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열대의 가운데서 춤추는 북극곰 >
필립은 일그러지는 얼굴을 다잡으며 다운의 팔을 잡았다.
“단장님. 지금 저 제안을 들으시면 안됩니다. 제 제안은 여기 사무실까지만 유효하다는거 생각하셔야 합니다.”
오해가 있는 것 같다. 다운의 목적은 두 회사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둘을 싸움 붙이는 것이 다운의 목표다.
“어쩔 수 없네요. 그럼 여기서 받도록 하죠. 아니다. 이왕 이렇게 된거 삼자 회의로 하시죠. 리타.”
“스피커 폰으로 돌리겠습니다.”
잠시 후 회의실 중앙에 있는 스피커폰이 울렸다.
“레이스 단장 다운 정입니다.”
[코카콜라 홍보팀장인 릭 페데르센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
릭은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빠르게 다운을 말리려는 듯 말을 이어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다운이 빨랐다.
“반갑습니다 릭. 그런데 지금 이 자리에는 펩시에서 나온 필립도 있고, 스피커폰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을 우선 알려드려야 할 것 같네요.”
경쟁사가 듣고 있으니 말 조심하라는 경고에 릭이 헛기침을 하며 다급했던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커험! 필립이 듣고 있다고요? 오랜만이네 필립.]
“그러게 릭. 꼭 이렇게 우리 펩시가 가는 길에 끼어들어야 했던거야?”
[때마침 우리가 영향력을 확장하려고 하는 와중에 너희가 들어온거라고 생각은 안해?]
“우리가 먼저 발을 들였는데 뒤늦게 발을 들인놈이 문제 아니야?”
[그렇게 따지자면 우리가 먼저 발을 들인 콜라 사업에 뒤늦게 뛰어든 너희 펩시가 훨씬 잘못했구만.]
“뭐? 너희 콜라랑 우리 콜라는 아예 공정도 다르고 맛도 다른거 몰라? 매출도 밀리는 것들이 최초라는 것만 빼면 너희가 뭐 있어?”
[브랜드 가치는 너희가 훨씬 밀리는거 몰라?]
“시가 총액은 비슷한데? 이제 곧 역전 당하시겠어?”
[뭐가 어쩌고 어째?]
전화가 아니었다면 아마 멱살을 잡고 싸우지 않았을까?
이대로 지켜보는 것도 꿀잼이겠지만, 이 둘 사이에 끼어있다가는 고막이 터질지도 모른다.
“자자, 그만들 하시죠. 여기 싸우러 오신거 아니잖습니까?”
순간 필립이 ‘싸움 붙인게 지금 누군데?’라는 의미가 가득 담긴 눈빛을 날렸다. 다운은 그 눈빛을 애써 무시하고는 말을 이었다.
“유니폼 패치 스폰서 계약을 하러 오셨으면 제안을 하셔야하지 않겠습니까? 릭. 그쪽도 제안하러 오신거 맞죠?”
[네. 펩시가 어떤 제안을 했든 저희 코카콜라에서는 그보다 50만 달러를 얹어드리겠습니다.]
도발적인 릭의 말에 필립이 발끈했다.
“이 상도덕도 없는 것들이! 그따위로 제안하면 치킨게임 되는거 몰라?”
[우리보다 매출도 많다는 놈들이 이 정도도 못 써? 하여간 졸부들이란······]
저런 싸움도 좋지만, 정확한 금액이 이야기되지 않으면 다운도 더 이상 싸움을 붙이기가 어려울 수 있었다.
“그래도 필립의 말이 틀른 건 아닙니다. 그런식으로 가다보념 한도 끝도 없이 금액이 높아질 수 있으니까요. 아직 펩시의 제안도 모르시는 상황에서 나중에 발뺌하면 저희도 난처한 상황이 될 수 있고요. 이왕이면 정확한 금액을 말해주셨으면 좋겠네요.”
[좋습니다. 그럼 저희 측에서도 금액을 이야기 하도록 하죠. 저런 좀생이들이랑 계약하지 마시고 저희와 계약하는게 좋다는걸 보여드리겠습니다. 어디보자 흐음······]
릭은 잠깐 생각을 정리한 뒤 말을 이었다.
[1년 계약 아닙니까? 보나마나 1000만 달러도 안썼을 것 같은데. 뭐 쓰잘데기 없는 옵션 끼워서 1000만 달러까지 준다고 했겠죠. 거기다가 필립의 재량으로 300만 달러 정도는 더 쓸 수 있을테니······ 저희는 1350만 달러 제안드리겠습니다.]
