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너도 레이스지? >
라커룸의 문이 열리고 동경하던 세계가 눈앞에 펼······
“내 속옷 어디갔어!”
“우하하하! 또 속옷 도둑맞았냐?”
“젠장할! 네이트으으으으! 네 놈이지 이 빌어먹을 자식아!!!”
“아 거참 돈도 많이 버는 사람이 경기용 속옷가지고 깐깐하기는.”
“깐깐한게 문제가 아니라 내 속옷을 누가 입는게 싫다고 난!!!”
“그럼 나 주면 되겠네~”
“이 빌어먹을 자식이!!!”
한쪽에서는 속옷 가지고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흐음 흐흠~”
“이번에 나온 앤 마리 신곡 들어봤어? 좋던데?”
“내 취향은 아니더라. 난 오히려 토리 켈리 예전 노래가 요새는 더 좋게 들리더라.”
또 한쪽에서는 저런 소동따위는 신경쓰지 않겠다는 듯이 한쪽 귀에 이어폰을 끼고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선수들도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쪽에서는 파인트를 필두로 헤드셋을 쓰고 평온한 표정으로 책을 읽는 독서 모임도 있었다.
‘이래서야······’
그저 시설만 좀 더 좋을 뿐이지 자신이 있는 학교 야구팀의 라커룸과 별반 차이가 없을 것 같았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배합을 가져갈래?”
“확실히 켈리는 약점이 안보이긴 하네요. 자세부터가 인하이부터 아웃로우까지 모두 커버할 수 있잖아요.”
“그래서 이 시대 최고의 완성형 유격수로 불리는거지. 그렇다고해서 모든 공을 때릴 수는 없어. 우리는 그를 공략해야하고.”
“저였다면 우선 체인지업으로 간을 볼 것 같아요.”
“이유는?”
“초반에 간을 보는 경우는 패스트볼이 많은데 켈리같은 경우는 이미 그것에 대해 대비를 하고있을것 같단 말이죠. 패스트볼을 한 번 숨기면서······”
그나마 윌슨과 비어만과 같이 정말 프로처럼 경기 전략을 짜고 있는 선수들이라던가
“오늘 영 다리가 안좋은데?”
“수비 힘든거 아니에요?”
“그럴 것 같아. 아무래도 감독님한테 오늘은 지명타자로 출장시켜달라고 해야겠는걸? 그러면 내 자리에 아마 네가 들어갈텐데. 잘할 수 있지 넬슨?”
“흐흐! 저 때문에 수비 더 못들어가도 우시면 안됩니다?”
“이놈아! 니가 내 자리 뺏으려면 아직 2년은 더 멀었어!”
“저도 알아요. 그러니까 타자별로 주의해야할 것 좀 알려주세요. 배리가 그래도 양키스 타자들에 대해서는 잘 알잖아요. 배리만큼 매 년 양키스 분석하는 선수도 없으니까.”
“아주 다 뽑아먹어라 다!”
경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브래넌과 페레즈가 아니었다면 진짜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세드릭 왔다아아아아아!”
마이어의 외침에 각자 다른 짓을 하던 선수들이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그들은 마이어와 세드릭에게 시선을 모았다.
“어? 케빈 왔다!”
“쟤가 걘가본데?”
마치 자신을 아는듯한 말에 세드릭은 마이어에게 슬쩍 물었다.
“혹시 저에 대해 다들 아고 계세요?”
“당연히 알지. 야구하는 것도 알고, 3번에 에이스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그리고 네가 부상을 당했다는것도 알고있지.”
어느새 앞으로 다가온 브래넌의 큰 손이 세드릭의 어깨를 두들기고 있었다.
“그래서 널 부른거고.”
마이어는 라커룸 중앙으로 휠체어를 끌고 갔다.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선수들이 둘러앉았다.
“부상 때문에 절 부른거에요?”
“너희 아버지가 아들이 부상으로 너무 힘들어한다더라고.”
“그럼 위로해주려고······”
치기어린 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동정어린 눈으로 위로나 해주기 위해 이렇게 자신을 불렀다는 생각에 기분이 슬쩍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찰나에 브래넌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위로는 힘이 되지 않아. 아무리 위로해도 본인에게는 싸구려 동정으로 느껴질 뿐이거든.”
