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 >
“계약은 어떻게 됐어요?”
비어만의 말에 앤더슨이 마른세수를 하면서도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봐봐.”
앤더슨이 내민 태블릿에는 최종적으로 합의한 계약조건이 적혀있었다.
2024년(3년차) - 1000만 달러
2025년(4년차) - 1550만 달러
2026년(5년차)부터 2038년까지 13년간 - 연 1750만 달러씩
매 년 최대 300만 달러 상당의 성적 보너스.
MVP 보너스 500만 달러, 골드글러브, 실버슬러거 각각 100만 달러 보너스.
계약조건을 확인한 비어만의 얼굴이 밝아졌다.
“와! 결국 3년차 1000만 달러 넘겼네요?”
“내가 해낸다고 했잖아.”
다운의 앞에서야 너무하다고 뻐팅기기는 했지만, 앤더슨은 1000만 달러를 넘기기 쉽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었다.
드레이크와는 다르게 비어만은 보장계약 기간이 굉장히 길다. 그렇기 때문에 구단 역시 리스크가 크다. 결코 무지성으로 투자를 해줄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런 상황이기에 앤더슨은 비어만에게 그 이상을 받아낼 자신은 있다고 하면서도 큰 기대는 하지 말라는 상반된 말을 했었다.
“생각보다 다운 단장이 우리 쪽 사정을 많이 봐줬어. 너처럼 유망한 선수가 벌써부터 장기계약을 맺는다는데에서 많은 점수를 준 것 같아. 다른 팀 가면 2000만 달러 이상은 그냥 받을 수 있잖아?”
“세금 떼이는거 생각하면 비슷하다고 하지 않았어요?”
“비슷하지. 그래서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거고. 만약 손해보는 제안이었다면 떼를 써서라도 널 말렸을거야.”
“잘 됐으면서 왜 죽상이었어요? 악마는 또 뭐고?”
“조금 특이한 걸 부탁했거든 생각지도 못했던 그런거.”
“어려운거에요?”
비어만의 말에 앤더슨이 고개를 저었다.
“아냐. 쉬운거야. 그냥 우리는 공식적으로 편만 들어주면 돼.”
***
양 측이 원하는 바가 확실했고, 서로 원하는 정도에 합의했기 때문에 세부조정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덕분에 프런트 회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또 한 명의 장기계약자가 생겼네요.”
“비어만을 잡은건 정말 최고의 선택이 될겁니다 단장님. 하하!”
“구단주님은 벌써부터 비어만 스태츄 만들어서 전시해놓을 생각이시던데요?”
“두 개 주문했답니다. 하나는 구단주님이 가지고 하나는 사무엘에게 선물로 줄거라고 하더라고요.”
글라이드는 정말 덕업일치 그 자체인 것 같았다. 취미도 취미대로 즐기고 돈도 돈대로 버니깐.
‘어쩌면 이번 계약으로 가장 기쁜건 어스틴이 아닐까?’
아마도 맞을 것 같다.
“이번에도 뭐 이벤트 같은거 할 생각 있으십니까?”
다운의 질문에 러셀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섰다.
“이번에도 유니폼 이벤트 어떻습니까? 팬들에게 반응이 좋던데.”
러셀은 또 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심슨은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너무 여러번 써먹었어.”
“고작 두 번 썼는데요?”
“두 번이지만 연속적이었잖아. 한 번 더 이어지게되면 팬들은 더 이상 우리 이벤트에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될거야. ‘또 레이스 스토어에서 몰래 유니폼 팔기나 하겠지.’이런 반응을 난 원치 않아.”
“좋은 아이디어라도 있나요?”
다운의 질문에 심슨이 태블릿을 들어 휙휙 넘겼다.
“저희 홍보팀 내부에서 회의해본 결과 다음과 같은 안들이 올라왔습니다.”
1. 비어만의 야구캠프
“사무엘이 커리어의 마지막까지 저희와 함께하게 되면서 이제는 어엿한 탬파 주민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팬들과 지역사회에 공헌하면서도 하나가 될 수 있는 야구캠프가 의미가 있을거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추가적으로 봉사활동이나 지역주민들을 위한 기금 같은 의견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건 사무엘 본인이 해야 의미가 있지 않나?”
“맞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그것까지는 옳지 않다고 생각해 기각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은······”
심슨은 홍보파트 회의에서 나온 안건들을 하나하나 읊었다. 하지만 마음에 쏙드는 의견은 전혀 나오질 않았다.
