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은머리 MLB 단장-51화 (51/268)

< 51화 - 이래도? >

레이스의 트리플 A팀인 더럼 불스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들었어? 오늘 레이스 단장이 직접온대.”

“저번에는 조용히 왔다갔다지 않았어? 오늘은 아예 대놓고 오네?”

“우리 구단주님이 제발 이야기하고 와달라고 했대. 심장 떨어질뻔했다고.”

“그 양반이 심장이 떨어질 뻔 했······ 팬들이 죽고 못사는 비어만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니까 심장 떨어질뻔 하긴 했겠네.”

“이번에는 그래도 덜 떨어졌겠네. 대놓고 파인트 등판일에 왔잖아.”

“아니지. 이번에는 더 상심했을걸? 비어만도 비어만이지만, 파인트는 왕년의 에이스였잖아. 내가 매표 직원이랑 또 친하잖아. 그래서 들었는데, 비어만이 있을때의 1.5배래.”

“세상에! 그렇게나 늘었대?”

“왕년의 에이스가 우리 팀에서 뛴다는 것만으로도 팬들이 구장을 찾는 횟수가 늘었는데, 잘하기까지 하고 있었잖아. 아마 모르긴 몰라도 지금 구단주님 속이 말이 아닐껄?”

직원들부터 시작해서

“오늘 레이스 단장님 온다는거 들었어요?”

“당연하지. 오늘 나한테 제발 공 좀 왔으면 좋겠다.”

“평소에는 저보고 수비하라던 인간 어디갔어요?”

“오늘은 좀 양보해. 평소에 많이 잡았잖아.”

“퍽이나······”

선수들까지 모두 다운이 온다는 것을 떠들어댔다.

파인트의 불펜포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늘 단장 온다는거 들었어요 조나?”

“들었지.”

“당연히 조나 보러온거겠죠? 크! 이제 여기서 볼 수 없게 된다는게 슬피긴 한데, 또 즐겁기도 하네요. 내가 그 조나 파인트의 공을 계속 받아줬다니!”

감격한 표정의 불펜포수는 이내 파인트의 얼굴이 굳어있는것을 확인했다.

“어······ 죄송해요. 제가 너무 혼자 들떴죠?”

그가 무슨 오해를 했는지 알아챈 파인트가 굳은 얼굴을 풀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피터. 너 때문에 그런게 아니야. 오늘 다운이 온다는거에 긴장해서 그래.”

“긴장을요? 등판일에 이렇게 직접 온거보면 경기 마치고 데리고 가려고 온게 아닐까요? 저번의 그 비어만처럼요.”

파인트가 입술을 깨물었다.

“너희는 몰라. 다운이 얼마나 철저하고 계산적인지.”

대충대충 넘기는 것 같지만, 그 밑에는 항상 이유나 확신이 깔려있는게 바로 다운이라는 사람이었다.

“오늘 온 것도 날 꼭 데려가겠다는 의미는 아닐거야.”

다운이 파인트를 잘 아는만큼, 파인트도 다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오버페이스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직접 확인하려고 왔겠지.”

남의 의견도 잘 받아들이지만, 어떤 결정을 할 때 다운은 꼭 자신이 직접 보고 나서야만 결정을 하곤 했다.

“오버페이스 아니시잖아요.”

“난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지.”

어떤 책에서 그랬다. 한 번 걸어왔던 길을 다시 걸어가는건 쉬운 일이라고. 그리고 정점을 찍은 사람에게는 그게 더더욱 쉽게 느껴진다고.

장담컨대 그건 개소리다.

한 번 걸어봤기에, 그리고 정점을 찍어봤기에 지금의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보인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젠장할! 내가 쉬지만 않았더라면! 최소한 운동을 놓지만 않았더라면!”

다시 야구계로 돌아오기로 한 뒤 매일매일을 후회했다.

그만큼 다시 시작하는건 너무 힘든 일이었고, 최전성기와 비교했을 때 약해진 내 모습을 본다는건 버티기 힘든 일이었다.

“릴렉스 조나. 릴렉스. 언젠가 내 몸은 다시 예전의 모습을 찾을거야.”

자기 최면과도 같은 말을 매 순간 읊조리며 조급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조급한 마음을 먹고 오버페이스를 하는 순간, 다시 기름칠을 시작한 몸이 고장나버릴테니까.

