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 세드릭 키드먼 >
키드먼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혹시······ 이벤트 같은거 신청해도 될까요?”
팬이 구단에 직접 신청할 수 있는 이벤트에는 여러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건 역시
“프로포즈 같은거 말씀하시는건가요?”
“아뇨. 그런건 아닙니다.”
“그럼 어떤 이벤트를 원하십니까?”
“시구. 시구면 충분합니다.”
“키드먼씨의 시구요?”
“아뇨. 제 아들의 시구입니다.
그의 말에 다운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어떤 사연이 있으신가요?”
시구 기회 한 번 주는 건 어렵지 않다. 35년 시즌권자에 대한 예우로(지난 번 이벤트때는 가장 나이가 많았던 안나 페퍼님이 시구를 했다.) 한 번 정도는 시켜줄 수 있는 거니까.
하지만 다운이 보기에 키드먼은 그냥 시구가 하고 싶어서, 혹은 아들에게 시구를 한 번 시켜주기 위해 저렇게 요청하는 건 아닌 것 같아보였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할지 모르겠는데······”
“편하게 처음부터 이야기하세요.”
곧 경기가 시작하겠지만, 어차피 자신이 본다고 경기 내용이 달라질 것도 아니다. 그 시간에 팬의 고민을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이것 나름대로 단장의 업무라고 할 수 있었다.
“저한테는 이제 열 네살이 된 아들놈이 하나 있습니다. 태어날때부터 야구장을 다녀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야구를 정말 좋아하고, 잘하기도 했거든요. 학교 야구팀에서 3번이랑 에이스를 동시에 맡고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학교에서 3번 타자와 에이스를 동시에 맡고 있다는건 정말로 재능이 뛰어난 선수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건 그게 아니다.
“과거형이네요?”
다운의 지적에 그가 입술을 물었다.
“네······ 두 달 쯤 전에 아들놈이 사고를 당했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해서 두 다리가 아작났습니다.”
“아······”
어떤 운동이든간에 하체는 가장 기본이되는 중요한 곳이다. 그러다보니 회복도 다른 부위들보다 더 오래 걸리고, 원래 폼까지 돌아오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한다.
왜?
하체가 약해지면서 온 몸의 밸런스가 틀어질테니까.
“진단은 뭐던가요?”
“한 쪽은 그냥 골절이고, 한 쪽은 무릎이 아예 돌아가며 십자인대가 나갔더군요.”
“뭐라고 위로해드릴 말이 없네요······”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성장해야할 시기에 최소 2년은 선수경력이 단절될 상황에 처한 아들을 둔 아버지에게 건넬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는 다시 마음을 굳게 먹은 듯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입을 열었다.
“말로 위로할 수 없으면 제 아들놈에게 한 번만 시구 기회를 주십쇼. 그리고 선수단과 만날 기회를 주세요. 아들놈은 밝게 웃으면서 괜찮다고, 야구하다보면 다치는 놈들도 있다고, 이번것도 그런거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하더군요. 믿었습니다. 제 아들놈은 강하니까요. 하지만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약해지기 마련아니겠습니까?”
“그렇죠.”
많은 선수들이 부상과 재활을 힘들어하는 이유? 그들이 강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약한 몸이 마음까지 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잘 할수 있다고 다짐했던 놈이 지난 주부터는 밤만 되면 웁니다. ‘다시 운동할 수 있을까?’ ‘2년 뒤면 다들 나보다 뛰어나지는게 아닐까?’ 이러면서 말이죠. 저는 그런 아들놈에게 희망을 주고싶습니다.”
부상당한 선수를 수도 없이 봐왔다. 하지만 그들은 성인이었다. 열 네살의 어린 나이에 2년짜리 부상을 당한 저 아이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그리고 그 아이를 지켜봐야하는 부모의 마음은 또 어떻고.
“알겠습니다. 한 번 자리를 만들어보겠습니다.”