많이 다퉈봐서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요? 아까는 본인 재량으로 200만 달러까지는 올려줄 수 있다던데.”
[남은 금액이 얼마냐에 따라서 본인의 인센티브가 되거든요. 뭘 얼마나 남겨먹겠다고 100만 달러나 아끼려고 하는지. 필립. 그거 해봤자 고작해봐야 1만 달러 더 들어오는데 그거 먹자고 계약을 날리려고 하나? 하여간······]
옆에 있는 필립의 하얀 피부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필립이 아무말도 없자 릭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다년계약으로 하시면 10년간 연 1500만 달러까지 쏴드리겠습니다.]
“개당으로요?”
[당연하죠. 한 쪽이 코카콜라인데, 다른 쪽이 펩시면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저희도 조건이 있습니다.]
“뭐죠?”
[지금이야 어쩔 수 없지만, 새 구장으로 이동하게 되면 저희와 계약하시는 동안 새 구장에서는 펩시제품을 판매하시면 안됩니다. 대신 저희 제품을 50% 싼 가격에 납품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새 구장에 대한 구장명명권이 아직 팔리지 않은걸로 아는데, 펩시가 새 구장 명명권을 사면 곧바로 계약을 해지하는걸로 하죠.]
“상호합의하에요?”
[물론이죠. 펩시가 저희보다 좋은 조건을 내서 구장명명권을 쟁취했다는데 저희가 거기서 계약을 어겼다고 달려들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선 협상권 정도는 10년 계약을 하는 관계인데 있을 수 있는거 아니겠습니까? 섭섭하지 않게 대해드릴테니 우선 협상권까지만 딱 주시죠.]
한 번 물고 놓치지 않는 맹수처럼 릭은 기회가 주어지자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듯이 준비해온 제안들을 늘어놓았다. 펩시의 제안을 예상해 그보다 앞서는 계약금액에 장기계약시의 이점, 게다가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의 우선협상권까지.
서로 윈윈할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이 들어간 계약이었다.
[어때 필립? 이 이상 가는 제안 할 수 있겠어?]
릭의 도발에 이를 으드득 간 필립이 씹듯이 말을 내뱉었다.
“으득! 펩시에서는 1400만 달러 제안드리겠습니다. 그리고 10년간 계약을 하시면 1550만 달러로 맞춰드리죠. 다른 조건은······”
[1450만 달러. 10년 계약 시 패치 당 1600만 달러로 맞춰드리겠습니다. 대신 가슴이라던가 봉제선에 따른 새로운 패치 위치가 나오게되면 우선 이동권을 주시는겁니다.]
필립의 제안이 끝나기도 전에 릭은 새로운 제안을 들이밀었다.
“1500만 달러. 그리고 10년 시 1620만 달러를 맞추겠······”
[이런 필립······ 너무 무리하는거 아냐? 그냥 나한테 넘겨. 콜라는 1550만 달러, 그리고 10년 계약 시 1650만 달러 드리겠습니다. 그나저나 신 구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트로피카나는 너무 낡았잖아요? 탬파의 지정학적 위치와 레이스의 이미지에 맞게 시원하게! 스프라이트 필드 어떻습니까? 탄산처럼 톡톡 튀어나가는 그런 이미지로 말입니다.]
“나쁘지 않네요.”
[그쵸? 스몰마켓임에도 매 년 폭발하는 레이스의 경기력을 보고 이미지가 정말 잘 맞다고 생각했거든요. 거기다 탬파라는 열대성 도시에 맞게 스프라이트의 시원한 이미지 역시 이에 어울리고요. 괜히 트로피카나 파크라던가 그런 구시대적인 이름을 지어주는건 새구장에게 미안한 일 아니겠습니까?]
“하긴 탬파의 이미지는 트로피컬하고는 조금 다르긴하죠. 최근 현대화가 많이 되기도 했고 관광도시라는 느낌이 많이 줄기도 했으니까요.”
[제 말이 바로 그겁니다! 신 구장으로 이전하면서 묵은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새로운 이미지로······]
다운과 릭 사이에서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지속되자 필립은 머리는 복잡해져만 갔다.
‘지를까? 말까?’
그에게 허용된 범위는 패치당 1500만 달러까지. 여기에 개인 재량으로 300만 달러까지 선조치 후보고로 시행할 수 있었다.