하지만 이 모든건 자신의 생각일 뿐이다. 주변에서 봤을 때는 지금 이 모습조차도 오버페이스라고 생각할 확률이 높았다.

“지금까지는 계획대로 됐는데······”

오늘 경기가 가장 중요하다. 오늘을 망쳐버리면 지금까지 해놨던 빌드업들이 모두 망하게된다.

“뭐라했어요 조나?”

“아냐 피터. 힘 빼고 던져볼게 받아봐.”

슈우우웅!

평소와는 다르게 힘이 한층 떨어진 공이 파인트의 손을 떠나서 피터의 미트로 파고들었다.

파아앙!

옆에 있는 스피드건에 찍힌 숫자는 90마일. 최근 올라온 최고 구속과 비교했을때 5마일이나 낮은 수치였다.

“볼 끝에 힘은 여전히 좋은데 구속이 조금 아쉬운데요?”

“제구는?”

파인트의 말에 피터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최고죠!”

이에 파인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오늘은 한 층 더 몸에 힘을 빼고 던져야겠어.”

“여기서 힘을 더 뺀다고요?”

“이보다 더 빼지는 않을 거고, 90마일 선을 유지할 정도로? 그게 다운이 원하는것일테니까.”

잠시 후 심판이 플레이볼을 선언했다.

- 더럼 불스의 우완 에이스! 조오오오오나 파인트!

조나! 조나! 조나!

홈 팬들의 우렁찬 응원소리와 함께 파인트가 왼쪽 다리를 뒤로 한차례 뺐다. 그리고 크게 와인드업을 했다.

슈우웅!

파인트의 손을 떠난 공은 존 밖으로 나가는 듯 흘러가다가 이내 오른쪽 아래로 각도를 틀며, 포수의 미트가 있는 왼쪽 아래 모서리에 정확히 들어갔다.

파아앙!

“스트으으으 라잌!”

완벽한 제구에 깔끔한 변화각. 손끝에 남아있는 감각이 회전역시 잘 먹혔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유일하게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등 뒤의 전광판에 박혀있는

89mph

라는 숫자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파인트는 이런 자신의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 내 구속은 90마일이다.’

***

89마일이라는 숫자를 본 미키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늘 상당히 폼이 좋지 않은 것 같은데요? 혹시나 오버페이스를 해서 어깨에 무리가 온거 아닐까요?”

옆에 있던 거스가 딸의 추측에 고개를 저었다.

“아냐. 어깨에 무리가 왔다면 곧바로 강판을 요청했을거야. 파인트가 올 시즌 초 더블 A에 있을 때, 발목이 살짝 아린다며 이닝 시작 전에 연습구 한 개 던지고 곧바로 강판을 요구했거든.”

팀 입장에서는 날벼락같은 일이지만, 조심스레 다시 실전감각을 찾고 있는 파인트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예전의 길을 걸어갔다. 만약 이상이 있었다면 무조건 강판을 요구했을것이라는게 거스의 예측이었다.

“그런게 아니라 오늘은 최대한 힘을 빼며 공을 던지고 있는 것 같은데?”

거스의 말에 다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스 말이 맞아요. 오늘 조나는 힘을 완전히 뺐어요.”

“힘을 빼고도 트리플 A의 타자 정도는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인가요? 쇼맨십 같은건가?”

미키의 말에 다운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게 아냐.”

“그러면 뭐에요?”

“지켜보면 알 수 있을거야.”

그렇게 말하는 다운의 입꼬리는 살짝 말려올라가 있었다.

이닝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파인트의 공은 점점 맞아나갔다.

파인트가 아무리 힘을 뺐다고는 하지만, 트리플 A 타자들 역시 메이저리그에 가장 가까운 실력을 가진 타자들. 한 바퀴를 돌고난 두 번째 타석부터는 힘을 빼고 던지는 파인트의 공을 때려내기 시작했다.

따악!

주자가 1루에 나가고

따악!

1, 3루가 되며 득점권까지 주자가 진출했다. 하지만 파인트는 결코 주자가 홈을 파고들게 허락하지 않았다.

실점 위기가 되자 그는 아껴둔 힘을 투입했다.

슈우우웅!

무시무시한 소리로 그의 손을 떠난 공은 아까보다 한 층 괴랄한 각도로 떨어지며 말려들어갔다.

전성기 시절을 연상하게 만드는 파인트의 싱킹 패스트볼은 트리플 A 수준의 타자가 때려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럼에도 상대는 3번이라는 타순에 괜히 이름을 올린게 아니라는 듯 배트로 공을 맞추긴 했다.