“마지막으로······ 이건 커뮤니케이션 파트장인 카를이 제안한겁니다.”
- 계약 유튜브 생중계 및 Q&A
구단 커뮤니케이션 파트장인 카를로스 크로포드가 다운의 시선을 받고 설명을 시작했다.
“저희 유튜브 채널이 은근히 잘되는거 아십니까?”
“알고야 있지.”
이름만 올려놓은, 혹은 거의 활동을 하지 않는 다른 구단 채널에 비해서 레이스의 채널은 의욕적인 크로포드 덕분에 구독자가 무려 10만 명에 달했다.
그 중에서도 선수들이 훈련하고 웃고 떠드는걸 찍은 브이로그가 인기라는 보고도 받았다.
“그게 과연 팬서비스가 될까?”
브이로그는 꽤 인기가 있을만하다고 생각한다. 훈련이라던가 선수들이 격의없이 웃고 떠드는 모습은 일반적인 팬이라면 볼 수 없는 그런 류의 모습들이다. 팬들은 언제나 자신이 자주 보지 못하는 모습에 궁금증을 표하고 흥미를 가지는 법. 따라서 브이로그는 흥할 수 밖에 없는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계약을 하는 장면.
서로 계약서에 서명을 하는 것 뿐인 그 장면이 과연 팬들에게 의미가 있을까?
“그걸 보고싶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
하지만 크로포드의 생각은 다른 듯 했다.
“계약서에 서명하는 모습 역시 팬들이 쉽사리 접할 수 없습니다. 그것도 라이브로 본다는 건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분명 관심을 가지는 팬들이 있을겁니다. 그리고 Q&A. 이건 꼭 해야합니다.”
“왜지?”
“실제로 선수들이 참가하는 행사에 와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음······”
정말 많아봐야 하루에 100명 정도가 한계가 아닐까싶다. 선수들은 팬서비스 차원에서 사인을 하거나 사진을 찍어주긴 하지만, 그들이 하는 질문에 답해주지는 않으니까.
“이제 기자들이 질문하는 것을 보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팬이 직접, 그들이 원하는 선수에게 질문을 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 포문을 저희가 여는거죠.”
그럴싸하다.
기자들이 정제한 획일적인 질문 말고 팬들이 정말로 궁금했던 사항들을 물어볼 수 있는 자리가 될 수도 있다. 그것도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은 채로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단장님에 대해서도 궁금한 점이 많다고 합니다.”
“나? 나한테?”
“네. 저희 영상 댓글들이나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이야기 중에서 단장님 지분이 5%정도는 됩니다.”
“그게 많은거야?”
“쓰잘데기 없는 잡소리 및 자기네들끼리 떠드는게 77%고 선수에 대해서 물어보는 댓글이 10%, 나머지는 구단의 방향성이나 연관된 이야기입니다.”
“많네.”
“엄청난 지분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서 단장님까지도 Q&A를 한다고하면 분명 엄청난 관심을 불러일으킬겁니다.”
뭐 나쁘지 않을 것 같긴하다. 하지만 그 날은 안된다.
“미안하지만 카를. 그 날은 사무엘만 하는걸로 하자.”
계약 발표 당일이다. 그 누구보다 선수가 주목받아야하는 날이다. 그런 날 자신이 앞에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다.
크로포드는 다운이 거절할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정말이죠? 단장님! 약속하신 겁니다! 꼭 Q&A 한 번 해주셔야합니다!”
격한 그의 모습에 다운은 당황한 듯 옆에 있는 클라인에게 물었다.
“카를 왜 저래요?”
“하하! 리타한테 계속 까여서 쌓인 모양입니다.”
“리타한테요?”
클라인의 말에 파트장들이 다들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쌓일만도하지.”
“난 카를이 언제 단장실 문 열고 들어가나 궁금했다니까?”
“단장님은 못보셨겠지만 카를이 틈날때마다 리타에게가서 ‘단장님 비는 시간 혹시 있으시냐?’라며 물어봤거든요. 하지만 그때마다 리타가 표정 싹 굳히면서 사무적으로 ‘비는 시간 없습니다.’라고 말하더군요. 그때마다 고개를 떨구고 돌아가는데······”
크로포드는 파트장 치고는 은근히 소심한 면이 있었다.
‘아마 파트 때문이겠지.’
다른 파트장들은 각자 구단이 굴러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지만, 본인이 맡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파트는 그들만큼의 중요도를 가지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묻어나왔다.
