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화 - 악마 퇴장 >
표면상으로 아직 CBA 협상은 멈춰있다. 그리고 직장폐쇄는 여전히 진행중. 따라서 구단과 선수는 따로 만나서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둘은 살짝 떨어져서 펜스에 몸을 기댔다.
“여긴 어쩐일이시죠? 네드 브링어 옆에 있어야하는거 아닙니까?”
네드 브링어는 올 시즌 FA 투수 최대어로 평가받는 선수다.
“하하! 저희는 아직 협상을 못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제 고객이 여기 있는데 제가 여기 있지 못할 이유가 뭐죠?”
저렇게 나오면 할 말이 없긴하다.
“혹시 이 고등학교에 제가 모르는 원석이라도 있어서 보러온겁니까?”
순간 다운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벨링엄의 존재를 아직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커. 하지만 스캇이 만약 이 사실을 알게된다면······?’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스캇 보라스와 손을 잡은 유망주를 20라운드 이하로 뽑을 수는 없을테니까.
다운은 표정과 목소리를 그대로 유지한 채 말했다.
“예전에 유명했던 보석이 여기 있다더라고요. 분명 망가진 줄 알았던 보석인데 예전 세공사가 다시 맡았다길래 어떻게 바뀌었는지 확인하러 왔죠.”
“하하! 세공은 좀 잘된 것 같습니까?”
“스카우트들은 괜찮을 것 같다고 하는데 저는 제 눈을 꽤 믿는 편이라서요. 이제 막 타석에 들어오는데 봐야 알 것 같네요. 조니 저 투수 최고 구속 얼마야?”
다운의 질문에 로벨이 보라스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정도의 소리로 말했다.
“95마일. 추가로 커브를 던지고, 제구는 그다지 좋지 않은 편이야. 내년까지 얼마나 제구를 잡느냐가 저 친구한테는 중요할거야.”
“내년에 나오나보네.”
“대학 진학을 원한다고는 하는데 내년에 얼마나 제구를 잡냐에 따라서 잡으려고하는 구단도 생길 것 같아.”
최고 95마일의 좌완투수가 드링크워터를 상대로 초구를 던졌다.
후웅!
시원하게 돌아나간 드링크워터의 스윙은 공을 스치지도 못했다. 하지만 다운의 눈길을 끌어가기에는 충분했다.
“확실히 예전의 스윙을 되찾았네.”
다운의 혼잣말에 보라스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성적 역시 예전처럼 나올겁니다. 하하!”
“그러기에는 날카로움이 많이 사라지긴 했습니다만. 예전의 그였다면 저런 아마추어의 공은 곧바로 담장으로 날려보냈겠죠.”
“겨울은 몸을 만드는 시기고, 선수에게는 슬럼프라는게 있기 마련이니까요.”
“말이라도 못하면······”
“그 말을 잘하니까 제가 최고의 에이전트인거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저렇게 얄미울수가 있는지. 표정을 보지 않아도 되는게 아니었다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지도 모르겠다.
그 사이 드링크워터는 두 개의 공을 더 상대했다. 하나는 존 밖으로 흘러나가는 커브. 그리고 다른 하나는 존 위쪽을 공략하는 패스트볼이었다. 드링크워터는 두 번 째 공에는 스윙하지 않고 세 번째 공은 파울로 만들었다.
‘존 설정 능력이 돌아오긴 했네.’
세 번째 공은 누가봐도 존 안에 들어오는 높은 공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커브는 다운이 보기에 슬라이더처럼 흘러나가며 존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나가는 그런 코스로 들어갔다. 그런데 드링크워터는 이에 현혹되지 않고, 그 공을 그대로 흘려보냈다.
아예 치지 않으려고 마음먹은게 아니라는 것은 돌아간 그의 허리를 보면 알 수 있었다. 분명 치려다가 내 공이 아니라는 생각에서 멈춘 것이었다.
그리고 맞이한 네 번째 공. 존 살짝 아래에 걸치려는 공을
따아아아악!
특유의 어퍼스윙으로 완벽하게 걷어냈다.
“휘익! 홈런이네요! 하하! 보셨습니까? 이게 바로 코디의 실력이죠.”