***
9월 24일
양키스와의 이번 시즌 마지막 시리즈이자, 2경기 차로 2위에 올라있는 레이스가 자력으로 양키스를 넘어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세드릭은 반차를 쓰고 나온 아버지와 함께 집을 나설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아 그냥 집에서 보자니까요. 반차까지쓰고 무슨 트로피카나 필드까지 넘어가요.”
“세드릭! 이런 경기를 집에서 보다니! 시즌권이 아깝지도 않아?”
평소라면 신이나서 따라나섰을 길이다. 오히려 아버지보고 왜 반차를 안쓰냐고 뭐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다리도 좋지 않다. 더군다나 야구장에 가서 그라운드의 냄새와 관중들의 호나호성을 들으면 더 암울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굳이 경기장에서 야구를 보고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를 이겨먹을수는 없었다.
“양키놈들 꺾고 올라서는 첫 걸음인데 이걸 집에서 보자고?”
아버지의 이 한 마디에 세드릭의 마음은 돌아섰다. 그도 아버지도 레이스 경기에 미쳐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아버지는 편한 티셔츠를 입고 있는 자신의 옷차림을 보더니 물었다.
“그대로 가려고?”
“네.”
“유니폼 입지 그래? 그래도 경기장 가는데 유니폼은 입고 가야지. 그 왜 그 옷 있잖아. 마이어 유니폼.”
“남색요?”
“아니. 흰 색으로 입고가자.”
경기 시작까지는 아직 네 시간이나 남아있다보니 악명높은 하워드-프랭클린 다리는 아직까지 그렇게 막히지는 않았다.
“아버지.”
“왜 인마.”
“오늘 왜 이렇게 빨리 가요?”
“차도 안막히고 얼마나 좋냐. 그리고 네가 조금 더 편하게 움직이려면 사람 없을 시간에 먼저 가있는게 낫지.”
“그렇긴 하겠네요.”
휠체어라는게 생각보다 공간을 굉장히 많이 차지한다. 특히나 오늘 같은 빅매치에서는 사람들이 몰리기전에 미리 가는게 답이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트로피카나 필드는 벌써부터 사람으로 붐비고 있었다.
“양키스가 이길거라니까?”
“뭔 소리야. 레이스 홈에서 그러다가 뒤지고싶냐?”
벌써부터 다투는 양키스팬과 레이스팬도 있었고
“표 못 구하신분 계십니까?”
심지어 레이스 홈 경기에서 볼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 적 없었던 암표상까지도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았음에도 뒤에서 휠체어를 미는 아버지의 얼굴이 웬지모르게 즐거워보였다.
“이야~ 확실히 오늘 경기가 대박이긴 한가보다. 뭔가 벌써부터 흥분되지 않냐?”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아버지의 모습에 세드릭이 픽 웃었다.
“그런것 같기도 하네요. 표는 미리 뽑아오셨어요?”
“당연하지.”
“그럼 미리 들어가서 먹을거나 살까요? 나중에 관중 다 들어오면 제가 가기도 힘들 것 같은데.”
“그러자꾸나.”
고개를 끄덕인 아버지가 힘차게 휠체어를 밀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향하는 곳이 조금 이상했다.
“아버지. 여기는 프런트 출입구 아니에요?”
세드릭의 말에 아버지는 슬며시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콜린 키드먼님? 그리고 세드릭 키드먼님?”
“네.”
“이 명찰 꼭 차고 계시고요. 이쪽으로 와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문을 지키고 있던 가드는 두 사람을 외부인 접견실에 들여놓고는 다시 나갔다.
“아버지. 이게 무슨 일이에요?”
세드릭의 계속된 질문에도 아버지는 계속해서 웃기만 할 뿐 아무런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그저
“기다려봐 세드릭.”
5분 정도 기다렸을까?
접견실의 문을 열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세드릭은 그를 보는 순간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하마터면 자신이 휠체어에 있다는 사실조차 까먹고 자리에서 일어날 뻔 했다.
“케빈 마이어!”
레이스에 있는 다른 모든 선수들을 제치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가 눈 앞에 나온 것이었다.
마이어는 그 반응이 민망한듯 웃었다.
