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저만 믿으세요 >
경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레이스 프런트는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홍보팀은 최대한 기사 많이 뿌리세요.”
최대한 홍보를 해놔야지 파인트의 다음 등판에서 시청자나 관객들이 몰릴거다. 메이저리그를 응원하지만 딱히 응원하는 곳이 없는 팬들에게 레이스의 매력을 어필할 수 있는 좋은 기회. 레이스는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 조나 파인트 역대 24번째 퍼펙트게임 달성!
- 조나 파인트, 레이스 최초 퍼펙트게임 달성하다!
- 파인트 “레이스 역사에 이름을 남길 수 있어 기뻐.” 로열스는 언제······
기사들이 우후죽순 올라가는 것을 확인한 다운은 곧바로 러셀과 심슨을 불렀다.
“앤디. 퍼펙트게임 기념 티셔츠 곧바로 제작 들어가세요.”
“이미 저희와 자주 일하던 일러스트레이터에게 디자인 발주 넣어뒀습니다.”
역시 돈이 관련된 일이라면 빠르게 움직이는 러셀이다.
“마케팅 팀 역시 회의실에 모였습니다.”
브래드 심슨의 마케팅 팀 역시 빠르게 움직였다.
“단장님이 방향성만 정해주시면 그 쪽으로 의견을 모아보겠습니다.”
“전국적인 홍보는 이미 홍보팀에서 하고 있으니까, 마케팅 팀에서는 우리 탬파, 더 나아가서 플로리다 지역민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마케팅을 하죠. 버블헤드 주는 날 그런건 너무 식상하니까 빼고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혹시······”
우우웅~
업무용 폰이 아니라 개인용 폰이 울렸다.
“잠시만요. 우리 구단주님이시네요. 먼저 가서 회의하고 있으세요. 저는 라커룸 좀 갔다올게요.”
전화를 받자마자 잔뜩 흥분한 글라이드의 소리가 터져나왔다.
[퍼펙트야 퍼펙트!]
“알아요 어스틴. 퍼펙트죠.”
[우리 레이스에서 퍼펙트를 달성하는 선수가 나올줄이야! 제니가 살아서 이걸 봤다면 정말 기뻐했을텐데!]
“나중에 이 소식 들고 하늘에 가셔도 좋아할거에요. 그나저나 지금 혹시 밖이에요?”
[당연하지! 레이스 역사에 길이 남을 퍼펙트게임을 달성했는데 구단주가 옆에 가서 기념사진도 찍고 그래야지! 거의 다 왔네. 끊자고. 조나한테도 미리 말해놔. 알겠지?]
“네. 안 그래도 라커룸 가는 중이었어요. 또 신난다고 날아오지 말고, 조심히 안전운전해서 오세요.”
[알겠다 이놈아.]
라커룸까지는 대략 30미터만 걸어가면 된다. 그런데 이미 여기서부터 광란의 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아아아아!
우리가 해냈어!
조나는 신이야!
걸음을 옮길수록 커지는 그들의 목소리.
“오셨습니까 단장님.”
“프레스 인터뷰는 끝났어요?”
“네. 지금 막 경기 후 인터뷰 끝내고 감독님과 조나가 라커룸으로 들어섰어요.”
“그래서 저 모양인거군요.”
“하하. 시끄러울만 하죠. 저도 경기보다가 소리질렀는걸요.”
다운은 라커룸을 지키고 있는 잭의 앞에서 슬그머니 자켓과 셔츠를 벗어 건네줬다.
“이건 왜······”
“구단주님이 사주신 비싼 정장이거든요.”
바지에게는 미안하지만 팬티만 입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리타 불러서 단장실에 좀 올려줘요.”
“알겠습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다운은 라커룸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난장판이 된 라커룸이 눈에 들어왔다.
“와하하하하! 내가 누구라고?”
테이블 위에 올라 선수들이 뿌리는 비타민 워터를 맞으며 미친놈 처럼 외치는 파인트와
“조오오오오나 파인트!”
“신입니다!”
비타임 워터를 뿌리며 그를 숭배하는 신도들까지.
‘조나가 저런 행동을 한다고?’
평소의 파인트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지금 이 상황을 믿지 않을 것이다.
선수들이 파인트의 이상행동을 보고 굳어있는 새로운 희생양을 포착하는데는 오래걸리지 않았다.
“어······?”
루키급 선수들이 단장이라는걸 확인하고 멈칫했지만, 베테랑들은 다운이라고해서 그냥 넘어갈 사람은 아니었다.
“뿌려라아아아아!”
“단장님도 들어오세요!”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고. 브래넌과 마이어를 시작으로 다운에게도 비타민 워터가 뿌려졌다.
“에라 모르겠다! 축하한다 조나아아아!”
