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난 억울해(탬파 신구장 조감도) >
12월 31일
이 날은 구장 관리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날 중 하나였다.
커다란 트로피카나 필드가 다른 날은 몰라도 이 날 만큼은 거대한 연회장으로 변하기 때문이었다.
“이쪽에 테이블 하나 더!”
“여기 식탁보가 없는데요!”
“음식 세팅 언제 되는거야?”
“저쪽에 피크닉 테이블 하나 더 세팅해줘요!”
한 해를 마무리하는 파티 겸 새로운 날을 위한 신년 파티가 바로 이곳 트로피카나 필드에서 열렸다.
물론 참석자들은 구단 관계자와 선수단. 그리고 그들의 직계가족과 연인까지만 가능했지만 말이다.
바삐 움직이는 직원들을 창문으로 내려다보고 있던 글라이드가 흐뭇한 표정으로 물었다.
“양키스에서는 이런거 없었지?”
글라이드의 질문에 다운이 웃었다.
“얼어죽을 일 있어요?”
양키스는 미국 동북단 뉴욕에 위치했다. 겨울에는 당연히 춥고 눈도 내린다. 게다가 양키스타디움은 지붕이 없는 개방형 구장.
따뜻한 탬파지역에 폐쇄식 돔구장인 트로피카나 필드이기에 할 수 있는 파티였다.
“햇빛이 없다는 것만 빼면 완벽할 것 같은데.”
글라이드의 말에 다운이 고개를 들어 새하얀 천장을 바라봤다.
“애 딸린 친구들은 좋아하던데요. 애들이 암만 돌아다녀도 구장 안일테니까. 어두운 곳에 있는 것 보다 낫기도 하고.”
“그래도 사람은 탁 트인곳에 있어야지. 햇빛도 들어오고, 달빛이 비추는 곳에서 저런 인조잔디가 아닌 천연잔디에서 뛰놀아야지.”
그러면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다운에게 눈을 돌렸다. 분명히 의미가 담겨있는 눈빛이다.
“어스틴. 혹시······ 신구장 이야기에 진척이 있었어요?”
글라이드가 슬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은.”
“와우!”
그의 말에 다운이 양 팔을 벌리며 짧게 환호했다.
“자세히 좀 이야기해줘봐요.”
글라이드는 옆에 붙어서 치근덕대는 다운을 슬쩍 밀어내며 웃었다.
“아직 확실히 이야기된건 없어. 하지만 시에서도 우리에게 새 구장이 있어야 한다는 건 인지하고 있더라고. 우리가 구장 건립비를 전액 부담한다는 말을 하니까 그쪽에서도 걸고넘어질게 크지 않은 모양이더라고.”
“신축할 구장이 들어설 장소는 있고요?”
“이미 이버시티에 구장이 들어설 곳을 확보해놨잖아.”
“다른 용도로 안쓰고 남겨놨대요?”
“아직까지는? 원래는 쇼핑몰을 지으려고 했는데, 그 계획도 한 번 엎어지는 바람에 아직까지는 공터로 남겨뒀다더라고.”
“그래도 다행이네요. 플랜 B까지 갈 필요는 없으니까요.”
글라이드는 혹시나 싶어서 올랜도 시와도 슬쩍 이야기를 하는중이었다.
“탬파와 세인트피터스버그 관계자들이 그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야.”
“아하! 올랜도에는 절대 내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잡은 모양이네요.”
“지금 당장은 일단 잡고보자는 마인드인 것 같아서 조금 더 이야기를 끌어보긴 해야할 것 같아.”
“설계도는 그대로 받아왔어요?”
드레이크와의 계약 당시 이버시티에 지어질 구장에 대한 조감도와 설계도를 받아올 예정이라고 공수표를 날렸었다.
“설계도 및 조감도는 예전에 신구장 이야기가 나왔을 때 만들어놨던걸 받아왔어. 시의회에서도 우리가 올랜도로 넘어가면 좋을게 없을테니 이걸로라도 환심을 사보자는 이야기가 나온 모양이야.”
“거짓말한게 아니라 다행이네요.”
“하하. 구장 조감도라도 보여줬어?”
“네. 워낙에 이버시티 구장이 예쁘게 뽑혔었잖아요.”
“그렇긴 하지.”
