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 갑의 여유 >
점심시간이 살짝 지난 12시 반 즈음.
배는 부르고 날은 푸르다.
살짝 열어둔 창 사이로 불어오는 봄바람이 졸음을 불러일으켰다.
우우우웅
다운이 울리는 폰을 들어올렸다.
[채드윅]
폭스다.
“늦었네.”
ESPN과 CBS는 오전에, NBC SN은 점심시간에 방문의사를 밝혔다. 폭스는 이들 중에서 가장 늦은것이다.
“얼마죠?”
[이런. 우리 인사 정도는 할 수 있는 사이 아닙니까?]
다운의 말에 채드윅이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
“이번에도 1억 달러 이하의 딜이면 피차 시간낭비일테니까요. 빠르게 알아보는게 좋죠.”
[그거야 그렇죠. 하지만 오늘은 정말 다릅니다.]
“기대해도 되나요?”
[물론이죠. 다만 오늘은 전화 대신에 제가 좀 찾아뵈려고 하는데······ 시간 괜찮으십니까?]
채드윅도 정보통을 통해 오늘 ESPN과 CBS, 심지어 NBS SN 오기로 했다는 사실을 들은게 틀림없다.
“오늘이면······ 세 시 반 어떠십니까?”
다운의 말에 채드윅이 곧바로 되물었다.
[혹시 점심시간이 세 시 반까지인가요?]
“아뇨. 두 시입니다.”
[그럼 저에게 쓰실 수 있는 시간은 30분 정도가 맞습니까?]
정말 눈치가 예술이다. 점심시간으로 앞선 미팅이 몇 개나 있는지를 가늠하다니.
‘숨길 수도 있긴 하지만······’
이 사람들이 서로 싸우면 싸울수록 레이스에게는 이득이 된다. 그래서 다운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치는 않지만······ 대략 그 정도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잠깐의 침묵이 지난 뒤 채드윅의 목소리가 들렸다.
[비행기 도착 시간이 1시 40분 정도라는데 미리 가서 기다려도 되겠습니까?]
미팅시간인 세 시 반까지 비행편이 저것만 있을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저렇게 일찍 온다는 말은 미리 와서 경쟁자들과 신경전을 펼치겠다는 말이었다.
“물론이죠. 머무실 수 있는 회의실 하나 정도는 내드릴 수 있습니다.”
[하하! 그거면 만족합니다. 그럼 조금 이따 뵙겠습니다.]
다운은 블랙베리를 책상위에 던졌다.
“ESPN은 30분 전에, CBS는 1시간 전에, NBC SN에서는 1시간 반 전에, 폭스는 2시간 정도 전에······”
저게 각자 온다고 했던 시간들이다.
계산해보면 1시 반 즈음으로 귀결되는 시간.
“이걸로 난장판 예정이네.”
토비는 자신이 미리 말했던대로 2시가 되기 30분 전에 프런트 사무실에 도착했다.
“토비 크루즈씨 오셨습니다.”
리타의 보고에 다운이 차를 홀짝였다.
‘확실히 똥줄이 탔나보네.’
ESPN이면 디즈니라는 대기업을 뒷배에 둔 스포츠 중계업계의 공룡 중 하나다. 그런 회사의 메이저리그 파트장이 30분이나 일찍와서 기다릴 정도로 간절하다는 뜻이다.
그도 다른 주요 방송국들이 움직였다는 소리를 들었을테니 그럴만도 했다.
“대기실에 넣어뒀어?”
“네. 점심식사하고 쉬시는 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던대로 입구 바로 옆에 있는 회의실을 잡아뒀습니다.”
“블라인드는?”
“올려놨습니다.”
다운이 웃자, 리타도 평소와는 다르게 따라 웃었다.
“어? 리타. 방금 굉장히 사악하게 웃은거 알아?”
다운의 지적에 리타는 웃음을 지웠다.
“하······ 이게 다 단장님 때문입니다.”
“뭐 그렇다고 치자고.”
씨익 웃은 다운이 시계를 향해 눈을 돌렸다.
“어서 도착했으면 좋겠는데······”
***
“후······”
차에서 내린 채드윅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전쟁터에 들어가기 전에 숨을 고르는 건 당연한 일이다. 크게 숨을 내쉰 채드윅이 걸음을 옮겼다.
