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화 - 악마에게 시달렸거든 >
다운은 방에 도착하자마자 회의를 세팅했다.
“자고 있는데 다들 깨워서 미안합니다.”
다운의 말에 화상회의에 불려온 클라인과 러셀, 거스가 고개를 저었다.
[하하! 괜찮습니다. 어차피 내일 출근도 늦는데요 뭐.]
[너야 늦게까지 자겠지만 나는 일찍 일어나야한다고 피트.]
[그래서 단장님이 잘못했다는거야?]
[그건 아니지. 낮잠자면 됩니다 단장님 하하!]
[전 홀애비라 괜찮습니다.]
[······ 네가 제일 불쌍한 것 같다 거스.]
[그러게······ 그런거 보면 미키가 참 대단해. 저 밑에서 그렇게 바르게 컸잖아.]
[······ 다 들린다.]
자다 일어났음에도 유쾌한 저들의 반응 덕에 다운은 잠을 방해했다는 죄책감을 살짝이나마 덜 수 있었다.
“그럼 얼른 일하고 다시 자러 갑시다.”
다운의 말에 세 사람은 웃음기를 지우고 다운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사무엘이 연장계약을 요청했어요.”
[해야죠.]
[합시다.]
[잡아야합니다.]
다운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앤디. 우리 돈 있지?]
[당연하지. 그리고 나가더라도 어차피 내년부터 나가는거야. 1억 5000만 달러짜리 가호가 함께하는 내년부터!]
[그 중에서 일부는 구장에 들어가기로 한 거 아냐?]
[구단주님과 상의해본 결과 4500만 달러 정도가 필요하다고 하시더라고.]
[1억 500만 달러는 남는거네.]
[그 중에서 또 뭐 내년에 이벤트다 뭐다해서 쓸거 빼놓고 하더라도 9000만 달러 정도의 여유는 있어.]
자금에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한 거스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무조건 잡아야합니다. 우리가 먼저 제안한것도 아니고 사무엘이 요청한거라면서요?]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최소 15년 이상의 장기계약을 원하고 전 구단 상대 트레이드 거부권까지 포함된 계약을 원하더라고요.”
[우리 구단에 뼈를 묻고 싶은가보네요.]
“꿈이 원클럽맨이라고 하더군요.”
[전 구단 트레이드 거부권이야 어려운 건 아니잖습니까?]
메이저리그에서는 한 클럽에서 오래 뛴 선수들을 위해 커리어 10년 이상, 해당 구단에서 5년 이상을 머문 선수들에게는 자동으로 트레이드 거부권을 부여한다. 따라서 정말로 비어만을 오래 데리고 있으려면 트레이드 거부권 정도는 줘도 무방했다.
“초창기에 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으니까요.”
냉정한 말이지만 이게 현실이고, 비지니스다. 비어만은 스타성도 있고 좋은 유망주다. 하지만 고작해야 이제 막 2년차에 접어든 선수이기도 했다.
비어만이 직접 했던 말마따나 그가 망하게 되어버린다면?
만약 트레이드 거부권이 없다면 다운은 어떻게든 그를 다른 구단에 떠넘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트레이드 거부권을 줘버린다면 그렇게 처리할 방법조차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15년이라는 엄청난 계약기간은 곧 레이스에게 족쇄로 다가올 것이다.
“15년이라는 기간에 대해서는 어떻게들 생각하십니까?”
다운의 말에 클라인은 나쁘지 않다는듯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다고 봅니다. 사무엘은 이제 22세 시즌을 보내고 있잖습니까? 계약이 모두 끝나면 37세, 아니지 36세 시즌까지겠네요. 요즘 워낙에 선수들이 몸관리를 잘해서 그런지 36세까지는 다들 건강하게 뜁니다.]
클라인의 말에 거스도 동의했다.
[제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사무엘은 자기관리가 뛰어납니다. 유연성을 위해서 항상 따로 훈련하고, 무릎 건강을 위해서 매 경기마다 찜질도 하더군요. 포수자리에서 커리어를 오래 유지하려면 지금부터 관리해야한다면서요. 술 담배는 물론이거니와 탄산조차 먹지 않는답니다.]
“완전 애늙은이죠.”
