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하고싶은대로 해라 >
레이스는 케빈 캐시 감독이 맡아서 잘 이끌어오고 있었다.
2018년의 유의미한 활약 덕에 6+1년의 장기계약으로 2024년, 최대 2025년까지 레이스의 감독으로 계약이 되어있는 캐시.
“새 감독 구할건 아니지?”
다운은 그를 해임하고 새로운 감독을 구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진 않을거야.”
캐시는 탬파 출신인데다가 누구보다 레이스 사정을 잘 알고 선수단을 활용할 줄 아는 감독이었으니까. 다운의 말에 브래넌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선수단이 많이 불안해하더라.”
“케빈이 인망이 좋은가봐.”
“다들 그를 좋아하거든.”
저것만 봐도 캐시를 잡아야하는 이유가 분명히 보였다.
문제는 그의 건강이었다.
“수술은 잘 끝났다지?”
“다행히도.”
캐시는 시즌 직후 진행된 건강검진에서 위에 자그마한 종양을 발견했다.
구단에서 1년마다 시행하는 검진에서 발견된 터라 다행히 암의 진행도는 1기.
“요즘은 복강경으로 회복도 빠르다더라.”
“얼마나 걸린대?”
“어느정도 격한 움직임을 가져갈 수 있으려면 두 달은 잡아야 한다더라.”
감독은 사실 크게 움직이지 않아도 큰 문제가 없는 직책이다. 하지만 캐시는 몸을 움직이는걸 선호하는 스타일.
예전과 같은 감독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3~4달까지는 지켜봐야한다는 의사의 충고가 있었다.
“정규시즌 스타트까지는 감독 없이 가야지. 캐시한테는 우선 회복에만 집중하라고 했어. 지금 우리 코치진도 믿을만하니까.”
말을 끝맺음과 함께 다운은 브래넌의 가슴을 툭쳤다.
“그리고 우리는 네가 있잖아 배리. 선수단 흔들리지 않게 분위기 딱 잡아주고, 코치들 많이 도와줘. 알겠지?”
브래넌이 피식 웃었다.
“이러려고 1000만 달러 넘게 줬구만?”
“고액 연봉을 받는 베테랑이 있는 이유지. 안그래?”
“아주 뽕을 뽑아드시려고 하네.”
“그게 다 연봉에 포함되어있는거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브래넌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무릎을 쳤다.
“아, 그러고보니 아까 새로 온 마케팅 파트장이 나보고 오늘 준비하고 오셨냐고 물어보던데 그게 무슨 말이야?”
“뭐야? 에이전트한테 못 들었어?”
두 쌍의 눈이 에이전트를 향해 돌아갔다. 우락부락한 두 남자의 부리부리한 눈빛에 에이전트가 잘게 몸을 떨었다.
“그, 그게 계약이 안되면 오늘 당장에 할 수 없는 일이라서······ 그, 그래도! 오늘 남은 시간은 비워뒀습니다!”
저렇게 심약해가지고 이 험한 업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으려는건지.
브래넌도 같은 생각인지 안쓰러운 눈으로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설명은 다운한테 들으면 되니까 검토 끝나면 말해.”
“별거 아냐.”
다운은 심슨이 말해줬던 계획을 그대로 브래넌에게 전달했다.
“그러니까 오늘 스토어가 닫을때까지 직원 옷을 입고 일하고, 내 유니폼을 사는 팬에게는 사인과 함께 그 금액을 내가 내준다는거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우리가 내줄거야.”
다운의 말에 브래넌이 손을 내저었다.
“에헤이! 그 정도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의도도 좋은데 못낼게 뭐가 있겠어?”
그리고는 개구진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재밌겠는데? 그러면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도 써.”
“다들 안쓰고 다니는데?”
“감기 때문에 쓴다고 하면 되지. 혹은 신경쓰여서 쓰는거라고 그래.”
“그러면 몇 명이나 해주는게 좋을까?”
