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머리 MLB 단장-75화 (75/268)

< 75화 - 마지막 30구 >

파아아앙!

커다란 미트 소리와 함께 레인저스 유니폼을 입고있는 타자의 배트가 시원스레 허공을 갈랐다.

후우우웅!

“스트라이크 배터 아웃!”

와아아아아!

- 또 다시 삼진! 레인저스는 오늘도 리키 더지를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 세 이닝을 던지는 중에만 벌써 7삼진이에요! 오늘 페이스가 상당히 좋습니다!

흥분한 해설진들과 마찬가지로 벤치 역시 흡족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오늘 리키 컨디션 상당히 좋은데?”

“오버페이스는 아니겠지?”

“평소에도 이 정도는 던졌잖아. 오버페이스까지는 아닐거야. 헤이 리키! 나이스 피칭!”

“오늘 네 공 스치지도 못하던데?”

“끝내주더라! 자! 그럼 이제 우리도 나가서 점수 좀 뽑자!”

록하트가 우렁찬 소리와 함께 나섰다. 그런 록하트를 따라 차례로 선수들이 파이팅 넘치는 외침을 내질렀다.

“가자!”

“리키를 도와야지!”

더지는 여느때처럼 피칭을 마치고 파인트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마치 엄마새를 찾는 아기새마냥 쫓아오는 그를 보고 파인트는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조나가 알려줬던것처럼 대충 하겠다고 생각하니까 더 잘되는 기분이에요.”

“잘하고 있어. 그렇다고 매 경기 대충한다고 생각하면 안돼. 오늘 경기가 특별하지 않다고 생각하려고 하는 것 뿐인거지. 지금처럼 계속 마인드컨트롤 하면서 나가면 저 레인저스 놈들도······”

파인트는 반대편 더그아웃에서 더지에게 틀어막혀 답답해할 레인저스 선수들을 상상하며 눈을 돌렸다. 그런데 레인저스 더그아웃이 이상했다.

“음?”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패배하거나 벽에 부딪힌 팀의 분위기가 아니랄까? 오히려 더 자신감이 생긴듯한 그런 활발한 분위기였다.

“저 기분나쁜 놈들······”

더지의 말에 파인트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무슨 일 있었어?”

적어도 그가 아는 한도 내에서 더지는 레인저스와 별다른 악연은 없었다. 5승 1패를 기록하고 있는데 안좋은 기억이 있을리가 있겠냐만은.

“아까 삼진 당하고도 실실 웃더라고요. 제가 봤을때 쟤네는 올해에는 그냥 포스트시즌 경험만 하겠다는 생각인 것 같아요.”

삼진을 당하고도 웃었다? 그런 경우가 없는건 아니었다. 파인트 역시 워낙에 좋은 공이 허를 찌르는 코스로 들어갔을 때, 헛웃음을 짓는 타자들을 봤으니까. 하지만 더지의 말, 그리고 지금 레인저스 쪽 더그아웃 분위기를 생각해봤을 때 그것과는 상당히 결이 다른 것 같았다.

하지만 속에 있는 말을 꺼내 더지를 흔들거나 자신감을 깎아내릴 생각은 없었기에 파인트는 웃음으로 걱정을 감췄다.

“네 공이 좋았던거겠지. 옆에서 보는데도 공이 너무 좋더라. 네가 던지는거보니까 나도 오늘 좀 던지고 싶어지네. 양보하지 말걸 그랬나?”

“오늘 불펜피칭 아직 안했지 않아요? 불펜가서 조금 던지고 계세요.”

“다음 이닝에 진짜 그럴지도 몰라. 그러니 나 없어도 찾지마라.”

파인트는 4회가 시작되자마자 캐시에게 다가가서 불펜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불펜은 왜?”

“느낌이 좋지 않아서요.”

캐시는 더지가 내려오면 곧바로 다음 이닝을 준비하겠다는 말이란걸 알아차렸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게 아니었군.”

캐시 역시 레인저스의 더그아웃 분위기를 보고는 의아하던 참이었다. 타선이 꽉 틀어막힌 팀이라고해서 침울해야할 필요까진 없다. 하지만 저런 반응 역시 이상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아까 레이스 야수들이 했던 것처럼 파이팅 넘치는 분위기가 되는데 저런 의미심장한 분위기라니.

“마치 뭔가를 확인 한 것 같은 느낌이라해야하나? 그런 느낌이 들어서요.”