광란의 비타민 워터 샤워는 5분 정도가 지나서야 사그라들었다.
“자! 다들 이제 집에 가자! 푹 쉬어야 내일 또 경기할거 아니냐!”
“예에에에에!”
“씻으러 갑시다!”
다운은 보라색으로 물든 옷을 벗어던지는 파인트에게 다가가 슬며시 물었다.
“샤워하고 단장실에서 잠깐 이야기하고 갈 수 있어? 구단주님이 잠깐 보자고 하시는데. 논의할 일도 좀 있고.”
다운의 말에 파인트가 씨익 웃었다.
“얼마든지. 저 이제 싱글이에요. 앞으로 4일간 경기도 없고요”
“좋아. 그럼 위에서 보자.”
“네. 다운도 좀 씻고 있으세요.”
잠시 후
글라이드, 다운, 파인트, 크로포드까지 네 사람이 단장실에 모였다.
“자! 우선 구단주님하고 파인트 선수 사진찍을게요.”
파인트는 이번 경기에서 퍼펙트 게임을 한 바로 그 공과 글러브를 들고 환히 웃었다.
그리고 그 옆의 글라이드는 금융가에서 일할 때의 그 냉랭한 표정은 어디론가 던져버리고, 팔불출 같은 표정으로 파인트 옆에 서서 헤실헤실거리고 있었다.
찰칵!
“어디보자 잘 나왔나?”
글라이드의 말에 크로포드가 엄지를 치켜올렸다.
“그럼요! 너무 잘 나왔습니다 구단주님. 한 번 보실래요?”
자신의 표정을 본 글라이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헤벌레하고 있는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지만, 다운의 생각은 달랐다.
“전혀요. 표정에서부터 우리 구단에 이런 대기록이 세워지게된걸 축하한다는 느낌이 팍팍 느껴지잖아요. 팬들은 절도있고 관리된 표정보다는 오히려 이런 모습을 좋아할거에요.”
다운의 해석에 글라이드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사진 그대로 가지.”
“알겠습니다! 단장님은요?”
“나도 포함해서 한 컷 부탁할게.”
레이스 박물관에 진열되어 역사에 길이 남을 사진이다. 거기에 빠질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찰칵!
“그럼 이 사진으로 액자 주문하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기증하실 물품 같은건 있으신가요? 공이라던가 글러브를 같이 전시하면 좋을 것 같은데······”
파인트는 이미 생각해 놓은게 있는지 크로포드의 질문에 곧바로 답했다.
“공은 제가 가지고 가고싶네요. 저한테도 의미가 깊어서요. 대신 오늘 입었던 유니폼과 지금 이 글러브는 기증하겠습니다.”
만약 군청색 유니폼을 입지 않았었다면 보라색으로 잔뜩 물들어있을 유니폼. 그리고 야구를 다시 하겠다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함께해온 글러브가 크로포드에게 넘어갔다.
“전시 준비 잘해줘.”
“맡겨두세요 단장님.”
크로포드가 윙크와 함께 단장실을 나갔다.
“자 이제 우리끼리 이야기를 좀 해볼까?”
글라이드가 만면에 웃음을 띄며 말했다.
“우리 구단 역사상 최초의 퍼펙트를 해준 조나 자네에게 내가 따로 뭐 해줄 수 있는건 없고······ 개인적으로 50만 달러 정도 포상을 해주도록하지.”
개인적으로 50만 달러의 포상이라니! 역시나 억만장자(물론 그 중에서 대부분은 구장건설에 들어갈 예정이지만)의 씀씀이는 남달랐다.
예상치도 못한 많은 포상금에 파인트가 입을 떡 벌렸다. 하지만 글라이드는 오히려 미안한 표정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더 주고 싶은데······ 신 구장 건설에 다 부을 예정이라 더 주질 못해서 미안하네.”
글라이드의 말에 파인트가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50만 달러도 충분히 많은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냐. 마음같아서는 100만 달러 정도는 줬어야하는데. 얼마나 돈이 들어갈 지 모르는 사업이다보니······”
“정말 괜찮습니다 구단주님. 저 돈 많아요.”
미안해하는 글라이드와 괜찮다는 파인트의 싸움. 그 사이로 다운이 들어갔다.
“둘 다 그만.”
뫼비우스의 띄 같은 싸움을 하던 두 사람이 말을 멈추고 다운에게 눈을 돌렸다.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50만 달러의 포상금에 더해서 새로 생길 구장에 대한 지분을 주는건 어때요?”
“지분을?”
“뭐 당연히 소유 지분에 관한건 아니고. 기둥이나 벽 하나에다가 조나의 얼굴과 이름을 조각한다던가 하는 식으로요. 새 구장에서는 말 그대로 조나가 레이스 역사의 일부분이 되는거죠.”
