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화 -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
“마지막 카드는······”
하트 4!
스페이드 4, J, 클로버 9, 다이아 2, 하트 5에 하트 4가 마지막으로 추가되었다.
마지막으로 뒤집어진 카드를 확인한 그들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이 놈은 블러핑이고, 저 놈은 뭔가 자신이 있어보인다.
여러 생각들이 얽힌 가운데, 누군가가 말했다
“체크.”
그를 시작으로 원을 그리며 앉아있던 사람들이 돌아가며 입을 열었다.
“레이즈.”
“콜.”
“난 폴드.”
“콜.”
“나도 폴드.”
한 사람씩을 거칠때마다 가운데 지폐가 한 장씩 더 쌓였다.
“콜.”
체크를 했던 첫 사람까지 콜을 외쳤다.
남은 사람은 넷.
“배리. 네가 체크했잖아. 너부터 까봐.”
다운의 말에 브래넌이 막내인 페리시치를 가리켰다.
“어이 애송이! 너부터 해!”
브래넌의 말에 페리시치가 궁시렁거렸다.
“애송이가 아니라 루카라고 하시라니까요?”
“네가 올 시즌까지 제대로 치르면 루카라고 불러준다니까? 난 원래 풀 시즌을 제대로 치르지 않은 놈의 이름은 안불러줘.”
“그런 것 치고는 작년 포스트시즌에 제 이름을 너무 크게 부르셨는데요?”
지난 포스트시즌 페리시치가 담장을 타고올라가며 슈퍼플레이를 할 때, 그리고 착지에서 부상을 당했을 때, 두 번 연속으로 그의 이름을 가장 크게 불렀던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브래넌이었다.
과거를 지적당한 브래넌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괜시리 화를 냈다.
“닥치고 패나 까 애송아!”
이제는 그런 브래넌이 익숙한지 페리시치가 어쩔수 없다는 듯 패를 넘겼다.
“네이~ 네이~”
스페이드 에이스와 다이아 9.
“고작 원 페어로 덤빈거야?”
옆에 있던 우드먼의 놀림에 심통이 난 페리시치가 그의 팔을 툭 쳤다.
“그러는 넌 뭔데?”
우드먼이 뒤집은 카드는 하트 J와 클로버 2.
“고작 투 페어?”
“그래도 네 원 페어보다는 낫지.”
두 사람이 티격태격 싸우는 사이에서 브래넌이 손을 휘저었다.
“어이 애송이들! 신성한 포커판에서 싸움은 금물이라고!”
브래넌은 던지듯 자신의 패를 보였다.
다이아 에이스와 클로버 3.
스트레이트다.
“자! 그럼 이 판돈은 내가 다 쓸어간다!”
브래넌이 희희락락하며 판돈에 손을 가져다대는 순간.
탁!
다운이 자신의 카드 두 장을 그의 앞으로 던졌다.
“손 떼.”
다운이 던진 카드는 클로버 4와 다이아 4.
포 카드다.
다운의 패가 가장 높은 것을 확인한 브래넌이 머리를 감싸쥐었다.
“으아아아아! 또 다운이야? 또?”
“또는 무슨. 고작 두 판 이겼는데.”
“그게 문제야! 질때는 미련없이 빨리 빠져나가고, 이길때는 많이 따잖아! 심지어 전의 승리에서는 노 페어로 블러핑해서 이기고!”
“그게 바로 포커의 재미 아니겠어?”
돈을 긁어모은 다운이 엄지에 침을 묻혀가며 지폐를 넘겼다.
“120달러! 많이도 모였다!”
“아까도 100달러 정도 벌지 않았어?”
“벌었지.”
“그만큼 벌었으면 이제 빠져 주시지?”
샐쭉이는 브래넌을 향해 다운이 웃었다.
“안그래도 이만 일어날 생각이었어. 다들 밥 먹을 돈은 남겨놓고 포커 쳐. 아니면 배리한테 들러붙어서 사달라고 해도 되고.”
“꺼져! 나한테 와도 밥 없는거 알지?”
브래넌의 거친 말에 다운을 비롯한 선수들이 피식 웃었다. 저렇게 말해도 밥 사달라고 하는 선수들의 요청에 단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다는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배리가 밥 사주면 적당히 하려고 했는데, 밥을 안사준다네?”
“이렇게되면 어쩔 수 없이 기를 쓰고 이겨야겠네.”
“배리. 돈 많이 챙겨왔죠?”
“다 덤벼.”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포커판을 뒤로한 다운이 자신의 자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땄습니까?”