“하하 콜린 키드먼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리고 이쪽이 오늘 주인공인 세드릭이죠?”
“주인공요?”
아직까지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던 세드릭의 말에 아버지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아직 설명을 안해줬거든요. 저보다는 그래도 가장 좋아하는 선수의 입으로 듣는게 좋을테니까요.”
“그럼 제가 설명할 영광을 가져가겠습니다.”
“얼마든지요.”
마이어가 다시 웃으며 세드릭에게 고개를 돌렸다.
“세드릭.”
“네 마이어씨!”
“케빈이라고 부르렴. 아 일단 사인해줄까?”
“부탁드릴게요!”
세드릭은 이게 꿈인지 생신지 분간이 안간다는 얼굴로 몸을 숙여 그에게 등판을 내밀었다.
“이야~ 내 유니폼이네! 완전 내 팬이라길래 사실 안믿었거든. 우리 팀에 조나도 있고, 배리도 있는데 내가 제일 좋다니.”
“케, 케빈이 얼마나 멋있는데요! 하위 라운드 지명이면서도 메이저리그까지 올라온 그 노력! 그리고 수비할때도 너무 멋있어요! 무엇보다 지금 레이스에서 가장 오래 머물고 있는 프랜차이즈 스타잖아요!”
이름을 직접 부르는게 민망해서인지 잠깐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세드릭은 마이어가 좋은 이유를 쭈욱 나열하는데 성공했다.
“아하하! 네 말을 들으니까 이번에 레이스랑 연장계약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
세드릭의 등에 멋들어지게 사인을 한 마이어가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았다.
“아 맞다! 너도 야구한다고 했었지? 그럼 중견수야?”
“네! 8살까지는 투수랑 유격수였는데, 케빈이 수비하는거 보고 중견수로 바로 바꿨어요. 데뷔전에서 그 수비가 진짜······ 저는 그런 타구를 잡을 수 있는 선수가 있다는걸 상상도 못했거든요!”
아버지는 잔뜩 흥분한 세드릭을 보고 웃으며 문을 열었다.
“이동해야하는거 아닙니까?”
그의 말에 마이어가 고개를 끄덕이며 휠체어를 밀었다.
“가시죠.”
접견실을 나서게되자 흥분했던 것이 살짝 가라앉았는지 세드릭이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래서 오늘 제가 왜 주인공인거죠?”
“오늘 네가 시구를 할 예정이거든.”
“시, 시구를요?”
트로피카나 필드의 마운드에서 시구라니! 그것도 만원관중(확실치는 않지만 그렇게 될 것 같다) 앞에서 말이다!
“그래. 원래는 시구를 하는 폼을 좀 봐주고 해야하는데 알다시피 네 다리가 이렇잖니?”
“아······ 네.”
“멋진 폼으로 시구하면 좋긴 하겠지만, 당장에는 팔로만 툭 던져야하니까 지도는 필요없을거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우리 단장님이 그 대신에 우리 라커룸을 구경시켜주고 시간이 남는 친구들은 너하고 이야기를 나눠달라고 부탁했어.”
“아?”
시구 연습이면 많아봐야 세 명(투수, 야수, 포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라커룸은 이야기가 달랐다. 그것도 선수들이 있는 라커룸이 아니라 경기 전의 긴장감이 가득한 그 라커룸이라니!
그런 세드릭을 본 마이어가 능청스럽게 물었다.
“혹시 그게 마음에 안들면 시구 연습하러 갈까?”
마이어의 장난에 세드릭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라커룸 앞에서 아버지는 한 발 물러섰다.
“선수들만 있는 곳에 너무 많이들어가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구나. 아빠는 여기서 기다릴테니······”
입고있던 유니폼을 벗어서 넘겼다.
“여기에 드레이크 사인만 좀 받아오렴. 알겠지?”
“하하! 키드먼씨는 네이트 파인가보네요?”
“저희 레이스를 이끌어갈 유망주니까요! 그럼 부탁한다 아들!”
라커룸의 문이 열리고 세드릭의 눈앞에 미지의 세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 69화 - 세드릭 키드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