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 손님 가신단다 >
‘쓸 수 있는게 없다.’
드레이크나 비어만의 계약 중 가장 높은 금액은 1750만 달러 수준. 심지어 1년 전에 맺은 계약도 아니고 비어만의 계약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상황이다.
1년이라도 지났으면 어떻게 높여볼만하다. 하지만 다운이 ‘중요한 선수부터 차례로’라는 기한을 정해버렸다. 시간을 끄는 방법 역시 써먹을 수가 없다.
계약기간을 짧게 잡아서 돈을 당기는 방법 역시 써먹을 수가 없다.
이미 한계가 정해져있는 상황에서 보라스가 할 수 있는 건 몇 가지 없었다.
“FA계약 2년 정도까지의 기한을 잡고, 옵트아웃을······”
“저희 측에서는 옵트아웃을 넣고싶지 않은데요?”
“그러면 서비스타임이 끝나는 6년차까지만 해서 미리 계약을 해놓는건 어떻습니까? 그러면 저랑 매 년 만날 일도 없고······”
매 년 보라스와 만날 일이 없다는 말에 혹했다. 하지만 이내 다운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보라스라면 분명 마주칠 수 밖에 없어.’
더지만 보라스의 고객이 아니다. 다른 선수들도 얼마든지 보라스의 손을 잡고 나타날 수 있다.
“팀 옵션 2년 주시면 하죠.”
“그건 곤란하겠는데요?”
“그럴거면 매 년 계약을 갱신하겠습니다. 이득이 없잖아요?”
“으득······”
앞에서 이빨 갈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런건 무시해주는게 인지상정.
“한 해 최대 드릴 수 있는 금액은 1750만 달러. 더지가 좌완이라는 점, 그리고 차기 에이스가 될수가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 1850만 달러까지는 드리겠습니다.
“그럼 4년차부터······”
“물론 4, 5년차에는 당연히 그 금액을 다 드리는건 불가능하고요. 양심이 있다면 그런 제안은 안하시겠죠?”
“양심이 없는건 오히려 그쪽 아닙니까? 이미 리키가 2년차까지 한 활약만해도 그 정도 금액은 부족하지 않을텐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합니다만 앞서 신인왕을 받은 사무엘과 더지와 함께 데뷔해서 그에 못지않은 활약을 한 네이트도 4년차부터 그런 돈을 받지 못하죠. 그런데 리키에게는 해달라고요?”
“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에이스가 가지는 가치에 그 정도의 가산점은 있다고 봅니다만?”
“그럼 당장 유격수 자리와 포수 자리에 신인을 넣어도 리키는 그 성적 그대로겠네요?”
“이야기가 또 왜 그렇게 됩니까? 그렇게 따지자면 드레이크나 비어만의 성적 역시 팀원들의 도움이 들어간거죠.”
“그래서 더 줄 수 없다는겁니다. 똑같이 팀원들의 도움을 받아서 좋은 성적을 냈는데 왜 리키에게만 특별대우를 해줘야 하는겁니까?”
“하지만 팀의 차기 좌완 에이스로 팬들에게 사랑을······”
“리키에게는 미안하지만 팬들에게 사랑받는 선수는 다른 선수들이죠. 최근 3년간 유니폼 판매량이 어떤지 아십니까?”
2020년
1위 - 배리 브래넌
2위 - 케빈 마이어
3위 - 알렉스 윌슨
4위 - 네이선 드레이크
5위 - 리키 더지
2021년
1위 - 네이선 드레이크
2위 - 배리 브래넌
3위 - 리키 더지
2022년
1위 - 조나 파인트
2위 - 배리 브래넌
3위 - 네이선 드레이크
4위 - 사무엘 비어만
6위 - 리키 더지
“팬들이 산 유니폼 수 보입니까? 이걸 보고도 리키가 팬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에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파인트는 복귀 버프가 있었고, 배리는 재계약으로 버프를 받았죠.”
“사무엘은요?”
“기대되는 신인의 유니폼은 많이들 사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따지면 리키는 데뷔 시즌에도 5위에 그쳤죠. 그것도 네이트에게 졌고요. 22년에는 6월에 들어온 사무엘에게도 밀렸죠.”