보통 저 나이대의 좀 잘하는 루키들이라면
‘난 이것보다 더 잘할 수 있어!’
라면서 전의를 불태우곤 한다. 당연히 구단에게는 더 좋은 계약을 받을 자격이, 더 나아가서는 역대 최고 수준의 계약을 자신이 맺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할 것이다.
그런데 비어만은 벌써부터
‘지금은 잘하지만 나중에는 내 커리어가 어떻게 될지 몰라.’
라면서 장기계약을 원하고 있다. 이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평소에 걱정이 많게 사는지를 알 수 있었다.
[저런 성격이다보니까 장기계약이 더 잘맞을 수도 있겠네요.]
[걱정을 하나라도 줄이게 되는거니까 훨씬 나을겁니다.]
[금액은 어느 수준을 원한답니까?]
금액 이야기가 나오자 다운의 눈빛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걸 귀신같이 눈치챈 러셀이 물었다.
[혹시 많이 원합니까? 역시 우리 중계권 계약 때문에······?]
“아뇨. 사무엘은 그렇게 많은 돈을 원하진 않았어요. 드레이크 수준 정도만 원한다고 하더라고요.”
드레이크 수준의 계약이면 절대 나쁜 조건이 아니다.
[좋네요. 그럼 당장에라도······]
[가만 있어봐 피트. 단장님 표정이 좋질 않잖아. 분명 그것만 있는건 아닐거야.]
러셀의 말에 다운이 고개를 저었다.
“사무엘은 문제없어요.”
[그러면 다른 문제라도 있습니까?]
“금액 하니까 갑자기 보라스가 생각나서요.”
[보라스가요?]
다운은 보라스가 지난 기사들의 흑막이었을 거라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다운의 설명을 들은 그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일리가 있네요.]
[보라스라면 그런 짓을 했을 가능성이 충분하죠.]
선수의 몸값을 높이기 위한 보라스의 방법은 다양하다 못해 기발하기까지 했다. 여론전 유도같은 일은 그에게는 손쉬운 일일 것이었다.
[규탄이나 대응하는 기사를 내는건 어떻습니까?]
러셀의 말에 다운은 곧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게 하면 중간에 끼어있는 리키에게 피해가 올 수도 있어요.”
보라스가 몸값을 높이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거라는걸 더지도 분명히 알고 있을거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여론몰이를 할거라는걸 더지에게 미리 알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지는 아직까지, 그리고 여전히 레이스의 선수이자 팀의 선발진을 이끄는 2선발이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면 큰 대가를 받고 팔아야 할 상품이기도 했다. 다운은 그 상품에 흠이 나는걸 원하지 않았다.
[일단은 보라스의 대응을 한 번 기다려보시죠. 사무엘과의 연장계약이 발표되면 분명 어떤식으로든 반응이 있을겁니다.]
실무진들과의 회의를 마친 다운은 곧바로 비어만의 에이전트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 사무엘이 연장계약 이야기를 하던데 미팅 한 번 하시죠?
비어만이 귓띔을 했는지 밤 늦은 시간이었지만 곧바로 답장이 왔다.
- 내일 곧바로 찾아뵙겠습니다. 괜찮으신 시간 알 수 있을까요?
- 내일 경기하는 시간에 괜찮을 것 같네요.
다음날 다운은 선수단 버스를 보낸 뒤 비어만의 에이전트와 방에서 만났다.
“샘의 에이전트인 나이젤 앤더슨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나이젤.”
“저야말로 반갑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분명 샘이 어제 단장님께 요청했다고 들었는데, 오늘 곧바로 만나자고 답장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덕분에 어제 잠을 안잤죠. 그건 나이젤도 마찬가지이지 않나요?”
“하하! 알만한 분이······”
다운이 에이전트 출신이라는걸 모르는 사람은 업계에 없었다.
“요즘에는 더 좋아졌을 줄 알았죠.”
“좋아져봐야 얼마나 바뀌었겠습니까? 24시간 스탠바이는 바뀔수가 없죠.”
다운이 해줄 수 있는거라고는 피곤할 그와 자신의 몸을 위해 커피 한 잔씩을 놓는 것 밖에는 없었다.
“우선 조건부터 맞춰보죠.”
