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감사합니다 >
개막전에서도 꽉 차지 않았던 관중석이 꽉꽉 들어찼다는 소식은 라커룸에도 곧 전해졌다.
“오늘 만원 관중이랍니다!”
직원이 말하기도 전에 선수들은 이미 알아채고 있었다.
아까 몸풀러 나갔을 때만해도 월요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관중들이 들어차 있는것을 눈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라커룸에서 경기를 기다리고 있는 지금.
우우우우웅!
폐쇄형 돔 구장 안에서 울리는 관중들의 소리가 평소와는 확연히 차이날 정도로 들려왔다. 그러다보니 모를수가 없었다.
하지만 선수단은 프런트와는 달리 있는 그대로 즐거워할 수가 없었다. 물론 처음이야 제발 만원관중이 되기를 기도했다.
“오늘 만원 관중 찍는거 아냐?”
“진짜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점점 사람이 많아지자 그 기대감은 부담이 되어 돌아왔다.
“실수······ 하면 오늘 온 팬들이 실망해서 떠나가지 않을까?”
“오늘은 꼭 지면 안될 것 같은데······”
못하는 모습을 보이면 혹여나 오늘 이 자리를 찾아준 팬들이 실망해서 떠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부담을 심하게 느끼는 것이었다.
“오히려 좋아. 내 플레이를 보는 사람이 많다는거잖아? 할 수 있어 네이트. 넌 오늘 잘 할거야.”
첫 만원관중이라는 말에 까불거리기로 유명한 네이선 드레이크조차도 잔뜩 긴장한 모습으로 자기세뇌를 하는 중이었다.
“이 멍청한 놈들아! 저 관중들은 너희를 압박하기 위해 온게 아니야! 너희 편이 가득 찬건데 왜 이렇게 무서워하는거야!”
양키스에서 수많은 압박을 받아봤던 브래넌이 선수들을 독려해봤지만, 선수들의 사기는 쉽사리 올라오지 않았다.
파인트가 답답해하는 브래넌을 슬며시 불렀다.
“배리. 선수들 좀 모아주실래요?”
“한 마디 하려고?”
“부탁 좀 하게요.”
“오케이. 겁쟁이들아! 당장 모여봐! 오늘 주인공이자 선발인 조나가 한 마디 하겠단다!”
브래넌의 호령에 선수단이 파인트를 중심으로 둥글게 둘러모였다.
“친구들. 오늘 모인 저 많은 관중들이 신경쓰인다고 했지?”
운을 뗀 파인트가 거칠게 욕을 내뱉었다.
“그딴거 신경쓸 생각하지 마.”
예상 밖의 거친 말에 선수단의 표정이 굳었다.
“내가 처음 스프링 트레이닝에 합류하던날 너희가 그랬지? ‘우린 이미 한 가족이에요. 다시 함께 뛸 날을 기대할게요.’라고.”
파인트가 마이너리그로 내려가는 그 날 메이저리그에 남은 선수들이 분명 그런 말을 했었다.
“내가 왔어. 다시 가족의 일원으로 돌아왔다고. 바로 여기 이 빅 리그로 말이야. 돌아온 가족을 위해서 선물 하나만 부탁할게.”
그는 원정팀 라커룸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저기 빌어먹을 이름만 ‘로열’인 놈들이 날 버렸어. 4년, 아니지. 마이너리그까지 따지자면 7년간 헌신했던 날, 수없이 해명도 했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버렸지. 난 복수를 원해. 저 엿같은 로열스가 날 버린걸 뼈저리게 후회하는 걸 바란다고. 오늘 관중이 많아서 긴장이 된다고? 그런거 신경쓰지말고 오로지 네 가족이 된 나의 복수를 위해서 뛰어줘. 부탁할게. 해줄 수 있지 브로?”
파인트의 말에 브래넌이 이에 질세라 소리질렀다.
“애송이들아! 예전의 에이스께서 가족이 된 기념으로 복수를 원하신단다! 만원관중? 팬들이 와주신건 고맙지만, 까놓고 언제 다시 돌아오실지 모르는 팬들 아니냐? 우리와 시즌 내내 함께할 가족이 원하는 복수를 먼저 들어줘야하지 않겠냐? 관중들의 관심은 그라운드에 나가는 10명이 나누어 받을 수 있지만, 우리가 도와주지 않으면 조나는 혼자서 로열스 놈들과 싸워야한다고! 너희는 우리 가족을 그렇게 둘꺼냐? 나는 그 꼴 못 보겠다!”
