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 난 아니야 >
연말에는 파티가 몰려 있어서 언제나 바빴다. 하지만 올해만큼은 아니었다.
어지간하면 언론에 선수단과 만나는 모습을 보이지 말라는 사무국의 권고에 따라 가장 바쁜 행사인 선수단을 포함한 12월 31일 파티가 직장폐쇄로 인해서 취소되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이번 연말은 아주 평온하게······
“구단주님! 이걸 직접 만드셨다고요? 요리 너무 잘하시는거 아니에요?”
“하하! 많이들 먹게나!”
분명 평온하게······
“한국에서는 이런다며? 부어라! 마셔라!”
“오늘은 야구를 잊고 떠들자고!”
“Cheers!”
평온하게 지낼 생각이었는데······ 옆 집 사는 어떤 노친네 때문에 모든 계획이 틀어졌다.
“레이스를 위해 힘쓰는 각 파트장들에게 식사대접을 하고 싶었는데 이번 기회에 한 번 해보려고. 너? 당연히 와야지! 내가 넘어가더라도 손님들이 옆집에 네가 있다는데 가만히 둘 것 같냐?”
그 결과 레이스 프런트의 중심인 파트장들과 리타까지 글라이드의 집에 초대받았다.
“올해 미뤄놨던 마블영화 다 보면서 힐링하려고 했는데······”
“하하 단장님 아직도 안보셨습니까?”
러셀이 꿍얼대는 다운 옆에서 깐족거렸다.
“저는 다 봤는데! 크! 특히나 그 장면이······ 컥!”
해서는 안될 말을 꺼내는 러셀의 목에 리타의 손날이 틀어박혔다.
“스포는 사형입니다. 저도 아직 안봤거든요.”
다운이 손을 들자 리타는 자연스럽게 하이파이브를 했다.
짝!
“나이스 잡 리타.”
“별 말씀을.”
진짜 스포하면 처벌하는 법을 만들어야한다.
“영화는 나중에 봐도 되잖아. 노총각마냥 그렇게 혼자 집에 틀어박히면 무슨 재미가 있겠냐? 안 그래?”
“나중에 볼 시간이 없으니까 그런거죠.”
시즌 중에는 메이저리그 선수들의 경기, 마이너리그 코치나 스카우트들이 추천한 팀 내 유망주들의 영상, 새로운 고교 선수들에 대한 영상, 혹은 다른 팀 좋은 유망주 추천 영상 등 온갖 야구 동영상들을 보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여유를 가져.”
글라이드의 옆에서 마케팅 파트장인 심슨이 슬며시 미소지으며 합류했다.
“그래도 제가 보기에는 예전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저는 예전에 다운이 금융가에서 일할때를 봤잖아요. 그때는 거의 걸어다니는 시체였죠.”
“맞아. 동태같은 눈깔을 하고는 삶의 의욕이 없는 놈처럼 다녔지.”
“그 당시에 비하면 저렇게 여유 없어보이는 모습도 좋아보입니다.”
하고 싶지도 않은 일을 할때랑 하고 싶은 일은 하는 지금이랑은 의욕이 다를 수 밖에 없었다.
다운 역시 예전의 의욕제로 상태의 자신이 떠올랐는지 민망한 얼굴로 주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조니랑 미키가 만난다면서요?”
다운의 말에 거스에게 시선이 돌아갔다.
“뭐야? 왜 날 그렇게 봐?”
클라인이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미키가 남자 데려올때마다 맘에 안든다고 했던 놈이니까 보는거지.”
자신의 옛날 행동이 떠올랐는지 거스가 헛기침을 했다.
“크흠! 너무 별로인 놈들만 데려오니까 그랬던거지.”
“호오? 조니는 괜찮다?”
“완전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스카우트로 능력도 있고, 미키한테는 항상 잘해주는 모습을 보고있거든.”
“다행이네. 네놈 때문에 미키가 평생 혼자 살 줄 알았는데 말이야.”
“내가 뭐 그리 심하게 했다고.”
“심하긴 했죠.”
“맞아. 거스가 좀 유난이었지.”
“크흠! 다들 그만하자고!”
오늘만큼은 야구 이야기를 잊고 떠들자고 했지만 야구단에서 일하는 야구광들이 할 이야기에서 야구가 빠지는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럼 이제 CBA는 완료된거네요.”