“음······ 내 생각에는 10명 정도가 적당할 것 같은데?”
다운의 말에 브래넌이 호탕하게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열 명? 누구 코에 붙이라고? 그냥 오시는 분 다 해드리자!”
“힘들텐데?”
“어차피 비시즌이라 스토어는 오후 7시면 닫잖아? 계약 소식 보낸다고 해도 12시에 보낼 생각이니까 고작해야 7시간이야. 몇 명이나 오겠어?”
“그러다 많이 오면 어쩌려고?”
“그분들도 다 내 팬이라서 온거잖아? 기꺼운 마음으로 해드려야지. 하하!”
“그래 뭐······”
힘들어도 네가 힘들지 내가 힘든가.
다운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싶은대로 해라.”
***
션은 오랜 레이스의 팬이었다.
8살에 처음 탬파에 메이저리그 구단이 들어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트로피카나 필드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어릴때는 구장 수족관에 있는 가오리가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자주 갔었는데, 그게 어느덧 그게 어느덧 20년이 넘었다.
그 오랜 시간동안 션이 매 시즌 하는 일이 있었다. 바로 매 시즌 가장 기대되고 좋아하는 선수의 유니폼을 사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랑은 아니지만 자신은 꽤나 안목이 있는 편이었다. 자신이 찍은 선수는 항상 좋은 활약을 선보였고, 실패한 적이 없었으니까.
덕분에 팬 커뮤니티에서 션은 나름 유명인사였다.
Jackblay : 션 올 시즌 유니폼은 안 사요?
Vlaber : 아직 올해가 지나지 않았잖아. 기다려봐 션이 곧 다음 시즌의 선수를 지명해줄거니까.
Richking : 해를 넘기기 전마다 지명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잘 맞추는지 모르겠네. 올해에도 과연 그게 이어질까?
SimonNpunk : 누가됐든 이어지면 좋지! 적어도 한 명은 잘하는거잖아?
다른 팬들이 기다리는 와중에도 션이 아직까지 유니폼 구매 사진을 올리지 않는 것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브래넌이 느낌이 오는데······”
션이 최근 가장 좋아하던 선수는 브래넌이었다.
양키를 미워한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 엄청난 타격실력도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탬파에는 오랜 기간 없었던 어린 선수들을 이끌어줄 리더라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션은 그의 유니폼을 사지 않고 있었다. 첫 시즌에는 좋은 활약을 보인 다음 트레이드 될 거라고 생각해서, 그 다음 시즌에도 트레이드 될 거라고 생각해서 그를 찍지 않았다.
그 생각은 올해도 변함이 없었다. 브래넌과 같은 선수가 850만 달러라는 싼 값에 쓸 수 있는데 눈독들이지 않을 팀이 어디있겠는가.
“아······ 브래넌 말고는 다른 선수는 느낌이 안와······”
이럴 때 딱 브래넌이 연장계약했다는 오피셜이 뜨면 좋겠는데······
이런 생각을 속으로 하고 있을 때, 뒤에 있는 동료가 어깨를 툭 쳤다.
“이봐 션. 그 뉴스 봤어?”
탬파에서 태어난 주제에 양키스를 응원하는(물론 양키스의 스프링 트레이닝 구장이 탬파 시내에 트로피카나필드보다 더 좋은 위치에 있긴 하다.) 빌어먹을 놈이다.
“무슨 뉴스.”
퉁명스러운 션의 말에도 그는 웃으며 폰을 내밀었다.
“네가 좋아할만한 뉴스가 나왔던데?”
“곧 점심시간인데 밥맛떨어지게 만들 생각이냐?”
“그럴리가. 이번에는 진짜 네가 좋아할 것 같은 뉴스라니까?”
“이번에도 양키스가 돈지랄을 해서 누굴 영입했다는 뉴스면 내가 너한테 지랄을 해주······”
그를 잘근잘근 씹던 션의 입이 멈췄다. 그의 눈이 고정된 화면에는
- [오피셜] 배리 브레넌 레이스와 5년 최대 5750만 달러에 계약.