그건 아마도 그가 파트장들 중에서 가장 어린 나이(혼자 20대 중반이다.)이기도 하고, 운영팀에 있던 직원 출신이기도 해서일 것이다. 구단 운영에 뜻을 두고 왔는데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제 만들어진지 3년 된 커뮤니케이션 파트를 맡고 있었으니까.
의욕적으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속으로는 꽤 마음고생을 했을 것이다.
‘내가 신경을 너무 못 썼네.’
이런 점은 단장인 자신이 케어했어야 하는 문제다.
“카를.”
“네 단장님.”
“리타는 정말 일을 잘해. 그리고 내가 편하게 일을 할 수 있도록 항상 도와주는 고마운 존재야.”
고마운 존재라는 말에 자신의 행동이 더욱 초라해보였는지 크로포드의 고개가 더욱 숙여졌다.
“하지만 내 스케줄에 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건 리타가 아니야. 바로 나야. 그리고 내가 스케줄을 정하는 우선권은 바로 우리 구단이야. 그것도 구단을 위해 중심부에서 일하는 바로 이 파트장들 말이야. 아, 물론 구단주님이 최우선이고.”
“하지만 다른 파트에 비해서 저희 커뮤니케이션 파트의 중요도가 떨어지는건······”
“이봐 카를. 구단을 이루는 그 어느 파트도 중요도가 떨어지지는 않아. 우리 구단에서 가장 적게 돈을 받는게 누구야?”
“클러비죠.”
“클러비들이 돈을 적게 받는다고 해서 중요도가 떨어지나? 아니잖아. 그들이 없으면 구단 일이 안돌아가. 구장 관리인들은? 그들이 없으면 선수들이 저 빌어먹을 인조잔디 때문에 부상 엄청나게 당할거다. 트레이너들은? 팀닥터가 있는데 트레이너들이 필요해? 당연히 필요하지. 운동도 도와주고 근육 피로도를 낮춰서 부상 위험도를 줄여주잖아. 불펜 포수는? 포수들의 피로도를 낮춰주고 투수들이 몸을 푸는데 도움을 주지. 그들이 없으면 투포수들이 과연 지금같은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 커뮤니케이션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돈을 벌 수 있는 가장 큰 이유가 뭐야?”
“팬이죠.”
“그래 팬이지. 그 팬들을 최전선에서, 그리고 친근하게 맞아야하는게 바로 네가 맡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파트야. 커뮤니케이션 파트가 없으면 과연 팬들이 이런 의견을 우리에게 전달할 수 있었을까? 절대 없었을거야. 팬들이 이런 바람을 가지고 있다는걸 알지도 못했겠지. 이를테면 넌 우리에게 팬들의 소리를 전해주는 우체부 같은 역할을 하는거야. 우체부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다운의 말에 러셀이 조용히 속삭였다.
“이메일을 보내······ 컥!”
다행히 옆에 있던 심슨이 그를 조용히 처리했다.
“팬들의 소리를 전하는 우체부······”
“생각해봐. 저기 있는 거스가 그런 일 할 수 있겠어?”
다운의 말에 거스가 진절머리를 내며 손을 저었다.
“절대 못합니다.”
“앤디는?”
다운의 말에 다시 정신이 돌아온 러셀이 고개를 흔들었다.
“팬들이 돈으로 보여서 절대 못할 것 같습니다.”
“저봐. 그 누구도 네 자리를 대신할 수 없어. 커뮤니케이션 파트가 정말로 쓸모가 없고, 중요도가 떨어졌다면 하나의 독립된 파트가 되지 못했을거야. 그러니 네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져. 넌 우리 파트장이야. 네가 아니면 그 누구도 저렇게 채널을 키우고 팬들과 소통하지 못했을거야.”
다운의 말에 크로포드의 눈에 힘이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앞으로 이런 요청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나한테 바로 말해. 대면이 어려우면 메시지나 메일로 요청하고. 그건 리타를 거치지 않아도 되니까.”
“알겠습니다!”
힘차게 답하는 크로포드를 보며 다운이 웃었다.
“그럼 언론에 내일 계약 생중계를 할거라고 기사를 뿌리고, 비어만에 대한 Q&A를 할거라고도 말해놔.”
그리고 이렇게 일을 키우는 가장 큰 이유.
“보라스가 어떻게든 관련이 있으면 이번 일 동안, 혹은 이 일이 있은 이후 접촉해올거야.”
< 115 - 세상에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