“폭스의 채드윅입니다. 약속 명단에 있을겁니다.”
명단을 훑어본 가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곧 비서가 내려와서 안내해드릴겁니다.”
그의 말대로 잠시 후 미녀가 문을 열고 나왔다.
“Mr.채드윅?”
“네.”
“레이스 단장 직속 비서 리타입니다. 굉장히 일찍 오셨네요.”
“비행기 시간이 빨라서 이렇게 됐습니다. 하하!”
채드윅의 웃음에도 리타는 무표정을 유지했다.
“대기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죠.”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가는데 약간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마치 누군가가 신경전을 하는 듯한······’
그리고 그 소리는 대기실을 향해 갈 수록 더 선명해졌다.
“······ 우리가 더······”
“······ 너희는 제대로······”
“······ 레이스는 우리와······”
각기 다른 세 명의 목소리가 서로의 신경을 긁고있는 듯 했다.
‘직원들이 너무 시끄러운거 아닌가?’
하지만 대기실로 들어서는 순간, 채드윅은 그것이 직원들이 아님을 알아챘다.
“탬파 지역에 네트워크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은 ESPN이나 NBC보다는 저희 CBS가 훨씬 낫죠.”
CBS의 메이저리그 파트장 멜린다.
“무슨 소리야. CBS보다는 우리 NBC SN이 가진 네트워크망이 훨씬 좋지. 인지도 자체가 다른데.”
NBC SN의 메이저리그 파트장 알베르토.
“인지도나 네트워크 망으로 따지자면 둘 다 나한테 안될텐데? 그리고 요즘 누가 TV로 경기를 봐? 우리 ESPN처럼 딱! 폰으로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어야지. 그리고 총알은 넉넉들 하신가 몰라?”
ESPN의 메이저리그 파트장 토비까지.
내로라하는 인간들이 한데 모여 떠들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 리타가 특유의 무표정으로 타이르듯이 말했다.
“손님 여러분. 각자 대기실로 들어가주세요. 저희 직원들이 일하는데 방해됩니다. 이대로 떠드실거면 한 방에 들어가시는걸 추천드립니다.”
그녀의 말에 알베르토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근데 비서씨. 리타라고 했나?”
“네 맞습니다.”
“다운은 왜 우리를 한데 모아놓은거죠? 이건 싸우라고 그런거 아닙니까?”
그의 말에 리타가 섬뜩한 눈빛을 발사했다.
“저희가 일찍 오라고 했나요? 단장님에게 전해들은 바로는 여러분들이 일찍 오겠다고 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녀의 말에 순식간에 함죽이가 된 알베르토.
“불만이 있으시면 원래 예정된 시간에 다시 오시면 되겠습니다.”
냉랭한 리타의 말에 순식간에 조용해진 분위기.
“이야기를 더 나누실 분들은 한 방에 들어가시고, 그게 아니면 각자 배정된 방으로 들어가주세요. 채드윅씨는 여기 있는 5번 회의실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멜린다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이렇게 된 거 그냥 네 명이서 한꺼번에 들어가는건 어때요?”
멜린다의 제안에 말도안된다는 듯이 피식 웃은 ESPN의 테드가 먼저 회의실로 들어갔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난 먼저 들어가서 미팅 자료나 준비해야겠네.”
가장 먼저 미팅이 잡혀있는 테드 입장에서는 들어줄 필요가 하등 없는 말이었다.
그가 잘만 한다면 뒤에 있을 경쟁자들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돌아가야할테니까.
테드가 먼저 들어간 뒤 세 사람은 그가 들어간 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여기서서 다들 뭐하십니까?”
다운이다.
“들어가서 기다리세요. 30분 뒤에 제가 한 분 씩 찾아뵐테니까요.”
다운은 그 말 만을 남기고 테드가 들어간 회의실에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채드윅이 고개를 흔들었다.
“이대로는 안돼.”
***
회의실에 들어온 다운은 테드와 악수를 한 뒤 자리에 앉았다.
“자! 그럼 ESPN에서 들고온 조건을 들어볼까요?”
“100%, 아니 1000% 만족할만한 제안이라고 확신합니다.”
테드는 정말로 자신이 있다는 얼굴로 계약서를 내밀었다.
