤히 말했다.
- 이제 나아갈 일만 남았어요. 그런데 댄은 용기가 없나봐요. 아니, 제가 아는 댄은 누구보다 용감한 사람이죠. 그저 힘이 다했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내면의 자신과 싸우느라 가지고 있던, 비축해놨던 힘을 모두 써버린거죠. 그래서 남들보다 뒤쳐졌다는 열등감과 싸울 수 있는 힘이 지금 당장에는 없는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레이스 팬 여러분. 댄에게 힘을 주세요. 넌 뒤쳐지지 않았다고. 사회는, 우리는, 가족들은 나는, 널 필요한다고. 널 응원한다는 그런 힘을요. Love you D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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