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 Thanks buddy >
애스트로스를 맞아 개막 첫 시리즈를 2승 1패로 끊은 레이스는 로키스와의 인터리그 홈 3연전을 모두 쓸어담으며 최상의 스타트를 보여주었다.
특히나 일주일동안 이어진 홈 경기에서 극강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평균적인 홈 구장 관객 수가 1만 명을 넘었다.
“이대로만 가면 올 시즌은 정말로 평균 1만 명 이상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
고무적인 글라이드의 말에 다운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 원정 12연전을 어떻게 마무리하냐에 달렸겠죠.”
개막 이후 홈 6연전을 마무리한 레이스는
양키스 원정 3연전
파드레스 원정 3연전
오리올스 원정 3연전
매리너스 원정 3연전
이라는 지옥의 스케줄을 앞두고 있었다.
매번 가는 원정인데 왜 지옥이냐고?
미국 동북부에 위치한 뉴욕으로 날아가서 3연전을 한 뒤, 서남부에 위치한 파드레스로 날아가서 3연전을 치른다. 그런 다음에 다시 동북부에 있는 볼티모어까지 날아가서 3연전을 치르고, 마지막으로 서북부에 있는 시애틀에서 원정의 마무리를 짓는다.
그리고 나서야 마이 스윗 홈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저 일정 가운데에는 휴식일이 없다. 정말 지옥의 12연전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그런 스케줄이었다.
“빌어먹을 사무국. 대체 무슨 일정을 그딴식으로 짜는지······”
“저게 최대한 융통성 있게 짠거라는 대답이 어이가 없었죠.”
하여간 사무국 놈들이 하는 일 중에서 마음에 드는 일이 없다.
“다른 건 몰라도 양키스 놈들만큼은 꼭 눌러버리고 와 알겠지?”
지난 시즌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당한 것이 생각나기라도 했는지 글라이드의 눈이 무섭게 희번뜩 거렸다.
“분명 우리 팀 선수들도 양키스만큼은 갈아버리고 싶어할걸요?”
양키스가 버린 브래넌부터 시작해서, 데뷔도 전에 다른 팀으로 팔려간 넬슨 페레즈, 지난 포스트시즌에서 탈탈 털린 리키 더지까지.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레이스 선수단 중에서 겉으로 만큼은 양키스를 좋아할 선수는 하나도 없었다.
“눌러버리고 올게요. 그래서말인데 보너스 같은거 좀 없어요? 양키스 시절에 자주 써먹어봤는데 꽤 효과 좋던데······”
다운의 말에 글라이드가 입꼬리를 올렸다.
“보너스? 줄 수 있지. 근데 계속 그렇게 주다보면 구장 건설에 영향이······”
“보너스는 무슨! 밀머니면 충분할겁니다! 그럼 저는 이만!”
글라이드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자르고 나온 다운은 러셀을 찾아갔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줘.”
다운의 말에 러셀이 울상을 지으면서 26개의 봉투가 들어있는 가방을 넘겼다.
꾸욱!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가방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단장님 이거 재지급 안되는거 아시죠······? 절대 잃어버리시면 안됩니다.”
“잃어버리면 내 돈으로 메!꿀! 테니까! 제발 이 손! 놔!”
레이스의 원정 밀머니는 하루당 100달러. 12일짜리 원정 밀머니가 모두 지급되기 때문에 인당 1200달러가 지급된다. 저 가방에만 무려 3만 1200달러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잃어버리면 메꾸신다고 했던거 잊으시면 안됩니다! 녹음 다 해놨어요!”
“안 잊을테니까 제발 이러지 좀 마 에디!”
하여간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돈만 관련되면 저 모양이다.
그 모습이 하루이틀이 아닌지 주변 직원들이 숨죽여 큭큭대고 있었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안그럴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큭큭! 맞아요 단장님. 전 단장님은 해결책을 못 찾아서 첫 해 내내 시달렸었어요.”
대체 어떻게 원정때마다 저 징징거림을 1년이나 참을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클럽하우스부터 공항까지는 금방이었다.
“세인트피터스버그에 공항이 없었으면 어쩔 뻔 했어.”
지옥같은 하워드-프랭클린 다리를 지나지 않아도 세인트 피트-클리어워터 국제공항을 이용할 수 있었다.