“그건 파인트가······”
“조나가 리키의 표를 가져갔다고 말하시지는 않겠죠? 그러기에는 위에 있는 사람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그 사이에 네 명이나 있는데요? 뭐 투수 중 2위라고 칩시다. 그렇다고 해도 정말로 팀을 대표하는 에이스라면 3위 안에는 들어야하는게 맞지 않을까요?”
말렸다.
완벽하게 말려버렸다.
준비해 온 것만으로는 어떻게 더 파고들만한 구석이 없다.
“······ 오늘은 진척이 없을 것 같군요.”
보라스가 자리에서 일어났음에도 다운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서 말을 받았다.
“이쪽에서 할 수 있는 제안은 최대치로 말씀드렸습니다. 만약 그쪽에서 저희 쪽 제안에 맞출 생각이 없다면 더 만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요?”
“협상은 서로 맞춰가는거 아닙니까?”
“서로가 들어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서로 맞추어 나가는 것이 협상이죠.”
“레이스에게 이제 3000만 달러가 그렇게 힘든 조건은 아닐텐데요?”
“그 말을 그대로 바꿔 돌려드릴까요? 연 500만 달러 정도 어떠십니까? 전 재산이 100만 달러인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텐데 그 돈이면 남은 평생을 살기에 그렇게 힘든 조건은 아닐 것 같은데요? 제가 생각하는 조건이 이러니, 이제 500만 달러와 3000만 달러 사이에서 맞춰가면서 합의점을 찾으면 되겠군요?”
다운의 말에 보라스의 얼굴이 터질듯이 붉어졌다.
“······ 지금 싸우자는 겁니까?”
보라스의 말에 다운이 정색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스캇 당신이 하고 있는 소리가 바로 그 소립니다. 싸우자는 겁니까? 원하면 싸워드리겠습니다.”
다운이 으르렁 거리며 보라스의 얼굴 앞으로 얼굴을 가져다댔다.
“들어드릴 수 있는 제안을 가져오시죠. 그게 아니라면 다음번에는 이렇게 이야기를 들어드리지도 않을겁니다.”
“여기가 아니면 리키가 뛸 곳이 없을 것 같습니까?”
“하지만 앞으로 3년간은 우리 선수죠.”
보라스의 말에서 더지가 남고 싶어한다는 느낌이 살짝 들었다. 그래서 다운은 한 마디를 더 보탰다.
“리키가 지금까지 저희 팀에 헌신했던 것을 생각해서 원하신다면 다른 팀으로 보내줄 수도 있습니다만······? 물론 그만한 대가를 받아야하긴 하겠지만, 그쪽에서 원하신다면 제가 노력해보겠습니다. 이래봬도 그 정도 능력은 있는 단장이라.”
다운의 말에도 보라스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전과 같은 표정으로 다운을 노려보며 답했다.
“그것도 나쁜 생각은 아니군요. 리키와 이야기를 나눠본 뒤 다시 연락드리죠.”
보라스는 그대로 몸을 돌려 문을 벌컥 열었다.
“리타, 손님 가신단다. 멀리 나가지는 말고.”
보라스가 씩씩거리며 나가고 잠시 후 리타가 들어왔다.
“갔어?”
“네. 주차장에서도 나갔다는 연락 받았습니다.”
“브래드에게 션과 함께 들어오라고 해.”
“네.”
잠시 후 심슨과 함께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의 남자가 단장실로 들어왔다.
다운은 웃으며 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션이죠?”
“아, 네네!”
“다운입니다. 이렇게 와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다운의 말에 그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하죠! 세상에! 단장실을 이렇게 오다니! 사진 찍어도 됩니까?”
“음······ 죄송한데 그건 힘들 것 같네요. 오늘 부탁하고 싶었던게 있는데 흠을 잡힐수도 있어서요. 하지만 다음에 꼭 건수를 만들어서 사진까지 찍게 해드리겠습니다.”
뭔가를 부탁하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그는 그 부탁을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 대신에 다운에게 질문을 했다.
“혹시 오늘 할 일이 불법적인건가요?”
그의 질문에 다운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거라면 불법적인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친구를 불렀겠죠. 하지만 오늘 저에게는 그런 친구가 아니라 션이라는 레이스 팬만이 할 수 있는 일이 필요하거든요.”
“저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요? 그런거 없는데······”
션의 말에 다운이 모니터를 툭툭 쳤다.
