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탬파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
스탠하우스와의 밀회를 마치고 탬파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다운은 미키에게 앞으로 해야할 일에 대해 말했다.
“앞으로 다른 구단에서 들러붙지는 않는지 확인 철저히 하고.”
“북동부 스카우트인 대니를 전담으로 붙여놓을 예정입니다.”
“혹여나 필요한거 우리가 간단하게 제공할 수 있는건 출처 돌려서 제공해주고. 야구용품 같은거 있잖아.”
“익명의 후원자로 잘 기부하겠습니다.”
드래프트 날 이전까지는 더 이상 할 수 있는게 없다. 스탠하우스에 대한건 이 정도만 해놔도 충분하다.
“후······ 제발 드래프트까지만 멀쩡히 있어줬으면 좋겠는데······”
혹여나 보라스 같은 에이전트가 들러붙어서 다른 구단에 자신을 홍보하기라도 하면 죽쒀서 개 주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여튼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탬파에 도착할때까지만이라도 푹 쉬세요.”
“도착해서 뵈요 단장님.”
일부러 부녀간에 편하게 있을 수 있도록 다운은 그들과 살짝 떨어진 자리를 예약했다.
비지니스 클래스라고는 하지만 좌석이 조금 더 넓고 편할 뿐 옆사람과는 붙어있어야하기 때문에 자신이 근처에 있으면 불편할수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다운은 왼쪽 라인 제일 뒤에 위치한 플래너건 부녀와는 정 반대인 오른쪽 제일 앞 좌석을 예매했다.
‘눈치없는 상사는 최악이지.’
다운은 나름 괜찮은 짓을 했다고 생각하며 자신에게 배정된 자리로 갔다.
‘누가 있네?’
다운의 자리는 창가 좌석. 그런데 복도쪽 좌석인 옆자리에는 이미 누가 앉아있었다.
“제가 안쪽자리라 그런데 잠시만 일어나주실 수 있을까요?”
다운의 정중한 말에 앉아있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어?”
익숙한 얼굴에 다운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라?”
그녀도 다운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 본······”
다운이 기억을 뒤지기에 앞서 앞에 있던 여자가 일어나며 손을 내밀었다.
“스칼렛 패닝턴이에요.”
“아!”
이름을 들으니까 기억이 떠올랐다.
“디백스 단장님?”
패닝턴이 화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기억해 주시네요?”
“이런 미녀분을 어떻게 기억 못하겠습니까?”
“그런거치고는 기억못하시는 것 같던데요?”
“워낙에 예쁘셔서 얼굴밖에 기억에 남질 않았나보네요.”
다운의 입 발린 말에 패닝턴이 웃으며 다운이 지나갈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말은 잘하시네요.”
“패닝턴 양도 단장 일 좀 오래하다 보시면 이렇게 되실걸요?”
“능글맞아지는건가요?”
“직업에 대한 이해도와 경험이 는다고 해두죠.”
“그거 괜찮은 말이네요. 다음에 써먹어볼게요.”
다운이 자리에 앉자 패닝턴도 자리에 앉았다.
“그나저나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십니까? 갑자기 아는 얼굴이 옆자리에 나와서 깜짝 놀랐습니다.”
“저도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갑자기 탬파의 단장이 여기에 오다니!”
다운이 그녀를 보자마자 든 생각은
‘혹시 이 사람도 스탠하우스를······?’
이었다. 디백스의 이번 시즌 드래프트 순위는 레이스보다 훨씬 위인 12번째. 앞서 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었다.
혹여 그게 아니라 다운과 둘이 있을 기회를 잡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거라면?
‘그것도 위험하다.’
애초에 다운의 로드 아일랜드 행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사항이다. 글라이드와 파트장들, 캐시 감독, 리타를 제외하고는 다운이 여기에 왔다는 걸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다운의 행선지를 알아냈다는 건 누군가에게서 정보를 빼냈다는 소리가 된다. 그것도 레이스의 고위층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스탠하우스에 대한 정보 역시 새어나갔을 확률이 높았다.
‘어느 쪽이든 사절인데······’
다운은 자신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는 것을 감지하고는 재빨리 풀어냈다. 다행히 패닝턴은 그걸 못 본 모양이다.
“제 어머니가 여기 계시거든요.”
“애리조나가 아니라 로드 아일랜드에요?”
“네. 가정사가 조금 얽힌 일이에요.”
저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하지만 일단은 믿어보기로 했다.
“스토브리그때도 바빴는데 시즌을 시작해도 바쁠거라고 하길래 짬내서 왔죠. 다운은 뭐하러 오셨었어요? 아, 다운이라고 불러도 되죠?”