예전만큼의 위력적인 스윙은 아니지만, 분명 회복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뒤이어 수비에도 나서서 중견수 방면으로 날아오는 타구들을 안정적으로 처리해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이어보다는 못하지?”
“마이어는 따라가기 힘들지. 하지만 중견수 중에서 최상위권의 수비능력을 가지고 있다는건 의심할 여지가 없네.”
조용히 의견을 나누는 다운과 로벨을 향해서 보라스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코디를 데려가려면 적어도 1500만 달러는 주셔야할겁니다. 아 물론 계약은 1년인거 아시죠? 곧바로 대형 계약을 맺을 수 있을것 같으니까요 하하하! 다저스에서도 곧바로 다시 딜이 들어올 것 같네요 하하!”
“회복되는 기색이 있는 선수에게 투자하기에 1500만 달러는 너무 많은 금액 아닙니까?”
“회복이 되었다면 그리 많은 금액이라고 할 수 없죠.”
“저는 700만 달러 선이 적정 선이라고 보는데요.”
“그럼 우리는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을 것 같군요.”
“그게 드링크워터의 뜻입니까?”
“제가 대리인이니까 그렇게 생각하시는게······”
보라스가 그렇게 말하려는 순간 옆에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있었네요 스캇.”
드링크워터가 관중석에 모습을 드러냈다.
“코디! 하하! 여기 손님들이 오셔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보라스의 친근한 모습과는 다르게 드링크워터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제 손님들 아닌가요?”
“네 손님이 곧 내 손님 아니겠어? 하하! 난 네 대리인이잖아?”
“대리인이기는 하셨군요.”
“음?”
예상보다 훨씬 싸늘한 그의 반응에 보라스가 당황한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내가 언제 네 대리인이 아니었던 적이 있었나?”
“지금부터 그렇게 되겠죠.”
“뭐?”
“에이전트 계약 이제 해지합시다.”
보라스는 말문이 턱 막힌듯 멈춘 상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쩐지 보라스가 여기있다 싶더니.’
보라스는 돈이 되는 선수는 자신이 직접 관리한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아래에 있는 수많은 에이전트들을 보내 관리하곤 했다.
특히나 올 시즌처럼 브링어라는 대형 FA가 있는데도 그를 놔두고 여길 온다?
아무리 공식적으로는 모든 협상이 막혀있다고는 하지만, 드링크워터처럼 두 시즌을 망치고 구단에서 논텐더 방출당하는 수모까지 겪은 선수를 보라스가 직접 붙어서 관리한다는건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드링크워터가 직접 불렀던 것이었다.
“꿀잼아니냐?”
로벨의 귓속말에 다운이 올라가는 입꼬리를 잡고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쳤다.
“야. 그런말 하는 거 아냐.”
물론 뭔 말을 해도 얼이 빠져있는 보라스의 귀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드링크워터의 모습을 보고 보라스 역시 그가 부활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에게 돈을 가져다줄 수 있을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니 저렇게 좋은 표정으로 1년 최소 1500만 달러라는 금액을 제안했겠지.
“이번 대우로 많은걸 느꼈거든요.”
“아니 기다려봐 코디. 우리가 섭섭하게 해준게 있나? 없잖아.”
“담당이 바뀌었죠.”
“나에서 내 직원으로 바뀌었을 뿐이잖아?”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죠. 제가 습관적으로 스캇한테 전화하니까 그때 뭐라고 하셨죠? ‘이제 그런건 네 담당한테 얘기해 코디.’라고 하셨잖아요.”
다운은 옆에 있는 로벨에게 속삭였다.
“크~ 저건 너무했네. 상처받을만 했어.”
“팝콘을 들고왔어야 하는데.”
그걸 들었는지 보라스가 슬쩍 째려보고는 다시 눈을 돌렸다.
“그때는 내가 바빠서 그랬던거야. 알다시피 지금 네드가 일생일대의 기회를 눈앞에 두고 있잖아.”
“저는 일생일대의 절망 속에 있죠.”
그렇게 말하니 또 다시 할 말이 사라졌는지 보라스가 말을 멈췄다. 결국 계약을 해지하는 것을 수긍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랑 계약을 해지하고 싶다는거지.”
“네. 그래도 스캇이 저한테 해준게 있는데, 이 말 만큼은 만나서 해야할 것 같더라고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스캇.”