파인트의 말에 문득 경기 전 인터뷰가 생각났다.

레인저스의 감독인 크리스 우드워드는 경기 전 이런 인터뷰를 했었다.

“리키 더지에게 이번 시즌 5승 1패로 굉장히 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 더지를 상대하게 되었는데요, 자신이 있으신가요?”

“당연히 자신있습니다. 이번 시즌 더지에게 약했던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서 저희 영상 분석팀들은 9월 내내 리키 더지만을 파헤쳤습니다.”

“조나 파인트가 있는데도요?”

“파인트가 후반기에 좋은 활약을 했지만 더지는 시즌 내내 평균적으로 좋은 활약을 보여주며 17승을 쌓았습니다. 팀의 에이스로 시즌 내내 활약한데다가 저희 팀에 강한 선수. 레인저스 전에 이 선수를 내보내지 않을 감독은 없을겁니다.”

“그래서 약점은 찾아내셨나요?”

“그에게 약했던 저희의 약점을 찾아냈죠. 정확히는 말씀드릴 수 없지만, 저희는 더지를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때는 그저 우타자들을 많이 배치했다고 끝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넘겼다. 우드워드가 더지의 약점이 아닌 저희의 약점을 찾아냈다는 표현을 써서 그쪽의 문제일거라고 말이다.

그런데 또 다르게 생각해보니 더지의 뭔가를 발견했지만, 그걸 숨기기 위해서 저런 말을 했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불펜피칭은?”

“안했죠. 그래서 워밍업만 좀 하고 몇 구 던지면서 지켜보려고요. 비상시에는 곧바로 투입될 수 있게요.”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대략 30구 안쪽으로 던질 수 있게만 준비해둬.”

“알겠습니다.”

캐시는 불펜으로 향하는 파인트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부디 우리가 과민반응한거였으면 좋겠는데······”

***

좋은 예감은 언제나 틀리는 법이고, 나쁜 예감은 언제나 들어맞는다.

이 불변의 진리는 오늘도 열심히 일을 하기 시작했다.

따악!

4회에 들어오자마자 더지는 첫 타자에게 안타를 허용했다. 안타 하나를 허용한 것뿐이기에 당연히 레이스 벤치에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뭔가 찝찝하긴한데······’

레이스 더그아웃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긴 했다. 하지만 안타 하나 맞는다고 선발투수, 그것도 에이스를 교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음 타자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는 더지를 보면서 살짝 안심하려던 찰나

따아아아악!

배트가 뿜어내는 굉음이 케빈의 시선을 앗아갔다.

- 알렉스 폰세가 때려낸 공이 쏜살같이! 페리시치 뜁니다! 뜁니다!

쭉쭉 뻗어나가는 공을 빠른 발로 쫓고 있는 페리시치를 보며 제발 그가 잡아주기를 두 손 모아 기도했다.

- 페리시치! 페리시치가 담장을 타고! 아······

펜스를 넘어가려는 공에 손을 닿기 위해 페리시치가 담장을 타고 오르기까지 했지만 공은 글러브에 닿지 않았다.

순식간에 점수차는 2점이 되어버렸다.

2점짜리 홈런이 끝이었냐?

그것도 아니었다.

- 아······ 지금 페리시치가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하고 있는데요······

- 발목을 잡고 있네요. 담장을 타고 착지하다가 발목을 접질린 것 같습니다.

느린 화면으로 페리시치가 발목을 접지르는 장면이 확실하게 찍혔다.

- 아······ 큰일났네요. 저러면 오늘 경기는 무조건 못 뛰겠는데요? 캐시도 헐레벌떡 달려가네요.

보통 선수가 부상을 당하더라도 팀 닥터와 트레이너가 나가서 먼저 살펴보지, 저렇게 감독이 나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캐시가 이렇게 뛰어나간다는 것이 지금 상황이 어떤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팀 닥터는 곧바로 페리시치의 발목을 잡고 이리저리 만졌다.

“이러면 아파?”

“쓰읍······ 네.”

“이러······”

“아악!”

“아픈가보네.”

고통으로 일그러진 페리시치의 표정을 보며 캐시가 물었다.

“못 뛰겠지?”

“절대 못 뜁니다. 이쪽으로 할 때 아파하죠? 적어도 오늘은 못 뜁니다.”

방금 맞은 홈런보다 페리시치의 부상이 훨씬 뼈아팠다. 홀로 더그아웃으로 돌아온 캐시에게 선수들이 들러붙었다.

