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잘못했습니다 >
며칠 뒤 다운의 사무실로 누군가가 찾아왔다.
“맷 도미닉!”
웃으며 양팔을 벌리는 다운에게 도미닉 역시 허허롭게 웃으며 다가갔다.
“다운 정!”
다운은 덥수룩한 그의 수염을 가리켰다.
“수염 기르셨네요?”
“손녀 놈이 한 번 길러보라고 해서 말이야.”
“잘 어울리네요.”
약간은 새까만 히스패닉 특유의 구릿빛 피부에 하얀 수염이 어우러지니 뭔가 특이하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잘 빼입은 정장까지. 저기에 파이프만 딱 물면 어디 화보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섹시한 노년 신사로 보일 정도였다.
“오늘 무슨 일 있어요? 왜 이렇게 차려입고 왔어요?”
다운의 말에 도미닉이 윙크를 하며 답했다.
“오늘 직업면접이 있어서 말이지.”
“모델 면접같은거 아니죠?”
“그럴리가. 오늘 이렇게 입고나면 한동안은 또 입을 일 없으니까 꾸며본거지.”
다운은 씨익 웃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들어가죠. 리타 물 두 잔만.”
도미닉은 건강상의 문제로 물을 제외한 다른 음료는 거의 마시지 않는다.
“그걸 기억하고 있어?”
“당연하죠. 이 직업은 디테일이 없으면 못해먹죠.”
리타가 물 두 잔을 놓고 사라졌다.
“양키스는 어쩌다 관두신거에요?”
도미닉은 양키스에서 가장 오래된 클러비였다. 근속기간만 장장 19년. 오리올스에서 16년간 일했던 것까지 합하면 클러비로만 무려 35년을 일한 베테랑 중에서 베테랑이었다.
다른 구단에서는 모르지만 양키스에서만큼은 그는 클러비들의 대장 그 이상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클러비로 불렸지 양키스타디움의 모든 것들을 관리하는 구장 관리 파트장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런 그가 양키스를 그만두다니.
다운의 말에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별거 있겠어? 어지간한 사람보다 구단에 오래 있었던 내가 눈꼴시었던 누군가가 있었던거지.”
“그런 놈 있다고해서 그만 둘 사람은 아니잖아요?”
“뭐 그런것도 있고, 손녀놈도 이제 떠났잖냐?”
도미닉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들 내외를 대신해서 손주를 키우고 있었다.
“이사벨라 어디 갔어요?”
“걔도 이제 성인이야. 재작년에 대학갔다.”
“아, 벌써 그렇게 됐어요? 어디 갔는데요?”
“다트머스 대학.”
아이비리그에 속한 대학에 자신의 손녀가 갔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는지 그는 한동안 손녀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았다.
“여튼 이사벨라도 없는데 물가도 비싼 뉴욕에서 굳이 다른 파트장들한테 치여가면서 남아있어야하나 싶기도 하고 그러더라고. 나랑 소피아는 복잡한 뉴욕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거든. 살기 위해서 거기 있었을 뿐이지. 양키스가 돈을 제일 많이 줬거든.”
“근데 제가 제안을 한거네요?”
“그렇지 뭐. 안그래도 거기 남기 싫었는데 양키스와 비슷한 조건에 세금도 없고, 그리고 플로리다의 해변가까지! 딱 노년을 보내기 좋은 조건이잖아?”
은퇴할 나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플로리다가 인기있는 이유가 모두 들어있었다.
“거기다가 우리 이사벨라가 친구들 데리고 놀러오려면 그 숨막히는 뉴욕보다는 바다가 펼쳐진 탬파가 낫지 않겠어?”
하여간 손녀바보다 손녀바보. 다운은 못말리겠다는듯이 고개를 흔든 뒤 미리 준비해둔 계약서를 내밀었다.
“계약서는 읽어보셨죠? 그거랑 같은 내용인데, 달라진 부분이 있나 확인해보세요.”
도미닉은 품에 있던 안경집에서 돋보기를 들어 꼈다. 그리고 꼼꼼히 계약서를 읽었다.
“흠······ 달라진 건 없는 것 같네.”
클러비 헤드치프 겸 구장관리 총괄. 그게 다운이 제안하는 직책이었다.
“근데 구장관리 총괄은 원래 있지 않았나?”
“있었죠. 근데 그만뒀어요. 이번에 노조파업이 있었잖아요? 그것 때문에 좀 불안했나봐요. 그래서 좀 더 안정적이고 요즘 공격적으로 확장하고 있는 MLS쪽으로 넘어갔어요. 돈도 더 많이 받았으니 만족하겠죠.”