다운의 말에 글라이드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거 좋구만. 레이스 역사의 일부가 되는 조나 파인트!”
파인트 역시 만족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둥은 조금 그런데 벽은 마음에 드네요. 레이스의 역사가 되는 파인트 월!”
“하하! 그럼 그렇게 하자고. 벽 한 부분에다가 자네가 원하는 사진을 그대로 조각하는거지. 레이스 역사상 최초의 퍼펙트를 기록한 투수로 말이야! 내 꼭 적어놓고 기억하겠네.”
글라이드는 그 뒤로 한 사람의 팬이 되어서 계속 물었다.
“아까 1회에 첫 타자를 상대로 공을 던질 때는 말이야. 일부러 그렇게 힘을 줬던건가?”
“네. 그때는······”
그렇게 30분 정도 마운드 위에서의 뒷 이야기를 모두 들은 글라이드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일어났다.
“내 너무 잡고 있었지?”
“구단주님이 아니라 절 좋아해주는 팬이랑 이야기를 나눴다는 생각에 저도 즐거웠어요.”
“하하! 앞으로도 우리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좋겠구만. 그럼 일어나볼까?”
“구단주님 먼저 일어나시죠. 극성 팬 한 분 덕에 일 이야기를 마치질 못했거든요.”
다운의 말에 글라이드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거 미안하게 됐다.”
“아시면 어서 나가주시죠. 가시는 길에 조심히 운전하시고요. 멀리 안나갑니다.”
글라이드는 자신을 쫓아내는 다운을 향해 슬며시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준 뒤, 파인트에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다음에는 더 편하게 이야기하자고 조나.”
“하하! 네 들어가세요!”
“마지막으로 손 한 번 만 더······”
“아 정말 어스틴 오늘 왜 이렇게 질척대요. 빨리 나가요!”
몸으로 밀어 극성 팬을 쫓아낸 다운은 문을 닫고는 땀 닦는 시늉을 했다.
“후~ 드디어 갔네.”
과장된 다운의 행동에 파인트가 낄낄 웃었다.
“큭큭! 그래도 구단주님인데 너무한거 아니에요?”
“어스틴한테는 그래도 돼. 워낙 친한 사이라. 그나저나 네 퍼펙트 게임에 대한 상품을 좀 만들 생각인데, 네가 선호하는 각도의 사진이 있을까 싶어서. 이왕이면 그걸로 밀고가려고.”
사진이라던가, 기념 상품에 들어갈 실루엣 같은것들을 이야기하다보니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고생했다.”
“다운이야말로 고생했네요. 지금 이게 끝이 아니지 않아요?”
“이제 이 내용가지고 회의 들어가야지. 직원들 대부분도 아마 철야할거야.”
철야라는 말에 파인트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괜히 미안하네요.”
“그럴 필요없어. 저 사람들 표정봐. 다들 기뻐하잖아. 야근 수당에 이 일이 끝나면 차례로 휴가를 더 줄거라는걸 알거든.”
돈과 적절한 보상이 있는 휴식은 최고의 당근이다.
“그나저나 오늘 행동이 평소하고는 많이 다르던데. 아까 라커룸에서도 그렇고.”
다운의 말에 파인트가 슬쩍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특별한 날이잖아요. 성공적인 메이저리그 복귀와 함께 퍼펙트 게임이라니······ 말은 안했지만 진짜 스트레스 많이 받았거든요. 압박감도 엄청 심했고.”
세상에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파인트의 스트레스가 바로 그런 것들 중 하나였다.
3년의 공백기 이후 복귀하는 사람에게 압박감이 없을리가 있나. 분명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었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이것보다 더 잘해야 할 것 같은데.’
‘어린 애들한테 질 수는 없어!’
‘더! 더 잘해야 빅리그에 올라갈 수 있어!’
다운이 오고, 빅리그 복귀가 확정된 이후에도 이런 압박은 계속됐다.
“올라와서도 계속됐어요. ‘혹시 다운은 그저 마케팅을 위해 날 올린게 아닐까?’라는 생각까지도 했으니까요.”
“아냐. 내 성격 알잖아. 만약 네가 실력이 없었다면······”
“알아요. 다운이라면 실력이 아니라 마케팅만으로는 절대 날 올리지 않았을거라는거 알죠. 근데도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압박을 받았어요. 그런데 오늘 딱 경기 마치고 나니까. 거기에다가 퍼펙트게임까지 하고나니까······”
그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속이 뻥 뚫리더라고요. 그리고 그 자리에 예전만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득 찼어요.”
파인트는 3년전 최전성기에 있던 그 때의 표정으로 말했다.
“레이스가 절 받은 일이 최고의 선택임을 계속해서 증명해 나갈테니까 앞으로 저만 믿으세요.”
< 55화 - 저만 믿으세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