“비공식적으로는 협상이 끝났죠.”
“하······ 4200만 달러가 들어온다고 해서 좋아했더니 순식간에 2000만 달러가 더 들어가게 생겼네요.”
“그래도 2024 시즌 이후에 중계권료를 새로 계약할 수 있으니까 그걸 한 번 믿어보자고요.”
“스프링 트레이닝 구장에는 어떻게 연락해둘까요?”
“돌아가는 상황을 다 설명하지는 않았죠?”
“네. 그냥 현재 상황으로 인해서 늦어질 수 있다는 정도로만 이야기 해놨습니다.”
“그럼 협상이 완료되어야지 확실히 알 수 있을거라고, 아는게 없다고 말하세요.”
“숙소는 어떻게 할까요?”
항상 똑같은 장소에서 스프링 트레이닝을 하다보니 숙소 역시 언제나 같은 곳에서 하곤 했다.
“이제 슬슬 예약을 넣어둬야 할 때가 됐는데요.”
“똑같이 말하세요. 이번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고. 확실한 일정이 나와봐야 알 것 같다고.”
“그러다가 숙소를 못 구하면요?”
“숙소를 구하지 못하면 트로피카나 필드에서 하는 방법도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면 포트샬롯 시에서 불만을 제기하지 않을까요?”
“불만을 제기하기 전에 숙소를 먼저 제공해주겠죠. 선수들에게는 다 이야기 해놨죠?”
“네. 선수단에게는 따로 연락해서 개별적으로 준비에 들어가라 했습니다.”
“조나하고 배리한테 부탁도 했고요?”
다운은 파인트와 브래넌에게 돈이 없는 어린 유망주들을 데리고 혹시 같이 훈련을 해줄 수 있는지 물어봐달라고 했다. 마이너리거들은 스프링 트레이닝에 앞서서 어떻게 준비를 해야할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특히나 올 시즌은 지난 시즌 드래프트 된 이후 이례적으로 더블 A맛을 보게 된 두 재능들, 코너 재머(말린스와 트레이드되어 드디어 레이스로 올 예정이다)와 알렉스 알마다가 참가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을 각각 파인트와 브래넌에게 부탁했다.
“네. 다행히 두 선수 모두 부탁에 응해줬습니다. 각자 세 명씩 데리고 오프시즌 훈련에 들어갈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지원 필요하다고하면 돌려서 지원해주세요. 투수들한테 새 공은 다 지급했죠?”
“네 투수 한 명 당 공 다섯 개씩 지급해놨습니다. 바뀐 공이 확실히 좋다고 하더라고요.”
또 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들을 보며 글라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저 일벌레들······ 어떻게 구단주가 놀라고 판을 깔아줘도 놀지를 못하냐.”
그의 말에 클라인이 씨익 웃었다.
“저희에게는 이게 노는거나 마찬가지거든요.”
“하이고 퍽이나. 시즌 내내 스트레스 받아하는 너희들 얼굴을 내가 다 봤는데.”
어이없다는 듯이 클라인을 흘긴 글라이드가 다운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 FA 협상은 어떻게 되는거냐 그럼?”
12월 3일부터 곧바로 직장폐쇄가 이루어지다보니 그 전에 계약을 완료한 몇몇 선수들을 제외한 나머지 FA 선수들은 협상조차 이어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말이다.
“에이전시에서도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보여주기라는걸 알고 있어요.”
“물밑에서 협상하고 있다는 이야기구만.”
“그렇죠.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의 구단들은 뒤에서 협상을 진행하고 있을거에요. 그리고 CBA협상이 완료된 이후에 협상까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는 식의 언플을 하겠죠.”
“우리도 그러고 있어?”
“당연하죠.”
“우리는 누구랑 연결하고 있는데?”
“그건······”
궁금이 가득한 글라이드의 눈을 보며 다운이 웃었다.
“비밀이에요.”
다운은 벙찐 글라이드를 보며 낄낄 웃었다.
“다른 레이스 팬들이랑 마찬가지로 팬의 마음으로 기다리세요.”
***
이번 겨울 다운이 중점적으로 보강하려는 포지션은 아래와 같았다.
