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머리 MLB 단장-109화 (109/268)

< 109화 - 말하는대로 >

결국 그 날 다운은 폭스와 합의까지 이루는데 실패했다. 그럼에도 탬파로 돌아가는 다운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려있었다.

“아쉽긴 하지만,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다운이 이번에 폭스에 직접 발걸음을 옮긴 것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당시 가장 높은 금액을 제안했던 오랜 동반자이자, 아닌 밤중에 계약해지라는 날벼락을 맞게된 폭스에 대한 예의.

아무리 이것이 정당한 요구라고는 하지만 레이스가, 혹은 다운이 멋대로 계약해지를 통보하고 아무런 액션을 취하지 않아버리면 이미지상 타격이 클 확률이 높았다. 물론 이런 일은 희박하겠지만, 만약 방송국 대형 3사에서 담합해서 레이스의 중계권은 계약하지 않겠다고 해버리면 레이스만 손해보게 된다.

그래서 다운은 직접 걸음을 옮기면서 혹시나 나올 잡음에 대비한 것이었다.

그리고 둘째.

폭스 내부에 있을 정보원들에게 정보를 흘리는 것.

사실 이것이 다운이 여기까지 오게 된 가장 주된 이유라고 할 수 있었다.

좁디좁은 야구계처럼, 방송계 역시 비좁았다. 한 다리만 걸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운은 확신했다.

“분명히 폭스 직원 중에서도 ESPN이라던가 NBC SN에 정보를 흘리는 놈들이 있을거야.”

그래서 다운은 협상을 마치고 나오면서 문을 살짝 연 채로 채드윅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1억 달러가 넘는 제안이 아니면 연락은 자제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이만.”

엄청나게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조용하던 사무실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적어도 5미터 내에 위치했던 사람들은 깔끔하게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 다른 정보원이 있다면······

“그걸 옮겨나르겠지.”

***

다운이 폭스를 찾아갔던 바로 그 날 저녁, 마이애미의 한 술집.

“마티니.”

남자는 카드를 내밀며 칵테일의 왕이라는 마티니를 주문했다.

바텐더가 남자의 주문에 마티니를 제조하는 동안 옆에 또 다른 남자가 앉았다.

“깔루아 밀크 하나도 추가해줘요.”

추가라는 말은 앞선 사람의 주문에 얹겠다는 말이다. 그 말은 곧 이 사람이 술을 두 잔 산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텐더가 슬며시 먼저 온 남자에게 눈을 옮기자 그가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추가해줘요.”

잠시 후 두 잔의 칵테일이 나왔다.

“대체 깔루아 밀크는 무슨 맛으로 먹는거야?”

“커피와 우유, 술의 조화랄까?”

“그걸 마실바에는 커피를 마시는게 낫지 않을까? 아니면 커피우유를 마시던가.”

“그것들하고는 전혀 맛이 달라. 깔루아 밀크만이 품고있는 고유의 그 달콤쌉싸름한 맛이 있어.”

“젠장. 나는 절대 이해 못하겠구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남자가 마티니로 입술을 적셨다.

“그나저나 갑자기 만나자니. 무슨 일이야?”

“지금까지 얻어먹은 술이랑 밥값은 해야지.”

그의 말에 마티니 남자의 눈빛이 달라졌다.

“괜찮은 정보 있어?”

그의 말에 깔루아 밀크를 쭈욱 들이킨 그가 한 잔을 더 주문했다. 눈치빠른 바텐더가 슬며시 자리를 옮겨 칵테일을 제조하는 동안 깔루아 남자가 숨죽여 말했다.

“오늘 레이스에서 단장이 찾아왔어.”

“레이스에서? 갑자기? 무슨 일이 있었던건가?”

“아, 그 전에 오전에 우리가 선전포고를 받았거든. 레이스와 우리 사이의 중계권 계약이 올 시즌으로 만료된다고 말이야.”

“뭐? 2027년까지는 중계권 너희가 가진거 아니었어?”

“나도 그게 무슨 개똥같은 소린가 싶었는데, 계약서 상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야. 자세한건 내가 그쪽 담당이 아니어서 알 수는 없었어.”

자세한 내용까지도 필요없다. 중계권이 올해로 만료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간 먹인 술값는 아깝지 않아졌다.

“그래서? 그게 끝이야? 레이스 단장이 찾아와서 계약해지됐다고 말한걸로 끝?”

“아니. 계약해지 통보는 변호사를 통해 이미 들어왔었대. 그리고 단장이 와서는 도의상 먼저 연장계약 의사를 물어보러 온거였다더라고. 근데 여기서 재밌는게 있어.”

