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와일드카드 9회 말 >
투수가 한 이닝을 끝내기 위해서는 적어도 3개의 공이 필요하다. 한 타자 당 공 하나만 써도 아웃카운트는 만들 수 있으니까.
30구
30개의 공으로 이론상 10이닝도 던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언제까지나 이론상이다.
파아아앙!
후우웅!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 조나 파인트가 세 타자 연속 삼진을 기록하며 내려갑니다.
- 정말 다행입니다. 더지가 홈런을 맞으면서 흔들릴 수도 있는 상황인데 그걸 파인트의 이른 등판으로 흐름을 끊어버렸습니다.
- 확실히 캐시의 투수운용은 믿음직스럽네요.
칭찬일색인 해설과는 다르게 더그아웃의 상황은 조금 더 심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왜 이렇게 표정이 안좋아?”
12개의 공으로 3개의 삼진을 잡아내고 돌아온 투수의 표정이 아니었다.
“저 자식들 일부러 스윙 안하고 있어요.”
“파울 몇 번 났잖아.”
“그런데 느낌이 달라요. 치려고 스윙하는게 아니라 투구수 늘리려고 스윙하는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아주 불쾌한 그런 느낌이다.
“네가 오늘 많이 던지지 않을걸 알고 있을거야. 아마 저쪽에서도 20~30구 정도를 생각하고 있겠지.”
“하필 두 번째 타자 상대할때 깨달아서······”
그것만 아니었더라면 3구는 더 줄일 수 있었을텐데,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 아쉬웠다.
“내가 만약 저쪽이라면 다음 이닝에는 더 물고 늘어질거다.”
“제가 생각해도 그럴 것 같아요.”
세 번째 타자를 상대로 공격적으로 들어오는 파인트를 보고 일부러 스윙을 하지 않았다는걸 알아챘다는 것을 인지했을것이다. 다음 이닝부터는 분명히 물고 늘어질거다. 그리고 벌어놓은 2점을 어떻게든 지키려고 할 것이다.
“그 전에 최대한 점수를 뽑아야돼.”
타자들도 그 점을 아는지 비장한 얼굴로 타석으로 나섰다. 하지만 마음먹은대로 타석에서 결과가 나올리가 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10번 중 3번만 성공해도 굉장한 타자라는 말이 나오지는 않았을테니까.
따아아악!
- 드레이크의 타구가 내야를! 빠져나가질 못하네요.
- 오늘 레인저스의 수비 집중력이 장난이 아닙니다.
먼저 기세를 탄 레인저스의 집중력은 쉽사리 흔들리지 않았다. 투수가 흔들리면 수비가 잡아주고, 수비가 실수하면 투수가 다시 그걸 잡아주는 것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파인트의 뒤를이어 올라온 자비어 에르난데스를 상대로 추가 3점 홈런을 뽑아내며 점수차를 5점으로 벌리는데 성공했다.
“얘들아. 너무 흔들리고 있다. 다들 마음을 비워! 너희가 조급해하면 할 수록 네 배트는 더 빳빳하게 굳는다고 내가 항상 말했잖아!”
“수비 실수해도 괜찮아. 하지만 실수하고 넋놓지 마. 그것까지는 우리가 커버할 수 없어. 경기 중에는 집중력을 잃지 마!”
브래넌과 마이어가 어떻게든 어린 선수들의 집중력을 다잡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게 잘 안되었다.
“우리가 이기는걸 보러 오셨을텐데······”
“알고는 있는데 팬들에게 너무 죄송해서 힘이 빠지질 않아요.”
평소라면 기뻐했을 만원관중이다.
하지만 이 매치는 단두대 매치.
지는 팀은 더 이상 포스트시즌을 치를 수 없는 이 경기에서 자리를 가득 채운 팬들이 자신들이 지는 모습을 보고 있다는 생각은 곧 압박감이 되어 선수들을 짓눌렀다.
“제가 한 마디 해도 됩니까?
브래넌이 자리를 비켜주고 젊은 선수들 중에서 유일하게 제 실력을 발휘하고 있는 선수인 드레이크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이 멍청한 친구들아! 왜 이렇게 멍청하냐! 너희 관중석 한 번도 안봤지?”
수비 실수하고는 고개 숙이고, 타석에서 아웃당한 뒤 고개 숙이고. 오늘 경기에서는 고개를 들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관중석에 있는 팬들을 볼 면목이 없다보니 그들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작년에 있었던 놈들은 기억할거야. 우리 팀이 디비전에서 이길때도, 챔피언십에서 이길때도 여기 만원관중을 채운 적이 있었나?”
작년에도 이 자리에 있었던 윌슨이 고개를 흔들었다.
“없었지.”
“이길때에도 2만명이 넘지 않는 관중들이 여기를 찾아왔고, 지는 날에는 3회부터도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관중들도 있었어.”
유격수 자리에 있는 네이트에게는 짐을 챙겨서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관중들이 보였다.