브래넌은 조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조나. I’m in.”
브래넌의 목소리에는 뭔가 모르게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것마저도 오늘은 통하지 않을 뻔 했지만, 지금처럼 동기부여가 확실한 상황에서 그의 목소리는 큰 힘을 부여했다.
“가야죠! 나도 함께합니다!”
“그래! 팬들보다는 우리 가족이 우선이지!”
“우리 가족은 우리가 지킨다!”
선수들이 하나 둘 손을 파인트에게 손을 얹으며 호응했다. 이에 브래넌이 한 번 더 외쳤다.
“가자 애송이들아! 우리 가족의 복수를 위해서!”
“위해서!”
***
- 오늘 경기! 로열스 대 레이스! 이 별거 아닌 경기가 무려 만원관중을 끌어들였습니다. 그것도 월요일, 트로피카나 필드에서 말이죠!
- 이렇게 되면 5년 만의 만원관중이죠?
- 그렇습니다. 지난 번 만원관중때는 상대가 양키스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상대가 같은 스몰마켓 팀인 로열스에요!
- 이 경기가 이렇게 만원관중으로 가득찰 수 있었던 건, 역시나 오늘의 선발 덕분이겠죠.
- 조나 파인트!
- 그렇습니다. 바로 조나 파인트가, 원래 자신의 팀이었던 로열스를 상대로 3년 만에 메이저리그 복귀전을 치르는 바로 그 경기이기 때문에 오늘의 관중이 이렇게 많은겁니다!
- 분명 최근 조나의 경기력은 눈여겨볼만했습니다. 트리플 A라고는 하지만 트리플 A를 완벽하게 틀어막았었거든요. 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서도 과연 그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네요.
- 저는 개인적으로 조나가 초반부터 로열스를 압도하는 그런 그림이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조나가 다시 팀을 찾기 시작한 뒤부터 항상 자신을 믿어주지 않았던 로열스에 대한 불만을 드러냈었거든요. 심지어 이번에 복귀할때도 로열스는 오퍼조차 주지 않았다고하죠.
- 3년을 쉬고 돌아오는 그에게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던것 같습니다.
- 그렇습니다. 저희도 예상하는걸 조나가 예상하지 못했겠습니까? 자신을 우습게 본 놈들을 눌러줘야죠! 적어도 기는 죽여놔야한다고 생각합니다.
- 로열스 타자가 타석으로 들어서네요. 과연 조나의 선택은 어떨지! 경기 시작합니다!
“플레이 볼!”
마운드에 선 파인트는 글러브를 들어올려 얼굴을 가리고 오늘 선발마스크를 쓴 비어만을 바라봤다.
‘초구는 무조건 싱커.’
이미 비어만과는 오늘 경기의 첫 공을 정한 뒤였다. 이제 남은 것은 어떤 싱커를 던질지였다.
‘눌러버릴까?’
로열스를 상대로 전력투구로 기를 죽이는 것?
수도 없이 생각했다. 원한다면 오늘 경기의 시작을 95마일짜리 싱커로 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96마일을 뚫을수도 있었다. 그만큼 오늘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게다가 트로피카나 필드를 꽉채울 25,000명의 팬들은 그걸 원할 것이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힘을 빼고 맞춰잡는게 전체 게임 플랜이어야해.’
메이저리그에서 살아남는 것이 최우선 과제다. 마감 시한은 에디슨 포레스트가 돌아오는 그 날. 그 날이 오기 전에 파인트는 레이스에 꼭 필요한 선발이 되어야만 했다.
‘레이스에서는 압도적인 선발이 아니라, 이닝을 오래 먹어줄 수 있는 선발이 필요하다.’
레이스가 원하는 모습과 25,000명의 팬들이 원하는 모습까지, 둘 다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팬들의 기대를 채워주면서도 레이스를 만족시킬 수 있는 방법.’
생각을 정리한 파인트가 와인드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손을 떠난 공이 강렬한 소리와 함께 바람을 가르며 비어만의 미트로 날아들었다.
슈우우웅!
파아아앙!
미트를 찢어발길듯한 굉음과 함께 완벽하게 제구된 싱커가 미트에 틀어박혔다.
첫 공이 틀어박히는 순간 타자도, 관중도, 캐스터까지도. 경기를 기켜보고 있던 모두가 멈췄다.