“뭔데?”

“무려 연 1억 달러를 원했다는거야.”

“뭐?”

연 1억 달러면 최상급의 중계권 계약이다.

“미친거 아냐?”

“근데 그게 또 완전히 틀린 계산은 아니야. 레이스 경기 시청률을 보면 엄청나거든. 어지간한 빅마켓 급으로 시청률이 높아. 요즘 성적도 좋고, 마케팅도 잘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젊은 사람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아.”

“그렇다고 1억 달러를 투자하기에는······”

마티니 남자가 말을 멈췄다. 이건 자신이 판단할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알지못하는 이해관계가 윗선에서는 있을수도 있으니까. 여기서 그가 해야할 것은 평가가 아니었다.

“근데 너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며. 근데 1억 달러를 제안했다는건 어떻게 알았어?”

“레이스 단장이 나가면서 1억 달러 이상의 제안이 아니면 연락할 생각하지 말라고 말하고 갔거든.”

“사람들이 다 듣는 앞에서?”

“문 열고 나오면서 소리쳤다더라.”

이 정도면 다 긁어모았다. 마티니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잠시 전화 좀 하고올게.”

“한 잔 더 시켜도 되지?”

“얼마든지.”

이 일은 NBC SN에도 똑같이 일어났다.

***

ESPN은 메이저리그와 오랜시간 함께해 온 파트너 관계다. 그래서 지난 시즌에도 7년간 연 7억 달러에 이르는 금액에 중계권 계약을 맺은 것이고. 하지만 ESPN이 사무국과 맺은 계약은 일반적인 중계권 계약과 달랐다.

1. 라디오 전국 중계권

2. 와일드카드 전국 중계권(홀수해 아메리칸리그, 짝수해 내셔널리그)

3. 중계 영상을 활용한 2차 하이라이트 프로그램 중계권

4. 매치 오브 더 데이(무료 중계 매치) 중계권

이렇게 네 가지를 포함한 계약이었는데, 여기에는 어디에도 ‘독점’이라는 말이 붙어있질 않았다.

사무국은 MLB tv를 통한 중계권, 구단은 지역 방송국에 대한 중계권을 팔다보니 독점이라는 말이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때문인지 최근 ESPN+의 야구쪽 가입자는 지속적으로 줄어드는 추세였다.

“빌어먹을 사장!”

오늘 회의에서도 새로운 소식이 없다며 쪽을 당한 메이저리그 파트장 토비는 머리를 감싸맸다.

“그럴거면 구독해야할 이유를 좀 늘려주던가!”

어차피 독점도 아니고, 야구만 보는데, 좋아하는 팀의 중계를 매일 볼 수도 없다. 거기다가 비싸다.

메이저리그 팬 입장에서는 굳이 ESPN+를 구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컨텐츠······ 컨텐츠가 필요해······”

그것도 독점 컨텐츠가 필요하다.

머리를 싸매고 있는 토비의 사무실 문을 누군가가 두드렸다.

“파트장님?”

“왜!”

신경질적인 토비의 목소리에 목이 움츠러든 직원이 문을 빼꼼 열었다.

“정보원이 연락왔습니다.”

“무슨 정보원?”

“왜 예전에 폭스 쪽에 심어뒀던 정보원 있잖아요.”

“그런 애들이 한둘이냐?”

“마이애미쪽 정보원이에요.”

마이애미라는 말에 토비의 고개가 살짝 돌아갔다.

“마이애미?”

말린스는 지난 시즌 폭스와 중계권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레이스의 계약은 최소 2027년까지다. 거기서 뭔가 정보가 나올 건덕지가 없을텐데······

“뭐라던데?”

“레이스랑 폭스 사이에 계약이 끝났답니다.”

“뭐?”

“올 시즌을 끝으로 만료래요.”

“왜?”

2027년까지로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정확한 이유는 모르는데 이번 시즌을 끝으로 만료되는건 확실하고, 단장이 직접와서 최소 1억 달러를 불렀대요.”

토비의 귀에 1억 달러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만료.’라는 두 글자만 들렸다.

“기회다!”

지역 독점 중계권 시장에서의 강자는 각 지역에 있는 스포츠 채널이다. 지역 주민들이 자주보다보니 아무래도 구단 측에서 그 쪽을 선호하는 것이었다.