“그런 팬들을 보면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드레이크가 했을 생각이라면 정해져 있었다.
“아쉽다.”
“그래. 아쉽다! 내 플레이를 보여주는 팬이 이렇게 없다니! 너무 아쉽다! 난 아직 남은 이닝에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이 많은데! 벌써 경기장을 떠난다고? 이렇게 아쉬울수가 없었어! 이 이야기를 왜 하냐고?”
드레이크는 밖에 있는 팬들을 가리켰다.
“오늘은? 오늘 난 짐을 챙겨서 자리를 뜨는 관중을 한 명도 못봤어. 우리가 잘한것도, 단장님이 잘 끌어들인 것도 있겠지. 무슨 이유든 간에 하나는 확실해. 이 경기가 어떻게 되든 간에 여기 남아있는 팬들은 우리의 경기를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계신거란 말이야!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면 팬들이 내년에도 돌아올까?”
드레이크의 질문에 누군가가 답했다.
“아니. 안오겠지.”
이에 힘을 얻은 드레이크가 더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지더라도 우리는 쉽게 가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여줘야 내년에도 관중들이 기대를 가지고 찾아오지 않을까?”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많은 선수들이 답했다.
“맞아. 팬 분들은 우리가 이렇게 무기력하게 지는 모습을 보려고 오는게 아니야.”
“적어도 내년에는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을거라는 기대를 안겨드려야 하지 않을까?”
“일단 한 점. 딱 한 점만 따라가자!”
“가보자!”
드레이크를 필두로 젊은 선수들에게 불이 붙기 시작했다. 캐시는 이런 기류를 이용할 줄 아는 감독이었다.
“패트릭! 대타다! 그 자리에 세드릭이 들어간다.”
“그리고 샘! 너도 준비해. 알렉스 대신 샘이 들어간다.”
젊은 선수들에 불이 붙었으니 이도 이용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이들에게 최소한 포스트시즌에서의 경기 경험은 안겨줘야한다. 캐시는 이를 위해 대대적인 교체를 감행했다.
따아악!
- 대타로 들어온 세드릭 우드먼이 안타를 때려냅니다! 3이닝만에 처음 나온 안타에 관중썩이 들썩들썩해집니다!
- 다음 타석은 알렉스 윌슨이죠? 아 윌슨을 대신해서 비어만이 들어옵니다.
- 비어만이 좌타석에 들어서네요. 올 시즌 비어만은 좌타석에서의 타율이 더 높았습니다. 대신 우타석에서는 파워가 좀 더 돋보였죠.
따아악!
- 비어만의 타구가 라인을 타고 흐릅니다! 우드먼이 2루를 돌아 3루로! 3루를······ 돌지 않네요.
- 지금도 괜찮았어요 우드먼이 3루를 돌아 홈으로 들어가는 모션을 취해준 덕분에 좌익수가 홈으로 송구를 했고, 그로 인해 비어만이 2루로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을 벌었거든요.
- 투 아웃 상황에서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죠. 굉장히 좋은 베이스 러닝이었습니다. 아, 방근은 3루 베이스 코치의 공인가요? 하하!
주자가 2루와 3루에 있는 상황. 완벽한 득점권 찬스에서 덕 흘로첵이 들어섰다.
- 여기에서 덕을 믿고 가네요. 앞선 두 번 모두 대타를 써서 이번에도 대타를 쓸 줄 알았거든요. 서머스도 남아있으니까요.
- 하지만 캐시의 선택은 덕 흘로첵이었습니다. 사실 뭐 흘로첵이 지난 타석에서 아웃을 당하긴 했지만, 썩 컨디션이 나빠보이지는 않았거든요.
- 타구에 힘이 잘 실리긴 했죠. 중견수 직선타만 아니었다면 분명 안타가 됐을 타구였습니다.
카메라가 한 어린 팬의 모습을 잡았다. 흘로첵과 17번이라는 배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이름이 보이게 거꾸로 입고 있는 팬은 두 손을 모아서 흔들고 있었다.
- 저 팬을 보세요. 두 손 모아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 덕이 부디 저 기운을 받았으면 좋겠네요.
따아아악!
어린 팬의 기운을 받은건지 흘로첵의 배트가 휘둘러지며 굉음을 그려냈다.
벌떡!
레이스의 더그아웃도
“제발! 제발 넘어가!”
타격음이 들리자마자 2루와 3루에서 홈으로 달리기 시작한 우드먼과 비어만도
“으아아아아!”
“제바아아아알!”
관중석을 가득 채운 25000명의 팬들도
“넘어가줘! 그게 아니라면 안타라도! 제발 우리가 쫓아가게 해주세요!”
다운을 포함해 레이스 프런트에서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있던 직원들도
“갔나? 갔나!”
그리고 구단주 실에서 창문에 붙어서 반전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리던 글라이드까지도
“따라가자! 제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모두의 소망을 담아 홈플레이트에서부터 빠른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한 타구는
탁!