틱!

루키였다면 갑작스레 피치를 올린 투구를 맞춰낸 타자에 당황할 만도 했다. 하지만 파인트는 수많은 경기를 치뤄온 베테랑.

파인트는 당황하지 않고 자신의 앞으로 굴러나온 공을 잡아 곧바로 3루에 던졌다.

무게중심을 앞으로 두고 눈치를 보던 3루 주자가 황급히 귀루를 했지만, 공이 담긴 3루수의 글러브에 터치당하는걸 피할 수는 없었다.

3루 주자를 아웃시킨 3루수는 지체하지 않고 2루에 공을 뿌렸다. 그리고 그 공을 받은 2루수는 다시 한 번 잽싸게 1루를 향해 공을 던졌다.

“아웃!”

“아웃!”

“아웃!”

3루부터 심판의 아웃콜이 연달아 터져나왔다.

- 더럼 불스의 트리프으으으을! 플레이! 주자 세 명이 사라집니다!

장내 아나운서의 경쾌한 외침에 따라 팬들 역시 환호성을 질러댔다.

“젠장할! 불스 놈들아! 너희가 최고야!”

“닉 이 자식! 평소에는 대충대충 수비하더니! 단장오니까 정신차렸냐! 제발 평소에도 그렇게 수비하라고!”

환호성을 지르는 관중들과는 달리 다운과 플래너건 부녀는 한층 차분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방금 94마일이 나왔어요. 싱커의 변화 각 역시 예전의 그 모습같았고요.”

“이 정도면 의도적으로 힘을 빼고 던진것 같은데.”

“우리가 오버페이스를 의심하고 있다는걸 알고 있나보네요.”

“쉬긴 했지만, 파인트도 메이저리그에서 구를대로 구른 베테랑이니까. 특히나 파인트 저 놈은 머리가 비상하기로 유명했어. 그렇지 않습니까 단장님?”

거스의 말에 다운의 입꼬리가 더욱 올라갔다.

“비상하죠. 너무 비상하죠. 그래서 지금 저한테 저렇게 시위하고 있는거고요.”

다운이 왔기에 힘을 뺐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하지만 오늘 그가 힘을 빼고 던지는 것에는 분명 다른 이유가 있었다.

“제가 장담하건대 조나는 저희 경기를 빠짐없이 챙겨봤을겁니다. 그리고는 알아챘겠죠. ‘아! 우리 레이스에는 이닝을 많이 먹어줄 수 있는 선발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구나!’라는 걸 말이죠. 요즘들어 불펜의 과부하가 심해지는것도 눈치못챘을 리 없죠.”

다운의 말에 미키가 경악했다.

“설마 그래서 최근 경기에서······”

“그래서 최근 경기들에서 이닝을 많이 먹은거죠. 6월들어 치른 경기들에서 평균 92마일, 최고 95마일까지 찍으면서 ‘나 이정도 던지면서 이닝도 이렇게나 먹어줄 수 있다!’라는걸 알려준거죠.”

“하지만 저희는 오버페이스라고 생각했잖아요.”

“그건 우리를 부르기 위한 쇼였어요. 오늘 조나가 던지는 공을 봐요. 그가 오버페이스를 하면서 투구한다면 분명 트리플 A 타자들을 상대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었을거에요. 그게 우리에게 인상을 남기기도 쉬웠을거고요. 하지만 오늘 그의 선택은 힘을 빼는거였어요. 그리고는 우리한테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너희 이닝 먹어줄 선발 필요하잖아. 내가 힘을 빼고 던져도 트리플 A에서 이렇게 이닝을 먹어줄 수 있어. 얘네가 못해서? 그게 아니야. 내가 힘을 쓰면 이렇게 압도적으로 던질 수 있지만, 너희를 위해 이렇게 이닝을 먹는 스타일로 던져줄 수도 있다는거야!’”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 순간 로진백을 바닥에 던지는 파인트의 눈이 다운과 마주쳤다. 그의 눈은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래도 나 메이저리그 안데려갈거야?’

그에 대한 답은 무척이나 쉬웠다.

“리타. 파인트 에이전시에 연락해서 스플릿 조항 발동한다고 전해주세요. 앤드류한테도 연봉 준비하라고 해주고요.”

< 51화 - 이래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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