자리로 가는 길에 앉아있던 캐시의 질문에 다운이 웃으며 손가락 두 개를 펼쳤다.
“20달러?”
“220달러요.”
1년이 넘어가는 올랜도 포커테이블(글라이드와 파트장들이 포함된 휴식일 모임이다.)을 함께하며 다운의 포커 실력을 알고있는 캐시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너무 많이 딴거 아닙니까?”
“적당히 땄죠. 재미로 하는건데 너무 따면 좀 그렇잖아요?”
“블러핑도 한 번 했습니까?”
“했죠.”
“어쩐지 배리가 소리를 치더니. 단장님의 포커페이스는 진짜 당해보지 않고서는 모릅니다.”
자신만 당하지 않았다는 것이 만족스러운지 캐시가 웃었다.
“아직 비행시간도 많이 남았는데 어서 가서 주무시죠.”
“안그래도 그러려고요.”
캐시의 자리를 지나쳐 자신의 자리에 도착한 다운은 몸을 뉘이고 담요를 펼쳤다.
원정이 예정된 시애틀까지는 아직 3시간 정도의 비행이 남아있었다.
“단장님.”
아직까지 불이 켜져있는 실내에서 눈을 보호하기 위해 안대를 내리려는 다운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반쯤 걸쳐있는 안대를 다시 올리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비어만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샘? 포커나 더 치지.”
다운의 말에 비어만이 어깨를 으쓱였다.
“단장님이 탈탈 털어가시는 바람에요.”
“그래서 개평이라도 달라고?”
“설마요. 이야기하고 싶은게 좀 있어서요.”
비어만은 비어있는 다운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잠깐 앉아도 될까요?”
다운은 담요를 옆으로 치우고 누워있던 등판을 다시 세웠다.
“얼마든지.”
선수가 직접 단장에게 찾아올 정도의 일인데, 없던 시간이라도 만들어야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무슨 일인데?”
“이번에 중계권 계약을 새로 맺었잖아요?”
선수들 사이에서도 엄청난 규모의 중계권 계약은 화제가 되었다. 이런 계약을 바탕으로 선수들에게 장기계약을 안겨준다는걸 그들도 알고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그래서말인데 혹시 저하고는 장기계약 맺을 생각 없으신가요?”
비어만의 말에 다운은 깜짝 놀랐다.
“당연히 있지!”
이제 2년차 시즌에 불과하지만, 지난 시즌에도 루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엄청난 모습을 보여주었고 지난 시즌 아메리칸리그 ROY까지 수상하면서 그 가능성을 보인 선수였다.
이번 시즌에도 윌슨과 포수 자리에서 반반으로 출장을 하면서 타석에서 지난 시즌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활약을 해주고 있었다.
수비에서의 발전 역시 만족스러웠다. 비어만은 프런트가 원하던대로 윌슨에게 온갖 수비 노하우들을 쪽쪽 뽑아먹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번 시즌에는 그와 함께하는 투수들이
“예전에는 알렉스하고 함께할때만큼 편하지는 않았거든요? 조금 불안한 정도? 그런데 이번 시즌에는 좋아진 것 같아요. 편하다고까지 할 수는 없는데 불편함이나 불안함이 느껴지지는 않아요.”
라고 입을 모아 말하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연장계약? 무조건 맺고 싶었다.
“그런데 왜 저하고는 연장계약 논의를 안하시는건가요?”
서운함이 느껴지는 비어만의 말.
“원래는 돈이 없어서 그럴거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죠. 그런데 이제 구단에도 돈이 생겼잖아요? 선수들에게 투자를 한다고도 했고요.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고 2주가 되어가는데도 연장계약에 대한 이야기가 안나오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다운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스캇 보라스!’
이제야 모든 것들이 명확해지는 느낌이다.
‘그 기사. 보라스가 낸 게 분명해.’
보라스가 했던것처럼 그런 악의적인 기사를 내버리면 레이스가 할 수 있는 해명은 하나다.
- FA에 과도하게 투자하는 대신 저희는 충분한 비전을 가지고 지금 있는 선수들, 그리고 팜에 투자하겠습니다.
메이저리그 1위에 랭크된 팜을 가지고 과도하게 FA에 투자를 하는건 멍청한 짓이다. 다운이, 그리고 레이스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거라는 것은 보라스가 아닌 그 누구라도 예측할 수 있는 범위다.
다운이 그렇게 해명을 하게 된다면 보라스는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
“레이스가 투자할 선수가 바로 여기있다. 하지만 레이스는 리키에게 눈도 돌리지 않고 있다! 어린 선수들과 팜 출신의 더지와 연장계약을 하지 않는다는건 자신이 한 말을 지키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런 식으로 레이스를 압박할 수 있는 명분 말이다.