“이게 저희 조건입니다.”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ESPN의 요구조건은 아래와 같았다.
계약형태 : 프리시즌, 정규시즌 독점 중계권 및 포스트시즌 중계권
계약기간 : 2024년부터 2043년까지 20년
계약금 : 연 1억 3000만 달러.
특이사항 : ESPN+로도 송출 예정. 레이스 앱을 통해 연동 요청. ESPN+로 중계를 볼 때 시즌패스 메리트 부여.
‘와우!’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ESPN이 내건 조건은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대단했다.
1억 3000만 달러면 연 3000만 달러짜리 선수를 네 명이나 더 계약할 수 있었다. 그것도 무려 20년 동안이나!
만약 이 계약이 성사된다면, 앞으로 장기계약은 물론이거니와 FA계약에서도 큰 자금압박을 느끼지 않으면서 계약을 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저 조항은 뭐죠?”
다운이 어떤 조항이라고 콕 집어 말하지 않아도 테드는 어떤 조항을 말하는지를 알아차렸다.
“시즌패스 메리트 부분 말씀하시는거죠?”
“맞습니다.”
“아시다시피 요즘 젊은 친구들의 대부분은 TV를 시청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폰, 태블릿, 앱, 컴퓨터, 혹은 콘솔을 이용해서 TV 시청을 즐기죠. 그래서 저희 ESPN에서도 ESPN+라는 스트리밍을 지원하는 것이고요.”
“거기까지는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수많은 레이스 팬들이, 혹은 메이저리그 팬들이 저희 ESPN을 시청해야할, 그리고 ESPN+를 구독해야할 이유가 되질 않습니다. 저희가 현재 가진 독점 중계권을 빈약하기 그지없으니까요. 그래서 생각해낸게 저겁니다. 시즌패스와의 연동.”
그는 자신의 태블릿을 꺼내 좀 더 쉬운 설명을 위해 그림을 그렸다.
“저희 ESPN+와 레이스의 앱을 연동시킵니다. 그러면 저희는 시즌권을 가지신 분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겠죠? 만약 시즌권을 보유하신 분이 저희 ESPN+에서 레이스 경기를 일정 시간 이상 시청을 한다면, 거기에 따른 스탬프를 지급하는거죠.”
그의 설명에 다운은 혀를 내둘렀다. 만약 저렇게 된다면 ESPN+는 손쉽게 레이스의 시즌권 보유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대가가 바로 1억 3000만 달러라는 저 큰 금액일것이고.
중계권은 중계권대로 하면서 자신들이 가진 앱에 대한 이득까지 모두 챙길 수 있는 그림을 제대로 그려가지고 왔다.
‘확실히 대기업은 대기업이네.’
하지만 저대로 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저희가 시즌 패스를 하는 이유 중에는 구장 내에서 추가적으로 나오는 판매수익도 있습니다. 그런데 앱으로 시청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혜택을 부여한다면······”
“그건 역차별이 될 확률이 높죠. 그래서 저희가 제안하는건 두 시간 이상을 시청했을 시, 스탬프 반 개를 적립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실제로 경기장에 오시는 분들은 그 혜택을 온전히 누릴 수 있고, 일이 있어서 경기를 못 보러 오는 팬들은 저희 앱을 구독한다면 스탬프 반 개를 챙길 수 있게 되는거죠.”
“그래도 문제는 있습니다. 스탬프 반 개를 획득할 수 있다는 메리트만 믿고 실제 관중 수가 줄어들면 그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구단에 있어서 관중은 돈이다. 구단을 유지하게 해주는 수입원. 하지만 선수들에게 있어서 관중은 돈이자, 경기에서 힘을 나게 해주는 치어리더들이다.
당장에 돈이 좋다고 해서 저 조건을 받아들이면 실제 경기장에 나오는 팬들의 수는 이것보다 훨씬 줄어들 가능성이 있었다.
‘그것만 아니면 진짜 베스튼데······’
생각해온 것과 금액까지. 아직 뒤에 있는 다른 방송사들의 조건을 들어보지는 못했지만, 돈에 있어서만큼은 절대 딸리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잘 들었습니다.”
급할 것 없다.
여기서 갑은 다운이니까.
다른 방송사들의 조건도 들어본 뒤에 정하면 된다.
< 110화 - 갑의 여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