누군가의 글러브 속으로 들어갔다.
- 흘로첵의 타구가 글러브에 잡혔습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아까까지 흘로첵의 유니폼을 흔들고 있던 바로 그 어린 팬이었다.
“으아아아아!”
목이 터져나가라 외치는 팬의 외침을 필두로 트로피카나 필드의 지붕을 찢을듯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와아아아아!
- 덕 흘로첵이 레이스의 침묵을 깨트리는! 그리고 레인저스의 뒤통수를 후리는 3점짜리 홈런을 뽑아냅니다!
- 젠장 덕 흘로첵! 믿고 있었다고요! 저는 믿었습니다! 우리 같이 믿었다고요!
폭풍같은 환호성 타임이 지나가고 타석에 들어선 앤더슨이 아웃을 당하면서 이닝이 끝났다.
그제서야 미친듯이 흥분해 있었던 해설도 다시 정신을 차렸다.
- 다 좋은데 추격점이 너무 늦게 뽑힌 감은 있네요.
- 저도 그 점이 아쉽습니다.
8회 말 2사에 2점차로 쫓아왔다. 이제 남은 공격 찬스는 오직 1이닝 밖에 없었다.
- 하지만 기대는 여전히 걸어볼만합니다. 타순이 좋거든요.
9회 말 공격은 1번 타자인 네이트 드레이크부터 케빈 마이어, 배리 브래넌으로 이어지는 레이스 최강의 타순.
- 확실한건 이번 이닝을 막아내야 그 기회도 찾아온다는겁니다.
- 캐시도 그 사실을 아는지 곧바로 마무리 로버트슨을 올립니다.
로버트슨은 단 하나의 출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혼신의 힘을 다해 공을 던졌다. 그 결과 레인저스 타자들은 누구도 1루를 밟을 수 없었다.
순식간에 9회를 삭제시킨 레이스는 공격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캐시 앞에 모였다.
“길게 말 안한다. 오늘이 우리의 올해 마지막 경기가 될 수도 있다. 후회 남지않게 잘 하고 와라. Go Rays!”
““Go!””
우렁찬 소리와 함께 드레이크가 당당히 타석에 들어섰다.
“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더라 애송아.”
드레이크는 시작부터 시비를 걸어오는 포수에게 눈조차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우리 더그아웃에서는 우는 사람 없었는데. 오늘 삼진만 네 번 먹은 선수가 있다던데 그 선수가 울었나?”
“뭐?”
원래 이런식으로 트래시 토크를 하는건 드레이크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해서라도 안타를 때릴 확률이 올라간다면 적어도 오늘 이 순간 만큼은 이런 비열한(?) 방법 조차도 써먹을 생각이 있었다.
‘난 원래 인코스가 약하니까 위협용으로 인코스를 한 번 더 붙일거야.’
거기다가 성질을 돋궈놨으니 저 성질 나쁜 포수는 더더욱 인코스를 요구할것이다. 그러라고 일부러 한 발자국 더 홈플레이트에 붙었으니까. 혹여 공이 몸으로 들어오더라도
퍽!
피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힛 바이 피치.”
엉덩이에서 올라오는 통증은 실밥자국까지 남을 정도로 피멍이 들것이라는 것을 알려줬다. 하지만 드레이크는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고 얌전히 보호장비를 풀어서 볼보이에게 넘기고 1루로 뛰어갔다.
다음 타자는 케빈 마이어.
- 마이어가 번트를 대지 않을까요?
- 제 생각도 같습니다. 일단 득점권에 보내놔야죠.
다들 예상한 것처럼 마이어는 번트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건 페이크였다.
마이어는 번트자세를 취하다가 투구가 시작되자마자 배트를 그러쥐었다.
딱!
약한 타구가 비실비실하게 내야에 3루를 향해 날아갔다. 평소라면 3루수나 유격수 둘 중 누구든 잡았을 쉬운 타구.
하지만 번트 자세에 한층 앞당겨진 내야 덕에 타구는 내야를 아주 살짝 넘기는 안타가 되었다.
- 마이어의 페이크 번트 앤 슬래쉬가 완벽히 먹혀들었습니다!
- 이게 맞죠! 드레이크를 2루로 보내더라도 비어있는 1루에 브래넌을 걸러버리면 그만이거든요! 브래넌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는 이게 맞습니다!
주자는 1, 2루.
적당한 타구면 무조건 홈으로 들어올 수 있는 발빠른 드레이크가 2루에 있었다. 그리고 마이어의 다리라면 외야를 가르는 타구에 홈까지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브래넌의 타격을 생각한다면 한 방이 나올 수도 있다. 여기서 가장 조심해야할 것은 큰 타구.
브래넌의 육중한 몸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타이밍을 잡았다.
그리고 투수가 공을 던지는 그 순간.
탁!
브래넌이 번트를 댔다.
< 76화 - 와일드카드 9회 말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