“부디 앞으로 네가 더 잘하기를. 널 등한시했던 배가 아플만큼 성공하길 바란다 코디.”
조금 더 질척댈 줄 알았는데 보라스는 생각보다 깔끔하게 드링크워터를 놔줬다.
마지막으로 포옹을 한 보라스가 다운에게 몸을 돌렸다.
“오늘 이야기를 하시는건 제가 도의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본인 소관이 아니니 보라스가 나쁜 마음을 먹고 ‘선수와 접촉한 레이스!’라는 식으로 언론에 뿌린다면 레이스의 이미지에 타격이 올 수도 있었다.
“감사합니다.”
다운의 말에 그는
“곧 한 번 뵙도록하죠.”
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떠났다.
‘더럽게 찜찜하네.’
아무리 생각해봐도 보라스와 만날 일은 없다. 그런데 그가 곧 한 번 보자는 말을 하고 떠났다. 대체 어디어 어떤 식으로 보자는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건 그게 아니지.’
드링크워터를 앞에 두고 다른 짓을 하는건 예의가 아니었다.
“저랑 이야기를 하고 싶으시다고요.”
“네. 일단 안으로 들어갈까요?”
요즘처럼 SNS가 발달해있는 시대에는 밖을 조심해야한다.
“제가 감독님께 양해를 구하고 방 하나를 준비해놨습니다. 거기로 가시죠.”
“학생들이 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드링크워터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 친구들은 지금부터 죽어날 예정이거든요. 절대 못옵니다.”
“그러면 가시죠.”
드링크워터를 따라 들어간 곳은 감독실이었다.
“감독님하고 엄청 친하신가보네요.”
“제 은사이시기도하고, 그분도 제가 확 뜬 덕분에 인정을 받으시기도 했으니까요. 아무데나 앉으세요.”
세 사람은 자리에 앉은 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제 로벨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저와 계약을 하고싶으시다고요?”
그런 이야기까지는 들은 적이 없었다. 로벨은 대체 무슨 말이냐는 듯 흘겨보는 다운의 눈을 외면했다.
“네. 조건만 괜찮다면 꼭 계약을 하고 싶습니다. 혹시 원하는 조건이 있으십니까?”
드링크워터는 불타오르는 눈으로 말했다.
“복수를 원합니다.”
이를 아드득 간 드링크워터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다저스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기회. 그게 바로 제가 원하는 겁니다. 솔직히 제가 다저스에서 해준게 얼맙니까? 최저연봉을 받는 3년간 연간 3000만 달러 이상의 활약을 해줬다고 자부합니다.”
“그렇죠.”
요즘 1war의 가치는 거의 1000만 달러에 달한다. 3년간 14.3의 war를 올린 그는 FA로 따지자면 1억 4300만 달러에 해당하는 활약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2년간 1200만 달러와 1300만 달러라는 연봉에 못 미치는 활약을 했다. 하지만 앞선 시즌들에서 해줬던 활약을 생각한다면, 그리고 그가 현재 다저스 팬들에게 가지는 프랜차이즈로의 의미를 생각한다면 방출까지 갔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자이언츠의 계약 제안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이언츠는 다저스에게는 역사적인 라이벌이다. 라이벌 팀에 들어가서 다저스를 혼내주는것. 그게 드링크워터가 그렸던 그림일거다.
“그게 아니라면 다른 내셔널리그 서부 팀들을 노렸겠군요.”
“맞습니다. 그들의 제안이 오는걸 기다릴 생각이었죠. 그런데 제안은 안오더라고요.”
다시 말하지만 직장폐쇄라는 상황이지만 다들 물밑에서 협상을 진행하곤 한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저 팀들에서는 연락이 오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는 스카우트조차 보내지 않았습니다.”
결국 2년 내내 시즌을 말아먹은 그를 믿지 못했던 것이다.
“그에 비해 로벨은 제 이야기를 들어주고, 저를 봐주고, 그리고 단장님까지 이렇게 직접 와줬죠. 그래서 제가 원하는 것과는 다르게 아메리칸 리그 팀이지만 이야기를 해보기로 마음먹은겁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다운의 머리에 그가 정말 원할만한 조건이 생각났다.
“저희와 계약하시면······”
< 86화 - 악마 퇴장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