‘트로피카나 필드에서 코카콜라 제품들의 패치를 양 옆 소매에 달고 있는 레이스 선수들이라니!’
이것만큼은 절대! 결코!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신 구장의 개장이 언제라고 하셨죠?”
[그것도 몰라? 2024 시즌부터 새로운 구장에서 경기할 예정이잖아.]
확인차 물어보는 필립의 말에 릭이 빈정대듯 답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1년 1900만 달러. 패치 하나당 1900만 달러를 쓰겠습니다.”
말도 안되는 금액에 다운과 릭의 입이 동시에 다물어졌다. 이번만큼은 릭도 따라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대신 구장명명권과 이번 패치 계약 연장에 대한 우선협상권을, 그것도 코카콜라를 배제한 우선협상권을 원합니다.”
이번과 같은 장난질은 당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가득한 그의 말에 다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우선협상기간은 2024년 1월 3일까지로 지정하도록 하죠. 혹시 그 이상 바라십니까?”
“아뇨. 충분합니다.”
만약 협상이 결렬될 시 레이스에게도 대안을 준비할 시간은 필요할테니까.
계속해서 릭이 말이없자 드디어 필립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릭. 이제 그쪽 패는 다 떨어진건가? 더 하기 힘들어? 벌써 떨어져나가는건가?”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필립이 트로피카나의 이름 아래 코카콜라의 패치가 박히는걸 절대 막으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릭과 코카콜라는 트로피카니 필드라는 이름 아래 코카콜라가 들어가는 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저희는 2000만 달러 제안드리겠습니다. 그리고 10년 하면 2100만 달러까지 올려드리겠습니다. 이 이상 되겠어 필립?]
결국 필립은 백기를 들었다.
***
더 이상의 제안을 할 수 없었던 필립은 씩씩대며 회의실을 떠났다.
[하하! 드디어 트로피카나 필드 내부에 코카콜라의 이름을 박는 날이 오는군요!]
“근데 2000만 달러는 너무 쓰신거 아닙니까?”
다운이 걱정해줘야 할 일은 아니지만, 궁금한건 어쩔 수 없었다.
[괜찮습니다. 저희 회장님께서 어떻게든 코카콜라 이름을 박아넣으라고 하셨거든요. 후후! 필립 자식 분해할 표정이 눈에 선하네요.]
릭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단장님 그럼 1년짜리, 10년짜리 어떤 제안을 받으시겠습니까?]
“정확한건 자세한 계약서를 가지고 구단주님 재가를 받아야 하겠지만, 10년 계약을 선택하도록 하죠.”
다운의 선택은 10년 4200만 달러짜리 제안이었다. 1년짜리 계약을 할 수도 있었다. 그게 자유도도 높고 우선협상권 같은 것도 안줘도 되니까.
‘하지만 어느 누굴 데려와도 패치당 2100만 달러의 제안을 받기는 어려울거야.’
지금이야 펩시 덕분에 가격이 급등했지만, 새로운 구장으로 이전한 후에도 코카콜라에서 이런 제안을 할까?
트로피카나 필드 안에 코카콜라의 이름을 박아넣는다는 의미가 사라진 뒤에도?
절대 아니라고 본다.
“자 그럼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얼마든지요.]
“우선 코카콜라 제품은 당장에는 못 들여옵니다.”
매 년 고작 100만 달러 주면서 조항은 어찌나 세세하게 걸어놨는지, 코카콜라 제품은 트로피카나 필드에서는 아예 판매할 수 없었다. 선수들 조차도 말이다.
[이해합니다. 그럼 이버시티의 새 구장으로 이전한 뒤 부터 저희 제품을 독점으로 사용해주시는걸로 하죠.]
“납품은 아까 말했던 것처럼 일반적인 납품가에서 50% 할인해주시는 조건이죠?”
[물론이죠. 그리고 선수단에게 지급될 이온음료들 또한 공짜로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저희는 더그아웃에서 카메라가 잘 비추는 곳에 파워에이드 로고가 박힌 물통을 비치해 두겠습니다.”
[하하! 단장님이랑은 정말 말이 잘 통하는 것 같네요. 로고 같은 경우는 레이스의 색상에 맞춰서 리디자인 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구단명명권에 대해서는······]
“우선협상권을 드리죠. 하지만 안 될 확률이 높습니다. 저희 측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거든요.”
< 82화 - 열대의 가운데서 춤추는 북극곰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