“루카스 괜찮습니까?”

“더 못 뛴답니까?”

“적어도 오늘은 못 뛸 것 같다는군.”

이렇게되면 캐시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남아있었다.

1번

브래넌을 좌익수로 이동시킨다.

마이어의 수비 부담이 더 커지긴 하겠지만, 수비적인 측면에서 두 사람의 조합이 훨씬 안정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 방법을 사용하면 지명타자 타석이 사라지고, 투수가 타석에 들어서야한다. 대타를 쓰면 되긴 하지만, 그것 자체가 흐름을 끊어먹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기각.

2번

앤더슨을 좌익수로 이동시키고 2루에 우드먼을 넣는다.

앤더슨이야 내외야에서 모두 평균 이상의 수비를 보여주는 선수고, 우드먼은 올 시즌 주전급 2루수로 괄목할만한 성장을 했다. 버드 드마우스를 밀어낸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

하지만 최근 성적이 그렇게 좋지 않다. 특히나 훈련에서부터 눈에 확연히 보일 정도로 커진 스윙을 돌려대고 있는 우드먼이 과연 안타를 하나라도 때려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따라서 기각.

마지막으로 캐시가 쓸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덕을 준비시켜.”

덕 흘로첵을 좌익수로 넣는 것이었다.

“하지만 감독님. 덕보다는 다른 선수가 낫지 않겠습니까?”

흘로첵은 분명 다른 선수들보다 수비범위라던가 안정성이 떨어졌다. 하지만 앞선 두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타격능력과 컨디션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당장은 점수를 유지하기 위해 힘쓸때가 아니라 잃은 점수를 따라가야할 때였다.

적어도 상대 마운드에 올라가 있는 저 투수 놈을 상대로 틈이라도 내기 위해서는 흘로첵이 최선의 결정이었다.

“투수는 어떻게 할까요?”

“아!”

페리시치의 부상 때문에 마운드 사정을 잠시 잊고 있었다.

“불펜에 연락해서 조나 나올 준비 하라고 해주고, 미치랑 자비어 준비시켜.”

“알겠습니다.”

코치에게 지시한 캐시는 곧바로 마운드로 올라갔다.

“교체해야 할 것 같다.

“저쪽에서 너무 잘쳤을 뿐이지 잘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로 꺾이지 않는다며 의욕을 드러냈지만 캐시의 생각은 달랐다.

“오해하지마 리키. 네가 못해서라던가 널 못 믿어서가 아냐. 저쪽에서 아무래도 네 티핑을 알아낸 것 같아.”

글러브로 가리고 있었지만, 더지의 눈매가 딱딱하게 굳는 것을 확인하는건 어렵지 않았다.

“티핑을 알았다면 왜 앞선 이닝까지는 써먹지 않은거죠?”

“네가 티핑을 모른다는 정보라던가, 그 티핑을 역이용하고는 있지 않은지에 대한 확실한 정보가 필요했을거다.”

리키의 머릿속에 앞선 2회에 레인저스 타자가 삼진을 당하고도 웃었던 일, 혹은 한 가운데 실투가 연속으로 들어갔음에도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던 기억들이 스쳐지나갔다.

‘그게 다 찔러보는 거였다니······’

어떻게 이렇게 바보같을 수 있을까! 상대 팀도, 선수들도 모두 프로인데 안일하게 포스트시즌 경험이나 하러 왔다고 생각하다니! 지난 시즌에 비해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은 전혀 성장한게 없었다.

“미안하다 리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네가 더 던지는건 무리일 것 같다.”

“아니에요보스. 제가 더 잘했어야했는데. 아니, 미리 알았더라면······”

“저쪽이 잘 이용한거다.”

“뒤는 누가 막아줘요?”

“조나가 나올거야.”

“뒤는 안심해도 되겠네요.”

파인트라면 분명 레인저스 놈들을 막아줄거다. 이제 마운드에 올라와있는 남은 시간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했다.

“시간 더 끌어야해요? 어깨는 풀렸대요?”

“아마 이쯤되면 풀렸을 것 같아.”

때마침 더그아웃에서도 준비가 완료됐다는 사인이 나왔다. 그걸 확인한 더지가 겨우 납득한 듯한 연기를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공을 건넸다.

“수고했다 리키.”

야구공은 더지의 손에서 캐시에게로, 그리고 다시 파인트의 손으로 향했다.

“30구다 조나. 딱 30구.”

< 75화 - 마지막 30구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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