“내가 누구 자리를 뺏은건 아니구만.”
“누가 잘 하고 있었다면 이렇게 맷을 데려올 일도 없었을걸요?”
그러면서 다운은 품에 있는 만년필을 내밀었다.
스스스슥
도미닉이 계약서 위에 유려한 사인을 남겼다.
“잘 부탁해요 맷.”
“나야말로.”
계약을 마쳤으니 레이스에 있는 문제를 들여다볼 차례다.
“레이스에 문제가 있다며?”
“있죠. 그것도 아주 큰 문제가.”
“클러비들 사이 문제야?”
“네.”
다운이 자세한 말을 하지 않아도 도미닉은 그게 무슨 문제인지를 알아차린 것 같았다.
“홈 원정 문제지?”
“역시 척하면 척이네요.”
메이저리그에는 클러비라는 존재가 있다.
보통 구단마다 30명 정도의 클러비들이 있는데 이들은 유니폼 세탁, 야구용품 관리, 간식, 음료 등등 선수들이 야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돕는 일을 맡아서 했다. 그러다보니 클러비가 없으면 선수단, 라커룸은 돌아가지 않는다는 말이 나오는것이고.
뭐 여기까지는 큰 문제 없다.
애초에 절대적 갑은 메이저리거들이고 클러비는 팁을 받고 그들을 도와주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다보니 이들 사이에서 갈등이 있다고해서 뭐 엄청난 문제가 되어서 돌아오는건 아니었으니까.
문제는 이 갈등이 개개인 사이에서의 갈등이 아니라 집단간의 갈등으로 번졌을 때 일어난다.
“처음에는 홈이랑 원정만 신경전을 하곤 했어요. 뭐 제가 부임하기 전부터도 뻔질나게 싸워댔다고 하더라고요.”
홈팀 클럽하우스와 원정팀 클럽하우스는 각각 15명으로 이루어져있고, 각각의 헤드 아래에서 별개로 운영되고 있었다.
레이스 선수들을 전담으로 케어하는 홈팀 클러비들과 소속은 레이스지만 원정온 다른 팀 선수들을 전담하는 원정팀 클러비들. 딱 봐도 친할 수가 없는 사이다. 그래서 거기까지는 어렵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근데 이제는 다른 구장 관리 직원들까지도 거기에 동조하더라고요.”
구장 직원들까지도 그들 사이에 휘말려가다보니 분위기는 점점 더 흉흉해져갔다.
“로테이션은?”
“돌려봤죠.”
다운의 표정을 읽은 도미닉이 뭔가를 알아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갔구만.”
“네.”
클러비는 자유로운 존재다. 기본적으로 계약직이다보니 한 시즌만하고 나가는 경우도 많았고, 자리가 비면 경력이 있는 클러비가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뽑는건 대부분 클러비들의 헤드의 권한.
그러다보니 로테이션으로 다른 팀에 들어간 클러비 멤버가 그 일자리를 그만두고 서로 다시 자신의 홈그라운드로 불려와 계약을 맺는 것이다.
“단장의 권한으로 그러지 말라고 해보지.”
“그러려고도 해봤죠. 문제는 그 놈들이 이 주변 클러비들을 다 잡고있다는거에요.”
‘이쪽 업계가 좁은거 알지?’는 이야기는 어딜가나 통하는 이야기다. 클러비들의 세계 역시 굉장히 좁았다. 특히나 탬파베이라는 한정된 지역에서 일하는 클러비들이 서로를 모른다는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클러비는 기본적으로 그 지역의 모든 행사 관계자들과 커넥션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한 다리만 건너면 다들 아는 사이가 되는 것이다.
“자르면 그들을 대체할 사람이 없어요.”
“두 놈이 꽉 잡고있나보네.”
“맞아요. 문제는 두 놈 다 똑똑한 놈들이라는거죠. 자신들의 위치를 잘 알고 있거든요.”
아무것도 아닌, 구단 입장에서는 최하위층에 속해있는 클러비들이다. 하지만 없으면 선수들은 물론이고 구단 관계자들 역시 불편함이 급증할거다.
잡일은 어떻게 처리한다쳐도 선수들이 원하는 공연 티켓, 식사 예약은? 모두 스탑될거다. 그렇다면 다른 구단 선수들이 레이스에게 가지는 이미지 역시 더 하락하겠지.
“저번 주에는 저한테 찾아와서 뭐라는지 아세요?”
“뻔하지 뭐.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겠지.”
“맞아요. 그 놈들이 하나를 고르라고 하더라고요.”
“간이 배밖으로 나왔나보구만.”