비어만이 알려주긴 했지만, 에이전시에서 부르는 조건은 다를 수도 있었다. 1000만 달러에 계약하겠다고 했던 선수가 5분도 되지 않아서 3000만 달러 아니면 사인안한다고 하는게 이 바닥 생리다.
어제와는 또 조건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
“저희는 최소 15년 보장계약에 전 구단 상대 트레이드 거부권을 원합니다. 금액은 네이선 드레이크 정도 수준이면 만족할 수 있고요.”
“조건은 똑같네요.”
“필요할때마다 조건 바꾸는 양아치들과는 다르거든요.”
“그 두 가지 조건은 모두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다운의 말에 앤더슨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네요. 저는 전 구단 상대 트레이드 거부권은 거절하실줄 알았거든요.”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6년차까지는 매 년 15개 구단 상대 거부권을 넣자고 할 생각이었죠. 하지만 금액적인 부분에서 사무엘이 많은 양보를 한 만큼 그 부분은 저희도 지켜줘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원시원하시네요. 역시 에이전트 출신이라 그런지 저희 마음을 잘 아시는 것 같습니다 하하!”
과연 조금 뒤에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그럼 금액적인 부분에서만 맞으면 되겠네요.”
바로 이 부분 말이다.
다운은 어제 회의 끝에 나온 계약 러프 안을 내밀었다.
2024년(3년차) - 800만 달러
2025년(4년차) - 1250만 달러
2026년(5년차) - 1550만 달러
2027년(6년차)부터 2038년까지 11년간 - 연 1750만 달러씩
러프안을 집어든 앤더슨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음······ 저희는 드레이크와 비슷한 수준을 요구한 것 같은데요.”
“비슷하게 맞춰드린 것 같습니다만.”
“전혀 다르죠. 드레이크는 2년차에 510만 달러, 3년차에는 1550만 달러를 수령하는 계약이었습니다. 게다가 4년차부터 1750만 달러를 수령하는 계약이었고요.”
“그만큼 보여준 활약상도 다르죠. 네이트는 21년부터 22년까지 계속해서 메이저리그 최상급의 활약을 보여줬습니다. 그래서 구단에서는 그에 맞는 대우를 해준거고요.”
“하지만 샘은 ROY를 수상한 선수입니다. 그만큼 활약을 했다는걸 보여주는 지표 아니겠습니까?”
“만약 네이트가 지난 7월 데뷔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ROY 조건을 충족했더라면 사무엘이 ROY를 수상했을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안그렇습니까?”
만약 드레이크가 세 타석 차이로 2022시즌 신인왕 조건을 상실하지만 않았더라면 비어만이 수상했던 ROY는 드레이크의 차지가 됐을 것이다. 앤더슨 역시 그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네이트의 경우에는 팀 옵션 2년까지 더 붙어있죠. 게다가 네이트 같은 경우에는 전 구단 트레이드 거부권도 없어요. 무조건적으로 계약기간을 보장해주는, 거기다 전 구단 트레이드 거부권까지 있는 사무엘의 계약과는 조건과 결이 아주 다르다고 할 수 있죠.”
구단이 원하면 8년만에 계약을 끝낼수도 있는 드레이크의 계약과 동일선상에서 볼 수 없다는게 다운의 생각이었다.
“사무엘이 제안한 계약 조건이 구단 친화적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이런 조건들 때문에 네이트와 완벽하게 동등한 조건을 맞춰드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구구절절 옳은 다운의 말에 앤더슨이 할 수 있는건 조금이라도 금액을 끌어올리는 것 밖에는 없었다.
“그래도 ROY수상잔데 800만 달러는 좀······ 1000만 달러 선은 맞춰주시면······”
“1250만 달러는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100만 달러만 더 올려주시죠. 그리고 성적에 따른 옵션을······”
네 시간 정도의 줄다리기 끝에 앤더슨은 1차 수정본을 가지고 경기를 마치고 돌아온 비어만에게 갈 수 있었다.
경기를 뛰고 온 자신보다 훨씬 피곤해보이는 앤더슨의 얼굴에 비어만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왜 이렇게 피곤해보여요?”
앤더슨은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악마한테 시달리다가 왔거든.”
< 114화 - 악마에게 시달렸거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