사실 트로피카나 필드에 비해서 안예쁠 구장이 어디 있겠냐만은.
“예상되는 비용은 어느정도래요?”
“2억 8000만 달러 정도 들어갈거라던데······ 보통 이런걸 진행하다보면 돈이 더 들어갈 때가 많아서 조금 더 비용이 발생할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야지.”
“넉넉잡아서 3억 달러 조금 넘겠네요. 구단에서 빨리 수익을 내야겠는데요?”
다운의 말에 글라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얼마가 더 들어가든 구장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해결할테니까 넌 적자만 안나게 해.”
“알겠어요.”
“돈 부족하지는 않지?”
“부족하다고 하면 페이롤이라도 늘려주시게요?”
다운의 말에 글라이드가 놀리듯 웃었다.
“그럴리가 있나. 신 구장 건립 무효화 해?”
“잘못했습니다. 구단주님.”
일 이야기가 끝나자 주제는 자연스레 개인적인 이야기로 넘어갔다.
“요새 만나는 사람 있냐?”
어느새 입장하기 시작한 선수단과 직원들, 그리고 그 가족들을 보며 글라이드가 물었다.
“없죠. 그럴 생각도 없고요.”
부모님을 대신해서 ‘넌 결혼은 대체 언제 하니? 손주보려다 저승사자 먼저 보겠다!’라며 잔소리를 하려나 싶었다.
그런데 글라이드의 반응은 달랐다. 그는 다운의 말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생각했다. 결혼은 어? 인생의 족쇄야! 최대한 늦게 해야하는게 바로 결혼이란 놈이라고!”
글라이드의 반응에 다운이 황당한 얼굴로 말했다.
“언제는 제니퍼 아주머니가 그렇게 좋다고, 결혼은 너무 행복하다고 하셨던 분이······”
“크흠! 내 말은 행복했지만, 늦게 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거지.”
유부남들이란······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딱 5년만 버텨. 그리고 그때도 마음에 들면 결혼해 알겠지?”
“제가 또 인생 선배들의 조언은 잘 새겨듣는 편이라서요.”
씨익 웃어준 다운이 다시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슬슬 나가보시죠. 선수단이랑 인사도 하셔야죠.”
다운과 글라이드는 아직까지 선수단과 만난 적이 없었다.
작년에는 빠지는 선수들도 꽤나 있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새 구단주와 단장을 보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선수단 전원이 참가했다.
“배리 브래넌!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기쁘네!”
“하하! 구단주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랜 레이스 팬이셨다고요?”
“아주 오랜 팬이었지. 양키스에 있을때는 싫었는데, 이렇게 우리 팀에 있는걸 보니 든든하구만. 앞으로도 팀 리더, 그리고 베테랑으로 루키들을 잘 보살펴주게나.”
“호오! 자네가 우리 미래 네이트구만!”
“하하하! 구단주님! 앞으로 제가 레이스를 최고의 팀으로 만들어내겠습니다!”
“허허! 그 패기가 아주 마음에 들어! 자네가 새 구장에서 화려한 플레이를 펼치는 모습을 기대하고 있겠네.”
“사무엘! 비어만! 너한테 걸고 있는 기대가 커.”
“기회만 주시면 꼭 잡아보이겠습니다!”
“여기 있는 다운이 아마 기회를 줄거야. 그렇지 않을거면 데려오지도 않았을거고. 그러니 믿고 노력하게. 기회가 왔을 때 콱 움켜쥘 수 있도록.”
글라이드는 선수단을 누비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가 워낙에 말을 잘하다보니 다운은 그저 이름을 말하는 것 말고는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너무 말 안하는거 아냐?”
“어스틴이 너무 말을 잘하니까 제가 할 말이 없는걸 어떡해요?”
“말 줄일까?”
“괜찮아요. 어차피 스프링 트레이닝때 뻔질나게 볼 얼굴들인걸요.”
선수단이 가족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글라이드와 다운은 곧 한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쪽 전광판에 크게 숫자가 올라왔다.
2:00
그와 함께 장내 아나운서이자 오늘 사회를 맡은 모건 브래넌이 마이크를 잡았다.
- 곧 새해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겠습니다. 다들 잔을 채워주세요!
수많은 사람들이 앞에 있는 잔을 채우고 나니, 어느덧 2021년이 10초밖에는 남지 않았다.