물론 전국망을 갖춘 구단이 경쟁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NBC SN과 폭스 스포츠가 계약만료 전에 연장계약에 들어가거나, 공격적으로 베팅하다보니 들어갈 틈이 보이질 않았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가디언스의 중계권 계약마저도 NBC SN이 가져가버리면서 ESPN은 또 다시 패배해버렸다. 지역 팬들의 선호도가 ESPN에보다는 NBC에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문제는 30개 구단 중에서 가장 빠르게 계약이 풀리는 구단이 2026년이 되어서야 나온다는 것이었다. 그 말은 곧 ESPN은 싸울 힘이 있더라도 2026년까지는 손가락 족쪽 빨면서 기다려야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시청자는 기다려주지 않지.”

ESPN이 손가락을 빨고 있는 동안 폭스나 NBC SN은 영향력을 더 넓힐 것이다. 어쩌면 ESPN에서 메이저리그 파트가 없어질지도 모른다.

“그 꼴은 못보지!”

그런 꼴을 보지 않으려면 적어도 한 개 구단 정도는 독점권을 얻어내야한다.

1억 달러?

문제없다. 정말로 돈이 중요하다면 ESPN은 절대로 패배할 일이 없을거라고 확신했다. ESPN의 뒤에는 컨텐츠계의 공룡이 있었으니까.

바로 디즈니가 말이다.

돈으로는 어딜가도 안밀린다.

“다 덤벼.”

***

그 날 이후로도 폭스는 계속해서 다운에게 연락이 왔다.

[하하! 다운! 제가 저희 본사에 강력하게 어필해서 상향된 계약 조건을 얻어왔습니다!]

저런 식으로 연락 온 것만해도 일주일 동안 여섯 차례였다. 하지만 여전히 다운이 원하는 조건은 아니었다.

“1억 달러 넘습니까?”

[하하······ 그 정도는 아니지만 이번에는 그래도 8800만 달러에서······]

“내일은 일요일이니까 푹 쉬시고, 월요일에 다시 전화주십쇼.”

[자, 잠깐! 다운! 저희 폭스 스포츠의 인지도와······]

“그럼 좋은 주말 되세요.”

1억 달러도 못미치는 제안을 듣고있을 이유가 없다.

지난 일주일 사이에 치뤄진 홈 3연전에서 레이스는 또다시 3연속 매진을 기록했다.

구장을 옮기게 되었을 때, 레이스가 가질 수 있는 티켓파워가 얼마나 되는지를 다시 한 번 증명한 것이었다.

“슬슬 입질이 올 때가 됐는데······”

이정도 보여줬으면 눈치를 보고있던 방송국들도 참전을 해야 정상이다. 정말 이 판에 끼고싶어하는 공룡들이 말이다.

똑똑

“들어와.”

리타가 살며시 문을 열었다.

“ESPN 메이저리그 파트장인 토비 크루즈의 전화입니다.”

다운의 입꼬리가 쭈욱 올라갔다.

“돌려줘.”

“3번으로 돌려드리겠습니다.”

곧이어 다운이 전화를 넘겨받았다.

“레이스 단장 정다운입니다.”

[반갑습니다 단장님! ESPN 메이저리그 파트장인 토비 크루즈입니다.]

“반가워요 토비. 무슨 일로 전화주셨죠?”

[단장님이 예상하시는 그 일로 전화를 드렸습니다.]

“제가 예상하는 일요?”

다운이 한 번 의뭉을 떨자 토비가 다시 한 번 말했다.

[중계권 문제 말입니다.]

“그게 벌써 거기까지 퍼졌답니까? 폭스가 정보관리를 제대로 못하는 모양이네요.”

다운이 의도적으로 정보를 흘렸다는건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토비는 다운의 말에 동의했다.

[폭스 놈들이 하는 짓이 다 그렇죠. 저희와 함께하신다면 그럴 일은 없으실겁니다.]

“글쎄요. 그건 조건을 좀 들어봐야 알 것 같은데······”

[그래서말인데, 지금 제가 좀 찾아뵈도 되겠습니까?]

그의 말에 다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얼마든지 환영이다.

“약속이 있어서 오후 두 시에 한······ 30분 정도밖에 시간이 없을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약속은 없지만 의심의 씨앗을 하나 심어놓긴 해야한다.

[혹시 그 약속이 다른 방송국입니까?]

예상대로 행동하는 그의 말에 다운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것까진 말씀드리기가 힘드네요.”

이렇게 말하면 토비는 알아서 온갖 상상을 해댈 것이다.

[알겠습니다. 두 시. 딱 맞춰서, 아니지. 그것보다 조금 일찍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그때 뵙는걸로 하죠.”

다운이 만족스러운 낚시에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리타?”

다시 리타가 몸을 내밀었다.

“CBS에서 전화가 와서 오늘 뵙고싶다고 합니다. 돌려드릴까요?”

낚시가 낚시가 아니게 되었다.

< 109화 - 말하는대로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