“정보 하나를 제공하겠습니다. 그 정보를 가지고 커뮤니티에 글 하나만 써주시면 됩니다.”
다운의 말에 션은 곧바로 어리숙하던 표정을 풀고는 정색했다.
“제 모토가 절대 부탁을 받고 글을 쓰지 않는겁니다. 현실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그 커뮤니티에서 제가 가진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 저는 너무 잘 알고 있거든요. 죄송하지만 지금 부탁은 못 들은걸로 하겠습니다.”
멋지게 말을 하고 돌아선 션은 어깨 너머로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실망이 가득 담긴 눈으로 다운을 바라봤다.
“단장님을 정말 좋아했는데 실망스럽네요.”
다운은 말을 마치고 문을 열고 나가려는 션을 잡았다.
“오해가 있는 모양입니다.”
“무슨 오해요? 저는 절대로 구단이 원하는대로, 좋은 쪽의 글은 써줄수가 없······”
“그게 아니라 션. 잠시만 제 말을 들어봐요.”
다운의 진중한 눈빛에 그를 강하게 뿌리치려던 션의 팔에서 힘이 빠졌다. 그가 들으려는 준비가 됐다는 걸 눈치챈 다운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냥 저는 션이 평소에 하던 일을 그대로 해주는걸 바라는겁니다. 바로 확실한 정보를 가지고 커뮤니티에 글을 쓰는거. 평소에 션이 쓴 글을 보면 무조건 확실한 소스가 있을때만 글을 쓰더군요. 그래서 저희가 그 소스를 제공해주겠다는겁니다. 션이 해야할 일은 그 정보를 가지고 글 하나만 써주는겁니다. 저희는 그게 좋은 쪽으로 쓰이던, 나쁘게 쓰이던 상관하지 않을겁니다.”
“전혀요?”
“네. 전혀. 얼마든지 원하는대로 글을 쓰시죠.”
“거짓 정보는 아니죠?”
“녹음이라도 할까요?”
살며시 폰을 꺼내 녹음기를 켜는 션을 본 다운이 진지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나 정다운이 션에게 건네주는 지금 이 정보는 절대 거짓이 아닙니다. 여기에 제 단장직을 걸겠습니다.”
다운이 그렇게까지 하자 앞서 자신이 했던 추태가 떠올랐는지 순식간에 션의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그럴수도 있죠. 그렇지 않습니까 단장님?”
“물론이죠. 션. 그럴 수 있어요. 제가 말을 빨리 안한 잘못이죠.”
션은 붉어질대로 붉어진 얼굴을 숙이며 물었다.
“정보부터 말해주시죠. 듣고 생각하겠습니다!”
“오늘 보라스가 여기 다녀갔습니다. 그리고 저희와 리키의 연장계약을 논의했죠.”
관계자가 아니라면 아는 사람이 없을 이 소식에 션의 눈이 커다래졌다.
“저, 정말요? 그럼 저희 더지도 잡는겁니까?”
“아뇨. 저희 측에서는 네이트나 사무엘 수준의 계약을 제안했습니다. 100만 달러까지는 더 줄 수 있다고 제안했죠. 하지만 저쪽에서는 3000만 달러 이하는 안된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다운이 씨익 웃었다.
“이 정도면 글 하나 올릴 수 있죠?”
션이 열정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지금 바로 올릴 수 있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션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조심스레 물었다.
“근데 단장님. 아까 대가로 단장실 사진 찍게 해주신다고 했잖아요?”
“네. 혹시 대가가 모자라면 돈이라던가 혹은 시즌권 같은걸로 드릴까요?”
션의 고개가 빠르게 좌우로 흔들렸다.
“아뇨! 그런건 필요없습니다!”
“그럼 따로 원하는거라도?”
다운의 말에 그가 수줍게 입을 열었다.
“혹시 새 구장에서의 구단주실. 거기에서 기념사진 찍을 수 있을까요? 아, 지금 구단주실도요!”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성덕의 눈을 마주한 다운이 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밖에 없었다.
“하하······ 되도록 해보겠습니다.”
다운의 수락에 션이 천장을 뚫을 정도의 목소리로 외쳤다.
“영혼을 갈아넣어 글을 쓰겠습니다!!!”
< 118화 - 손님 가신단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