전광판에 10이라는 숫자가 크게 올라왔다. 그와 함께 장내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소리치기 시작했다.
“Ten!”
“Nine!”
“Eight!”
“Seven!”
“Six!”
“Five!”
“Four!”
“Three!”
“Two!”
“One!”
“Happy new year!!!”
2022년 새해가 밝았다.
“새해 복 많이 받아요 어스틴. 꼭 오래오래 사시고요.”
“너도 많이 받아라 다운. 월드시리즈 반지로 한 손 다 채울때까지는 제니 곁으로 못가니까 그렇게 알고.”
“그러면 재계약 하시겠다는거죠?”
“그건 네놈 하는거 봐서지. 어딜 거저 먹으려고 그래? 팀이 망할 것 같으면 넌 바로 모가지야 이 놈아.”
역시 신년에는 덕담이 오가야 하는 법이다.
“그나저나 지금쯤이면 슬슬 전화올때가 됐는데······”
의미심장한 다운의 말에 글라이드가 고개를 갸웃했다.
“만나는 사람 없다며?”
“만나는 사람은 저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겠죠? 곧 연락 올 사람은 저한테 악감정이 치솟아서 연락올걸요?”
“무슨 짓을 했길래?”
“신년 선물로 기사 하나 나갈거거든요.”
아니나 다를까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 호구같은대런
발신자를 확인한 다운이 전화를 받았다. 물론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았기에 수화기에 귀를 대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다아아아아아우우우우우운!]
받자마자 화가 가득한 대런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어우야 대런. 고막 터질뻔했네.”
전혀 데미지가 없었지만 이렇게 해줘야지 더 열받는다는걸 아는 다운이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아 그래도 신년이라고 축하해주려고 전화한건가? Happy new year!”
[다임러 그 새끼 알고 보낸거지!]
“왜? 다임러한테 무슨 일 있었어? 메디컬적인 문제는 전혀 없었는데.”
[메디컬이 아니라! 하! 제에에엔장! 그 자식 집에서 손찌검하는 개자식인거 알고 보냈냐고!]
“이야~ 크리스 다임러가 그런 개자식이었다고? 그건 또 몰랐네.”
다운의 말에 대런이 한 층 더 열을 올렸다.
[그걸 다운이 몰랐다고요? 그게 말이나 된다고? 내가 널 아는데?]
말을 하면서 화가 더 올라왔는지 마지막에 가서는 젠틀하던 말투마저 사라졌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기억안나? 그 날 내 첫 출근날이었어. 취임식도 있었고. 선수들의 성적이야 알고 있었지만, 사생활까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듣고보니 맞는말이라고 생각했는지 대런도 입을 꾹 닫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다운이 출근한 첫날부터 다임러의 사생활에 대해서 알았을 리는 만무했다.
‘물론 알고 있었지만 흐흐흐······’
정보를 흘린 것도 대런을 비롯한 다른 사람은 전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파고 들어가면 레이스 직원이 알고 있다는 말은 나올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수를 쓰더라도 다운이 흘렸다는 사실은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해봤자 그 뒤에 알았다고 말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이성이 돌아온 대런의 뇌 역시 같은 판단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다운이 다임러의 집안사정까지 알지는 못했을 거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
“미안하다고? 됐어. 그럴수도 있는거지. 대신 나한테 욕한거 다 녹음된건 알지? 그것도 내가 알지못하는 내용으로 욕한게 다 들어가 있다고. 나한테 빚 한 번 진거다?”
[······ 알겠습니다. 미안해요 다운.]
원하는 걸 얻어낸 다운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통화종료를 눌렀다.
“흐흐······ 귀엽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전화를 마친 다운이 고개를 들었다.
“응?”
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 글라이드를 포함해서 어느새 옆에 다가온 파트장들까지, 다들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그 표정들은.”
정말 모르겠다는 다운의 말에 글라이드를 비롯한 사람들이 한 마디씩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놈을 데려온 건 잘한 일은 것 같아.”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구단주님. 천성이 악마에요.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나봐요.”
“성선설을 믿고 있었는데, 인간은 원래 악한게 맞는 모양이네요······”
그저 열심히 일했을 뿐인데······
억울할 따름이다.
< 24화 - 난 억울해(탬파 신구장 조감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