브래넌의 말에 둘러앉은 선수들이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부상을 당하고 나면 세상이 싫어지지. 왜 나지? 부상에서 회복할 수 있을까? 내 주변에 있는 애들이 치고나가서 나보다 더 잘하면 어떡하지? 나는 멈춰있는데 주변의 친구들이 더 많이 성장해서 내가 밀려나면 어떡해? 드래프트는 될 수 있을까? 끝도 없이 심연으로 파고들어가지.”
“어떻게······”
세드릭의 말에 브래넌이 피식 웃었다.
“어떻게 아냐고?”
“우리도 다 부상을 당해봤거든. 그리고 너하고 똑같은 생각을 해봤어. 그래서 잘 아는거지.”
“주변에 부상당한 친구 없지?”
“네.”
“그런데 여기는 부상을 안당해본 놈들이 없거든. 나만해도 무릎과 발목에 부상이 있지.”
마이어 역시 자신의 어깨를 가리켰다.
“나도 어깨에 부상이 있어. 몸을 사리지 않고 수비하다보니 펜스에 부딪히는 경우도 많고 그로 인해서 근육 부상도 많은 편이지.”
브래넌과 마이어를 시작으로 하나둘씩 자신의 부상이력을 말하기 시작했다.
“난 토미 존을 두 번이나 했어.”
“난 십자인대. 그땐 진짜 커리어 끝장나는 줄 알았는데.”
“손 골절은 안쳐주냐? 그 날 이후로 타석에 들어설때마다 무서워서 트라우마 극복하는데 오래걸렸는데.”
“난 풀스윙하다가 공이 발 맞아가지고 골절됐었잖아. 그 날 이후로 다시 풀스윙할때까지 6개월 걸렸어.”
그리고 그 중 압권은 역시 서머스였다.
“어이 어린친구.”
“네.”
“자전거에 치여서 발목인대 나간적 있어?”
“아, 아뇨.”
“살인태클에 무릎이 뒤틀려서 5개월 아웃된 적은?”
“어, 없죠.”
“버팔로에 들이받혀서 1년 반 동안 야구 쉬어본 적은? 아니면 자동차 바퀴에 팔 깔려서 7개월 아웃된 적은?”
서머스의 말에 브래넌이 징그럽다는 듯이 쳐다봤다.
“있겠냐? 그 정도면 사실 죽었어야 하는거 아니냐?”
“일반인도 그 정도로 부상당하기 힘들겠다.”
“메이저리거여서 살았던게 아닐까요?”
정말 서머스는 부상계의 레전드다.
“이렇게 우리가 부상에 대해 이야기 해준 이유가 뭐겠어? 우리도 너와 같은 걱정을 수도 없이 했다는거지.”
“하지만 여러분은 메이저리거잖아요. 드래프트 될지 안될지도 모르는 저하고는 다르게 자리가 보장된······”
세드릭의 말에 브래넌이 피식 웃었다.
“자리가 보장됐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해?”
통쾌하던 아까의 목소리와는 다른, 화가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부상당해서 조금만 틈을 보이면 곧바로 나보다 나아보이는 녀석이 내 자리를 치고올라오지. 연봉을 많이 받으면 그게 안되지 않냐고? 그랬다면 양키스에서 날 쫓아내지는 않았겠지.”
뒤이어 서머스가 입을 열었다.
“재활은 열심히 해야하는데 몸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않아. 그런데 벌써부터 머리로는 복귀한 다음에 얼마나 활약해야하는지를 계산하고 있어. 그만큼 활약하기 위해서 또 얼마나 굴러야하는지를 알아서 매일 밤마다 끝도 없이 암울해지는건 보너스나 다름없지. 그런데 더 암울한게 뭔지 알아? 구단이 이번에는 날 잡아줄지 확실하지 않다는거야. 이미 난 너무 많은 부상을 당했거든. 그럼에도 난 열심히 해야돼. 할 줄 아는게 야구밖에 없으니까. 장담컨대 지금 네가 하는 걱정보다 더 컸으면 컸지 작은 고민은 아닐꺼다.”
암울한 선수들의 경험담에 기가 눌린 세드릭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 그럼······ 여러분들은 어떻게 그걸 극복하셨나요?”
“훈련. 끊임없는 훈련을 통한 자신감 회복만이 유일한 길이지.”
“날 믿고, 날 믿는 가족들을 믿고 견디고 버텼지.”
“날 사랑하고 응원해주는 팬들의 편지를 받아본 적 있어?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돌아와야한다고 생각했어.”