1. 갭 플레이어 혹은 괜찮은 잠재력을 가진 1루수
2. 록하트의 이적을 대비한 서브 내야수
3. 주워올 수 있는 괜찮은 선수들.
우선 가스파르가 은퇴했기 때문에 그의 자리를 메워줄 수 있는 1루수 한 명은 필요했다.
지난 시즌 후반기와 포스트시즌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 흘로첵이 있긴 하지만, 2년차 징크스라는 과학은 언제나 조심해야 할 사항.
지난 시즌의 활약 때문에 집중적으로 분석당해서 훨씬 어려운 한 해를 보낼 것이 눈에 선했다. 그렇기에 그를 대신해서 1루를 맡아줄 선수가 필요했다.
“알버트가 있긴 하지만 부족해.”
알버트 서머스는 1루도 가능하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올 시즌 처분 예정인 록하트의 빈자리를 그가 채워줘야했다.
같은 이유로 서머스가 현재 맡고 있었던 벤치 내야수가 필요했다. 내외야가 모두 가능한 앤더슨이 있긴 하지만 이번 시즌에도 포스트시즌을 노리는 입장에서 괜찮은 대체자원 하나정도는 더 있어야했다.
“트리플 A 수준에서 올릴만한 괜찮은 내야수가 없는게 문젠데······”
팜 내에서 가장 괜찮은 내야수인 세스 브라운은 지난 시즌 토미존 수술로 내년 시즌까지는 쉬는게 확정적인 상황. 더블 A와 트리플 A에 있는 남은 내야수들은 아직까지 메이저리그 수준에 도달하지도 못했고, 그럴 가능성도 낮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결국 하나를 구하긴 해야하는데 적당한 놈이 없단 말이지.”
괜찮은 선수가 없는건 아니었다. 내야 전 포지션이 가능하고, 타격도 나름 괜찮은 올리버 레이크가 이번에 FA 자격을 얻었다.
문제는 올리버가 5년 이상의 장기계약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적당한 갭 플레이어를 원하는 레이스 입장에서는 들어줄 수 없는 요구사항.
결론적으로 다운이 노려볼 수 있는 시장은 트레이드 시장밖에 없었다.
“아직 멜튼이 간 것도 아니고,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노릇이니까 일단은 내버려두자.”
록하트의 트레이드 대가로 괜찮은 내야수를 얻어올 수도 있을테니까.
남은건 괜찮은 선수들을 주워오는 일.
“어디보자······”
새해 첫 출근 날임에도 다운의 메일함 중 ‘스카우팅 리포트’에는 82개의 읽지 않은 메일이 와 있었다. 분명 22년 마지막 날 모든 메일을 읽고 갔는데 말이다.
물론 저 메일들 중에서 75개는 조니 로벨이 보냈다는건 함정이지만.
“저놈 시키는 연애한다면서 쉬지도 않고 메일을 보냈네······”
다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필터에 [주워올 놈들]을 입력했다. 그러자 75개 중에서 16개로 팍 줄었다.
하지만 남아있는 메일들을 본 다운의 표정은 여전히 찌푸려져 있었다.
“하 정말······”
다운은 곧바로 폰을 들어 조니 로벨에게 전화를 걸었다.
[헤이 가이즈! 조니야! 지금은 내가 전화를······]
“닥쳐 조니. 음성메시지 아닌거 다 알아.”
[젠장······ 이걸 안속네. 미키는 속던데.]
“미키랑 같냐? 내가 너를 몇 년을 봤는데.”
그걸 맞췄다는 생각에 쓸데없이 좋아지는 기분을 누른 다운이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흠흠! 조니 너 내가 회사 메일로 장난치지 말라고 했지.”
[장난이라니. 항상 난 업무에 진심이야.]
“근데 똑같은 이름으로 메일을 10개나 보내?”
[아니 그만큼 그 선수를 데려오고 싶다는거지. 그게 강조의 의미라는건 생각안해봤어?]
“하나로도 충분히 강조할 수 있잖아.”
양키스에 있을때 그런 적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그 정도 쯤이야 그러려니하고 넘길 수 있었다.
“근데 이번에는 좀 심했어. 미키랑 네 밑에 스카우트들까지 시켜서 16개나 보내는건 좀 그렇잖아.”
[미키? 내 밑?]
조니가 되물었다.
[난 시킨 적 없는데?]
< 84화 - 난 아니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