“물론이죠. 제 친구들도 저보고 정이라는 단어보다는 다운이 좀 더 입에 붙는다며 그렇게 부르더라고요.”
“호호! 맞아요! 다운이라는 단어가 입에 착착 달라붙잖아요. 그래서 뭐하러 오셨다고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다운은 오른손을 움직여 미키에게 ‘디백스 단장이 옆자리이니 아는 척 하지말고 알아서 해산.’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저도 개인적으로 볼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꽤 친하게 지내던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요.”
다행히 오늘 다운의 패션은 검정색을 위주로 한 차분한 계열의 정장이었다. 그래서인지 패닝턴도 큰 의심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심이 크시겠네요.”
“저보다는 친구 상심이 크죠. 저는 그 분을 본 적이 없거든요.”
있지도 않은 사람을 어떻게 만나볼 수 있겠나.
“그저 친구가 잘 견디길 바랄뿐입니다.”
“다운같은 친구가 와서 위로해주고 갔으니 분명 잘 헤쳐나올거에요.”
한 쪽은 가정사가 얽혀있고, 또 한 쪽은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야기. 둘 다 대화의 주제가 되기에는 불편했다.
“아, 그러고보니······”
이상한 것이 하나 있었다.
“네?”
“왜 애리조나가 아니라 탬파로 가시는거죠?”
이 비행기는 애리조나 행이 아니라 탬파로 가는 비행기였다. 로드 아일랜드에 패닝턴이 올 수는 있지만, 거기에서 탬파로 가야할 이유는 없었다.
다운의 말에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일이 좀 있어요. 하고 싶지도 않은 일 때문에······”
“구단주님 손녀분이신데 누가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시킵니까?”
“그 구단주님이 시키더라고요. 하······”
한숨을 폭 내쉰 그녀가 고개를 치켜 올리며 물었다.
“대런 아시죠?”
“Ms.패닝턴이 말하는 대런이 제가 양키스 단장일 시절에 제 밑에 있었고, 현재 양키스의 단장으로 재직중인 양키스 구단주의 아들인가요?”
“뭔가 설명이 장황하긴한데 맞는 것 같네요.”
“그 대런이랑 식사하고 오래요.”
“무슨 소개팅이라도 된답니까?”
“할아버지는 그걸 원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패닝턴이 골이 아픈지 고개를 숙이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댔다. 그 틈을 타 다운은 대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To. 빌어먹을대런
소개팅한다며?
다행히 대런이 폰을 보고 있었는지 칼답이 왔다.
From. 빌어먹을대런
그건 또 어디에서 들었답니까?
오케이
사실관계는 확인했다.
- 곧 비행기가 출발할 예정입니다. 승객 여러분들은 핸드폰을 포함한 전자기기들의 전원을 꺼주시기 바랍니다.
다운은 모범시민이 되고자 하는 사람답게 곧바로 폰의 전원을 껐다. 두 시간 45분 동안 대런이 궁금해하기는 하겠지만 알 바 아니었다.
‘대런이랑 식사자리가 있다면 탬파로 올만하지.’
양키스의 스프링 트레이닝 구장은 탬파에 위치해있다. 그 말은 곧 단장인 대런도 탬파에 있다는 말.
“대런 정도면 괜찮지 않나요? 생긴것도 멀쩡하고, 성격도 단장 일 하는 사람치고는 괜찮은 편에 속하고, 돈 많은 재수없는 놈 같지 않고, 사생활도 깨끗하잖아요.”
딱 하나. 아버지가 지랄맞고 재수 없다는 것만 빼면 대런은 참 괜찮은 사람이다.
“대런이 뒤통수 때렸다던데 평가가 후하네요?”
“정확히는 대런이 아니라 그 아버지가 그랬으니까요.”
“둘 사이의 묵은 감정은 없나봐요?”
“있긴한데, 요긴하게 잘 써먹고 있죠.”
“양키스와 탬파 사이에 딜이 꽤 많더니 그런 비화가 있었나보네요.”
“저는 제가 단장시절 높게 평가했던 선수들을 데려올 수 있고, 대런은 필요한 자원과 저에 대한 용서를 받을 수 있으니 서로 윈윈이라고 할 수 있죠.”
다운의 뻔뻔한 표정에 패닝턴이 킥킥 웃었다.
“재밌으신 분이었네요. 저번 단장 회의 때는 몰랐는데 말이죠.”
“단장회의는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니까요.”