96mph
“스트으으으라잌!”
위력적인 싱커가 완벽한 제구와 함께 존 안에 틀어박혔다는 것을 심판이 확인해준 순간 눌러있던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이거지! 바로 이런 걸 원했다고!”
“멍청한 로열스 놈들아! 봤냐! 고오오오맙다!”
관중들의 엄청난 환호성이 터지고 캐스트의 목청 역시 터져나갔다.
- 96마일! 아직 건재함을 보여주는 96마일짜리 싱커!
- 다운 단장이 웃고있는게 눈에 선합니다!
- J.J. 피콜로 단장은 울고 싶겠네요.
- 이미 울고있을지도 모르죠. 피콜로가 파인트를 버린 단장은 아니지만, 돌아온 그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는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거든요! 이렇게 된 이상, 피콜로는 조나가 남은 경기를 망치기만을 기도해야겠네요. 말씀드리는 순간 두 번째 공!
파아아앙!
또 한 번의 엄청난 소리와 함께 관중석에서 폭발적인 함성이 터져나왔다.
조오오오오나아아아아!
조오오오오나아아아아!
- 또 한 번의 95마일짜리 싱커가 박힙니다!
- 케이브가 배트를 휘두르며 반항해봤지만 공에 스치지도 못했어요!
세 번째 공으로 슬라이더가 유려하게 흘러나가며 1번 타자로 나선 케이브를 그대로 삼진으로 돌려세웠다.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심판의 콜과 함께 무심하게 돌아서 로진백을 집어든 파인트는 잔뜩 홀라간 기어를 끌어내렸다.
‘지금부터는 야수들을 믿고 맞춰잡는다!’
그리고 그의 등을 지켜주는 야수들에게 소리쳤다.
“투 아웃!”
***
경기장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이어지고 있는 와중, VIP 관중석에서는 또 다른 치열한 공방전이 오가고 있었다.
“속이 쓰리겠습니다?”
다운의 말에 피콜로가 쓰린 속을 감추며 웃었다.
“하하······ 속이 쓰리다뇨. 오히려 저희 팀을 대표하던 선수가 살아나서 기쁩니다. 만약 조나가 왔더라도 지금 저희 투수진이 워낙에 탄탄해서 자리는 없었을겁니다.”
“지금의 조나가 가더라도 자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 말 그대로 조나에게 전해드리죠.”
“뭘 또 전하기까지 합니까 하하······ 그나저나 오늘 시작부터 무리하는 것 같은데 저렇게 무리하다가 부상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모르겠네요.”
피콜로는 다운이 우려하고 있던 점을 정확히 찔렀다.
‘분명히 이닝을 먹는걸 최우선으로 처리해야한다는걸 알고 있을텐데······’
로열스와의 로테이션을 맞춰주기 위해서 오프너 두 명이 앞선 두 경기에서 선발을 맡았다. 이틀간 이어진 오프너 선발로 인해 불펜의 피로가 엄청나게 누적되어 있는 상태. 파인트가 무조건적으로 많은 이닝을 먹어줘야만 하는 경기였다.
‘무리하면 안될텐데······’
걱정이 스물스물 올라오는 순간 파인트가 두 번째 타자를 향해 공을 던졌다.
파아앙!
분명 같은 싱커성 무브먼트를 가진 공이었지만 속도가 달랐다.
90mph
90마일 중반의 싱커를 기다리다가 확 낮아진 싱커를 맞이한 2번 타자는 급격히 느려진 공에 힘겹게 배트를 가져다댔다. 하지만 그 결과가 좋을리는 만무했다.
틱!
드레이크는 앞으로 데굴데굴 굴러오는 공을 맨손으로 잡아서 넬슨 페레즈의 미트로 뿌렸다.
파앙!
주자가 1루를 밟은 뒤 1루심의 손이 올라갔다.
“아웃!”
그와 함께 다운의 입꼬리도 올라갔다.
“우리가 걱정하는걸 들은 것 같은데요?”
다운 역시 다른 선수들처럼 가족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있었다.
“역시 베테랑이 괜히 베테랑은 아닌 것 같네요. 로열스가 잡았다면 그쪽으로 가려고 했다던데. 감사합니다.”
일그러지는 피콜로의 얼굴에 괜시리 기분이 좋아진다.
< 53화 - 감사합니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