차로 고작해봐야 15분 거리에 있는 저 공항이 아니었다면 다리 건너 탬파 국제공항까지 몇 분을 소비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레이스 소속 인원들을 태운 버스와 짐을 실은 트레일러는 곧바로 공항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전용기 앞에 멈췄다.
가장 먼저 비행기에 올라탄 다운은 비행기 내부를 빠르게 훑었다.
‘이런데서 또 돈이 없는게 드러나네.’
양키스에 있을 당시에 분명 구단 상황별로 비행기 내부가 다르다는 말은 들었었다. 하지만 대동소이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은 생각과는 달랐다.
양키스의 전용기 내부는 그야말로 선수를 위한 최적의 인테리어가 되어있었다.
선수들을 위한 침대와도 같은 일등석은 물론이고, 일반 직원들이 사용하는 공간 역시 웬만한 일등석 저리가라할 정도로 넓게 배치되어 있었다.
그래서 따라온 직원들이 편하게 업무를 볼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었다.
또한 편하게 뷔페식으로 식사를 할 수 있도록 빈 공간과 커다란 테이블도 준비되어 있었다.
양키스의 전용기가 호화로움의 극치를 보여주었다면, 레이스의 전용기는 가난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일반 비행기에서 바뀐건 딱 두 가지.
1. 비행기의 겉에 탬파베이 레이스의 전용기라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는 래핑.
2. 좌석 머리에 닿는 부위에 항공사 로고 대신 박혀있는 레이스 로고.
그것 이외에는 일반 비행기와는 차이점이 전혀 없었다.
물론 선수들에게는 일등석이 제공되긴 했다. 하지만 양키스 전용기의 일등석이 레이스의 일등석보다 1.5배 정도는 큰 것 같았다.
일반인보다 덩치가 큰 메이저리거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고, 아예 좌석이 180도까지 누워지는 양키스 시절의 일등석과는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였다.
“낸시 식사는 어디서 하죠?”
다운의 질문에 옆에 있던 운영팀 직원이 뒷쪽의 좌석을 가리켰다.
“오늘 비행은 짧아서 따로 준비된 것이 간식밖에 없는데요, 이쪽 좌석 위에 간이 테이블을 올려놓고······”
이런 상황에서도 최상의 경기력을 유지하는 레이스 선수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돈 많이 벌면 전용기부터 바꿔줘야겠다.’
다시 비행기 입구로 돌아간 다운이 가방을 펼쳤다. 그리고 계단에 줄을 서 있는 선수들에게 외쳤다.
“자! 요번 12연전 밀머니다! 카드치는데 쓰지 말고 제발 아껴 써라!”
다운의 말이 어떻게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선수들은 1200달러가 든 봉투를 받고는 환히 웃으며 자리로 들어갔다.
“감삼다 단장님!”
“잘 쓰겠습니다!”
꾸벅 받고 들어가는 선수들도 있었고
“얼마 들어있나요?”
페리시치처럼 첫 원정길에 오른 루키들은 얼마 들어있는지를 물어보기도 했다.
잠시 후 짐을 모두 실었는지 비행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비행기가 곧 이륙하겠습니다. 승객 여러분들은 안전벨트를 착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전용기이니만큼 짧은 안내방송 이후 비행기는 곧바로 이륙을 시작했다.
‘여기서 JFK까지 두 시간 반 정도 걸렸나?’
탬파 원정을 마치고 무조건 홈으로 향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확실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았다.
지금 확실히 느껴지는건 기분이 묘하다는 것이었다.
‘다시 양키 스타디움으로 가다니······’
그것도 집으로 돌아가는 편안함 대신에 쳐부숴야 한다는 사명함을 안고 돌아가게 되었다.
아무리 싫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거기 있는 선수들 중에는 앤드류 켈리와 같이 다운이 애정하는 선수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래서인지 마냥 즐겁고 기대된다는 마음이 드는 대신에 이렇게 복잡미묘한 감정이 드는 것 같았다.
다운이 복잡한 감정에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때 옆 좌석에 누가 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음?”
고개를 돌려보니 머리 숱을 턱에 갖다붙여놓은 듯 복슬복슬한 수염을 가진 브래넌이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제발 면도 좀 하면 안되겠어?”