“신이 날 위한 시련을 내린거라고 생각했어. 신은 언제나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을 내려주는 법이거든. 이 시련의 끝에는 날 위한 달콤한 보상이 있을거라고 생각했지.”
“내가 부상 때문에 잠시 멈춰있다고해도 날 뛰어넘을 친구들은 없었으니까. 내가 최고니까 확실히 회복하는데만 집중했지.”
이에 대한 답은 세세한 부분에서는 달랐다. 하지만 큰 결은 같았다.
“결국 멘탈이 중요하다는거네요.”
신뢰, 사랑, 믿음. 모두 개인의 멘탈과 연관되어있었다.
“사람 몸이라는게 정말 신기해. 네가 어떻게 생각하냐에 따라 네 몸도 반응하게되거든. 네가 굳게 마음을 먹으면 먹을수록 네 몸은 더 강해질거고, 그러면 복귀도 빨라질 수 있을거야.”
부상에 관해서는 스페셜리스트인 서머스도 한 마디 보탰다.
“흔히들 우리 몸은 다치고 나면 더 강해진다고 하잖아? 부상도 똑같다고 생각해. 네 마음은 분명 다른 놈들보다 더 강해질거고, 네가 운동을 못하고 있을 동안 앞서나갔던 놈들을 따라잡기 위해서 훈련도 열심히 할거야. 그것만으로도 넌 그 친구들보다 훨씬 강해진거야. 지금 당장에는 모르겠지만, 이런 마인드는 네가 더 높이 올라갈 수 있게 만들어줄거야.”
“그래도 제가 못 올라간다면요?”
서머스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재능이 없었던거지. 운이 없다고는 절대 생각하지마. 십자인대 부상? 분명 불행한 일은 맞아. 하지만 똑 같은 부상을 당하고도 선수생활 잘하고 있는 선수들이 수두룩빽빽해. 저기 드레이크도 고등학교 시절 십자인대 부상을 당했다고 했잖아. 그런데도 레이스에 1라운드 지명됐어. 그보다 더 어린 나이에 부상을 당한 네가 더 높이 올라갈 수 없다? 결국 넌 그 만한 재능이 없었던 것 뿐이야.”
냉정한, 그리고 폐부를 찌르는 말이다.
“만약 네가 정말로 재능이 있다면, 그렇게 믿는다면 그렇게 침울해있을 틈이 없어. 무슨 말인지 알지? 그 정도 부상은 아무것도 아니야. 분명 넌 이겨내고 드래프트까지 올 수 있을거야.”
“나처럼.”
“내가 그랬던 것 처럼.”
“그리고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메이저리그까지 올라올 수 있을거라고 믿는다. 그러니 너도 네 자신을 믿어라.”
“그게 힘들다면 믿지 않아도 상관없어. 왜냐면······”
심장이 있는 가슴에 마이어의 주먹이 얹어졌다.
“부상을 당했든, 오래 뛴 팀에서 방출을 당했든, 나처럼 최하위로 드래프트를 당하든, 관중들이 우리를 보려고 오지 않든.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 바로 레이스거든.”
그리고 물었다.
“너도 레이스지?”
가만히 듣고 있던 세드릭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
라커룸에서 있던 이야기들은 경비를 거쳐 곧 다운의 귀에도 들어갔다.
“잘됐네. 카를. 앞으로도 저런 사연들을 많이 받아봐. 지역주민들이 분명 좋아할거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서머스가 그랬단 말이지······ 불안감을 오래 안고있었던만큼 장기계약에 대한 열망이 클거야.”
“이번 시즌만 잘 마무리하면 장기계약 하나 넣어보죠?”
“올해 아무리 잘해도 연 500만 달러 선이면 충분히 계약 가능할 것 같습니다.”
“조만간 에이전시랑 미팅 한 번 잡아봐야겠네요. 그나저나 어떤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인곳이 바로 레이스라······ 이거 괜찮은 것 같지 않아요?”
“홍보할 때 써도 될 말인데요? 이번 포스트시즌 캐치프레이즈로 쓰는건 어떻습니까? 뭔가 가슴을 울리는 그런 말인데요.”
“고려해보도록하죠.”
이제 곧 경기가 시작할 시간이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합시다. 뉴요커하고 데이트가 있어서요.”
대런과 오붓한 시간을 즐길때가 됐다.
< 70화 - 너도 레이스지?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