지금도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승냥이 29명과 함께하는 단장회의와 고작 여우 하나와 함께하는 대화에서의 여유는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여튼 대런이 마음에 안드는건 아니에요. 어릴때부터 봐왔으니까요. 하지만 굳이 대런과 엮이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그냥 친한 남동생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대런도 똑같을걸요?”
그럴만도하다. 다운은 대런의 스타일을 잘 알고 있다. 그가 만났던 여자를 두 명 봤었는데 둘 다 확실한 취향이 엿보이는 타입이었다.
‘운동 잘하는 근육 빵빵한 여자였지······’
첫 번째 여자친구는 프로 축구선수였고, 두 번째 여자친구는 보디빌더였다. 대런의 취향을 생각해봤을 때, 배우와 같은 외모를 가진 패닝턴은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아깝네요.”
다운의 말에 패닝턴이 입을 쭉 내밀며 쏘아붙였다.
“뭐가요?”
“단장 집안끼리의 결합이라······ 뭔가 드라마에서나 나올 것 같은 그런 스토리잖아요.”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이야기다보니 현실에서는 불 수 없는거죠.”
“제가 만약 구단주 집안이었으면 그런 미팅 제안 한 번 정도는 받아들였을텐데.”
다운의 말에 패닝턴이 고개를 갸웃했다.
“당신도 구단주 집안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제가요?”
“다운도······”
다운의 표정을 확인한 패닝턴은 그가 정말로 모른다는걸 알아챘다.
“정말 모르시나보네요.”
“제가 뭘 모른다는거죠?”
패닝턴은 다운의 말에 답하는 대신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신다면 됐어요.”
그리고 다운이 뭔가를 물어보기도 전에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다운은 이제 단장 몇 년차시죠?”
“양키스에서 4년하고 레이스 1년 끝났으니까 이제 6년차죠.”
“다운은 단장일이 좋아요?”
흥미로운 질문이다.
‘나도 단장 1년차 때 저런 고민 많이 했었는데.’
갑자기 옛날 생각이 새록새록난다.
“시즌 전에는 바쁘고, 스프링 트레이닝때도 바쁘고, 그 뒤로도 계속해서 쉴 시간은 없고, 트레이드 마감기한 지나도 또 새로운 선수 올려야해서 바쁘고, 포스트시즌을 못갔는데도 가을에 쉬지도 못하고 선수들 연봉 협상 대비해야하고······ 그뿐만이 아니더라고요. 단장들에게는 매일 아침마다 찔러보기식으로 연락오고, 파트장들은 뭘 그리 연락이 많이 오는지······”
쌓인게 많았나보다.
“근데 올 시즌 단장으로 처음 일하는거 아니에요?”
“지난 시즌 부단장으로 일했거든요.”
자신과 대런의 관계와 비슷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 생각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패닝턴은 검지를 좌우로 흔들었다.
“다운과 대런의 관계하고는 달라요. 저희는 단장에게 미리 3년의 계약을 주었고, 그 3년의 마지막에는 제가 부단장으로 인수인계를 받을 예정이라고 계약서상에 명시했거든요.”
“그러면 부단장을 하시기 전에는 뭘 하셨어요?”
다운이 알기로 패닝턴은 29살이었다. 정상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7년 정도 시간이 더 있었다는 말이다.
“경영학 전공하고 이제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구단을 저한테 물려줄거라고 하시더라고요.”
“다른 손주들은 없으신가요?”
“있죠. 세 명이 더 있는데 걔들은 구단보다는 다 회사에서 일하고 싶어해요. 저만 야구를 좋아해서 어릴때부터 할아버지하고 야구를 보곤 했거든요. 그래서 다시 대학 들어가서 스포츠 매니지먼트 전공으로 4년을 더 배우고 2년간 에이전시에서 일했죠.”
“프런트에서 일한게 아니라 에이전시요?”
“네. 보라스 코퍼레이션에서 일했어요.”
그녀의 말에 다운의 눈이 땡그래졌다.
“오 정말요?”
보라스 코퍼레이션은 신입을 뽑는 기준이 상당히 높았다.
“저도 처음 에이전시 문을 두드릴 때 보라스 코퍼레이션 문을 두드렸었는데요.”
“결과는요?”
“실패했죠.”
만약 보라스 코퍼레이션에 들어갔다면 지금까지도 에이전트를 하고있지 않을까?
“그나저나 에이전시라······ 어떻게보면 저랑 비슷한 과정을 밟으셨네요.”
다운의 말에 패닝턴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
“과정만 비슷하죠.”
< 97화 - 탬파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