“대안이 없다는걸 그놈들도 아니까요.”
다운의 말에 도미닉이 자신을 가리켰다.
“하지만 이제 대안이 생겼죠.”
“나로?”
“네. 밑에 친구들은 많이 데려왔어요?”
“데려오기는 무슨. 내가 얼마나 영향력이 있다고.”
도미닉이 저런 말을 하긴 했지만, 다운은 알고있다. 클러비 업계에서 유명하기로는 손에 꼽을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서른 명 정도는 금세 채울수 있다는걸 말이다.
“그냥 이 근처에서 뽑을 생각이야. 클러비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고 싹싹하게만 굴면 되니까.”
“티케팅 같은건요?”
“그건 내가 이어주면 돼. 뉴욕에서 일했다고 이쪽 커넥션이 없는것도 아니니까.”
역시 도미닉. 든든하다!
“그럼 이제 문제아 두 놈을 불러야겠네요.”
“바로 자르게?”
“그럴 생각이었는데······ 다른 좋은생각 있어요?”
“쓸모가 있으면 써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의 말에 다운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맷이 알아서 정하세요. 저는 맷한테 클러비 전권을 드릴테니까요. 리타!”
***
홈 팀 클러비 헤드인 롭과 원정 팀 클러비 헤드인 알베르토는 오늘도 서로를 향해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롭 이 개자식아! 오늘 세탁기는 우리가 먼저 쓴다고 했잖아!”
“알베르토 미안하지만 너보다는 우리 레이스 선수들이 우선 아니겠어? 그러니 양보 좀 하지?”
“그 핑계도 한두번이어야지! 거기다 아직 원정팀은 오지도 않았어! 우리 레이스 선수들만 있는데 무슨 개소리야?”
“너희는 마이너리거들을 맡고 있잖아. 마이너리거들보다는 그래도 우리 메이저리거들이 우선이지.”
“하! 그래 그건 그렇다 쳐! 그러면 어제 공 닦을 때는 왜 네 명만 보냈냐? 다섯 명 보내기로 했잖아.”
“우리 팀 선수들이 필요하다는 일이 있어서 한 명 못간거라고 내가 어제 설명하지 않았나? 너희도 그런 일 있으면 빠지면 되잖아? 아~ 그러고보니 마이너리거들은 너희를 부려먹을 팁을 주기 힘들겠구나?”
“홈 클럽하우스 맡고 있다고 다인줄 알아?”
“얼씨구? 난 그런 말 한적 없는데? 자격지심이라도 있으신가봐?”
“뭐라고?”
으르렁대는 두 사람 사이로 프런트에서 가장 무뚝뚝하고 사무적이라고 알려진 리타가 들어왔다.
“단장님이 두 분 다 부르셨어요.”
“단장님이?”
“우릴?”
다운은 클러비들과도 꽤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클러비를 부르는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타이밍이 타이밍이다보니 서로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뭐 꼰질렀냐?”
“찔리는게 있으신가봐?”
계속해서 으르렁대는 두 사람을 향해 리타가 무심하게 말했다.
“단장님 기다리실텐데 계속 그렇게 서 계실겁니까?”
“두고보자.”
“그 말 하는 사람치고 무서운 사람을 내가 본 적이 없는데 말이지.”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으르렁대며 리타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잠시 후, 무뚝뚝한 표정을 하고있는 다운의 앞에 섰다.
“오늘 단장님 무섭지 않아······?”
다운이 풍기는 분위기에 압도되었는지 여기 들어오기 전까지만해도 콧대를 높이던 롭이 슬그머니 말했다.
알베르토 역시 그의 의견에 100% 동의했다. 하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어? 근데······’
다운의 옆에 앉아있는 노신사의 얼굴이 뭔가 익숙했다. 자신을 향해 웃고있는 그를 조금 더 자세히 관찰했다.
‘저 사람은······ 설마 맷 도미닉?’
오리올스의 클러비로 있다가 너무 일을 잘해서 양키스에서 데려간 바로 그 클러비.
수염이 있어서 못알아볼 뻔 했지만 보면 볼수록 그가 도미닉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옆에 있는 이 멍청한 놈은 아직도 모르는 것 같지만.
심상치 않은 분위기 속에 다운이 입을 열었다.
“내가 오늘 두 사람을 왜 부른 것 같아?”
다운의 말에 롭은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얼굴이 밝아졌다.
“혹시 저희 중에서 누군가를 고르신······”
하지만 알베르토는 달랐다.
쿵!
그는 곧장 무릎을 꿇었다.
“단장님 잘못했습니다.”
< 92화 - 잘못했습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