다운의 말에 브래넌이 껄껄 웃었다.
“여기가 빌어먹을 양키스도 아닌데 수염을 깎을 필요가 있나.”
“양키스 떠나고도 몇 년은 수염 안길렀었잖아. 레이스에 와서도 마찬가지였고. 네가 수염을 기르기 시작한건 분명 머리가 빠지기 시작한 두 번째 시즌······”
다운은 자신을 죽일듯이 바라보는 브래넌의 눈빛에 말을 마무리할 수 없었다.
“헤이 다운. 그 이상 이야기하면 내 주먹이 움직일지도 모를 것 같거든. 신사답게 행동하자고. 알겠어?”
“언제는 남자다워지고 있는거라고······”
“혹시 낙하산 없이 스카이다이빙 해보고 싶어서 그러는거야?”
더 이상 말하면 정말로 비행기 밖으로 던져질 것 같아서 말을 멈췄다.
“근데 왜 왔어.”
다운의 말에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잔을 넘겼다.
“뭔데?”
“위스키.”
한 모금 정도 되는 위스키가 담겨있는 잔이 다운의 손으로 넘어왔다.
“우리 루키가 화장실을 갔다 오더니 나한테 와서는 이러더라고. ‘우리 단장님 표정이 엄청 무섭던데, 혹시 이번 원정 성적에 대한 압박감을 느낀게 아닐까요?’라고. 아니나다를까 지금 표정이 딱 어쩔 줄 몰라하는 강아지 같은 느낌이네.”
브래넌의 말에 다운이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평소의 웃는 낯에 비해 확실히 굳어있는 얼굴 근육들이 손끝에 느껴졌다.
“마음이 좀 복잡한가봐?”
그렇게 말한 브래넌이 위스키를 홀짝혔다.
“팔려간 뒤에 첫 원정에서 나도 똑같은 기분이 들었거든. 분명 빌어먹을 놈들인데, 쳐부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은데 그런 기분이 안드는거야. 그런 기분이 들 수가 없지! 양키스에 10년 가까이 헌신했는데 시원할 수가 없더라고.”
“그 시리즈 성적은 어땠는데?”
“뭘 어때? 안타는 커녕 출루도 못했지. 머리 속에서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는데 플레이가 제대로 나오기나 했겠어? 그러고나서 곰곰이 생각해봤지. 그런데 팬들이랑 양키스 선수들은 잘못한게 없더라고.”
이는 그대로 다운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다운은 선수단과 사이가 굉장히 좋은 편이었으니까.
욕하던 팬들도 있긴 했지만, 미래를 생각하며 ‘지금은 엿같지만, 결국 이게 양키스를 위한 길은 맞아!’라며 응원해주는 팬들도 있었다.
“오직 빌어먹을 스타인브레너 가 놈들이 나에게 그딴 엿같은 짓을 했고, 내가 복수해야할 대상은 바로 그 놈들이야. 그리고 그놈들에게 복수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지.”
“양키스의 패배.”
“맞아. 그놈들은 양키스가 패배하는건 못볼꺼야. 그것도 자기가 버린 놈들이 자신을 누르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하는건 더더욱 못 참을거고. 우리는 그걸 위해 저 자식들을 눌러야하는거고. 그러니 마음 약해지지마. 그리고 넌 나처럼 스타인브레너에게 ‘내 결정이 잘됐던거구나!’라는 생각을 들게 만들지 마.”
브래넌은 자신의 손에 있는 잔을 다운을 향해 내밀었다.
“지금 가진 감정은 딱 이 위스키 한 모금과 함께 삼켜버려. 우리는 프로로 놈들을 이겨야할 뿐이야. 물론 넌 경기장에서 뛰지 않지만, 난 네가 저 위에서 대런을 발라버리고 온 이야기를 꼭 듣고 싶어. 그래줄거지?”
다운은 손에 든 잔을 브래넌이 내민 잔에 마주쳤다.
탁!
플라스틱 컵이라 둔탁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다운의 귀에는 그 어떤 유리잔보다 시원스러운 소리로 들렸다.
“꼭 그러도록할게. 고마워 버디.”
< 32화 - Thanks buddy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