‘빌어먹을 자식!’
이가 갈리는 시나리오가 머리에서 계속해서 재생이 되지만, 지금은 그런 시나리오를 돌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당장 눈앞에 있는 비어만에게 집중해야한다.
“우리에게는 고작 2주가 지났지만, 너희 입장에서는 벌써 2주가 지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걸 내가 간과했네. 미안하다.”
우선 이 상황까지 오게된 것에 대해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다.
“아직 우리는 저년차 선수가 많이 남아서 너희가 그렇게 벌써부터 한 팀에서 뛰고싶어하는 줄 몰랐어.”
다운의 사과에 비어만이 당황한 듯 손을 흔들었다.
“다른 애들은 아직 별 생각 없는 것 같더라고요. 저만 그런거에요. 저만. 제 롤모델이 누군지 아시죠?”
“버스터 퍼지 아냐?”
“맞아요. 기억하시네요?”
“너희에 관한건 다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잖아.”
“그래서 저희들이 단장님을 좋아하죠.”
비어만은 슬쩍 미소지으며 말을 이었다.
“퍼지처럼 한 팀에서 오래 있는게 제 꿈이에요. 원클럽맨. 단어부터 끝내주지 않아요?”
“로망이 가득 담긴 단어지. 선수는 클럽에 대한 충성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을거고, 실력도 가지고 있어야 하지. 구단은 그의 애정과 실력에 대해서 마땅한 대우를 해줬을거고.”
“사실 그런 로망이 아니더라도 빨리 장기계약을 맺는게 좋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제 성격상 한 군데 오래 머무는게 조금더 안심되기도 하고, 야구선수라는게 결국 언제 부상당할지 모르잖아요?”
“어? 어 그렇지······”
갑자기 꿈이 가득한 소년에서 현실을 직시한 아저씨가 나왔다.
“뭐 구단에게는 미안할수도 있지만, 제가 지금 잘하고 있을 때 미리 장기계약을 맺어놔야 나중에 좀 못하거나 부상을 당하더라고 돈이 들어올 구석이 있는거잖아요.”
“그, 그렇지?”
“그런 면에서 저는 미리 장기계약을 맺고, 안정적으로 커리어를 이어나가고 싶어요.”
굉장히 현실적인 이야기다.
‘요즘 애들은 성숙하다더니······’
그게 선수들에게도 적용되는 모양이다.
“원래는 오리올스에서 그러는게 꿈이었지만······”
“이미 트레이드 되어버렸지.”
“그래서 앞으로는 레이스에서 오래 머물고 싶어요. 새 구장으로 이전하는 것도 그렇고, 예전보다 관중들이 많이 오는것도 마음에 들어요. 팀 분위기도 정말 마음에 들고요.”
새 구장, 관중 유입, 팀 분위기.
지금까지 다운이 와서 가장 신경쓴 것들이다. 이 노력들이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다운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아, 물론 대우가 나빠도 머물겠다는 듯은 아니에요.”
“그거야 당연하지. 프로는 실력에 맞는 대우를 받아야하는 법이야. 아까 말했잖아. 프랜차이즈는 선수의 희생과 관심 배려만으로 만들어지는게 아니야. 구단 역시 비슷한 수준의 제안을 해줘야하지. 혹시 네가 원하는 정도의 제안이 있을까? 에이전시와 협의를 하기 전에 네가 어느 정도를 원하는지를 알면 좋을 것 같은데······ 아, 혹시나 지금 네 말이 추후 협상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미리 에이전시와 이야기를 나누고 와도 돼.”
다운의 배려에 비어만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이야기하고 왔어요.”
“그럼 편하지.”
“드레이크가 계약한 수준을 원해요.”
드레이크의 계약은 10년 1억 4420만 달러까지 올라갈 수 있는 계약이다.
하지만 계약의 최고액이 2000만 달러를 넘지 않는 구단 친화적인 계약이기도 했다. 그 정도로 만족한다면 땡큐였다.
“대신 최소 15년의 계약을 원해요. 그리고 전 구단 상대 트레이드 거부권을 주세요. 저는 그거면 만족해요.”
비어만의 말에 다운이 걱정말라는 듯 웃었다.
“시애틀 도착하자마자 에이전트하고 협상해볼게. 기다리고 있어.”
“감사합니다.”
밝은 얼굴로 돌아가는 비어만의 뒷모습을 보며 다운이 이를 갈았다.
“보라스······”
아무래도 오늘 밤에 잠자기는 틀린 것 같다.
< 113화 -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