오매불망 기다리던 바로 그 뉴스가 떠 있었다.
“브라보!”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친 션이 겉옷을 챙기고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밥 먹으러 간다! 이따봐!”
사무실에서 튀어나온 션은 곧바로 차를 몰고 트로피카나 필드로 향했다.
점심시간이라 세인트피터스버그로 향하는 길은 출퇴근시간만큼 막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빌어먹게 막히는 길임은 여전했다.
“그래도 공식 스토어에서 사야지!”
인터넷에서 사도 되지만, 그때까지 기다리고싶지 않았다.
지난 2년간 참아왔던 배리 브래넌의 유니폼을 얻기 위해서라면 1시간 반 밖에 되지 않는 점심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충분했다.
“주차장이 텅 비었네.”
오늘은 금요일. 주말이 코앞인데다 점심시간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처럼 이렇게 점심시간을 희생하면서까지 트로피카나 필드로 올 미친놈은 많지 않을 터.
션은 주차를 한 뒤 여유롭게 스토어를 향했다.
“어서오십쇼!”
걸걸하고 호탕한 목소리가 스토어에 울려퍼졌다. 마스크를 쓴 커다란 덩치의 직원이 다가왔다.
“무엇을 찾아 오셨습니까?”
다른 때였다면 부담을 느꼈을 직원의 행동. 그럼에도 오늘의 션은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요새 오프시즌이라 장사가 잘 안되나? 엄청 반가워하네.’
얼마나 장사가 안됐으면 저렇게까지 할까. 괜히 안됐다는 생각이 든 션이 웃으며 답했다.
“유니폼을 사려고요.”
션의 말에 직원의 눈이 커졌다.
“오! 누구 유니폼을 찾으십니까?”
레이스 공식 스토어에서는 항상 빈 유니폼에 선수의 이름을 즉석에서 마킹해주곤 했다.
그걸 모르는 걸 보니 아무래도 오늘 처음 온 직원인 모양이다. 혹은 파트타임으로 일하러 와서 처음 손님을 받은 것이거나. 물론 파트타임 치고는 마스크 위로 보이는 얼굴이 그렇게 어려보이지는 않았다만.
옆에 있던 다른 직원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어리버리한 직원에게 귓속말로 속닥거렸다.
“기본 홈 유니폼 상의 한 벌 주시겠어요? 2XL로요.”
“어서가서 가져오세요.”
“2XL! 알겠습니다!”
“그리고 손님은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알파벳들이 담겨있는 바구니를 가져온 직원이 물었다.
“누구 이름으로 마킹해드릴까요?”
“배리 브래넌이요.”
그의 말에 어느새 다가온 덩치 큰 신입이 눈웃음을 치며 옆에 있는 유니폼을 건넸다.
“오늘 기사 보셨나보네요!”
션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다시 떠오른 사실에 신이난 션이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2년을 기다렸는지. 그리고 이번 계약으로 드디어 유니폼을 사게되서 얼마나 기쁜 마음인지, 브래넌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큰지를 한껏 떠들어댔다.
어찌된 일인지 자신의 칭찬이 이어질수록 눈 앞에 있는 사람의 마스크가 점점 올라가서 내려오질 않았다.
“배열은 이렇게 괜찮으시겠어요?”
BRANNON
“네! 괜찮아보이네요.”
“어? 약간 틀어졌는데요?”
자신이 보기에는 괜찮아보였는데 옆에 있던 어리버리한 직원이 이름 배열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첫 번째 N이 가운데보다는 조금 왼쪽으로 치우쳐져야돼요.”
디테일한 그의 말에 션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런것도 아세요? 브래넌 팬이신가봐요?”
“하하하! 집에 브래넌이 직접 입었던 유니폼이 많아서요.”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혹시 우리······”
아는 사이인지를 물어보려 하는데 마킹이 유니폼에 붙는 시원한 소리가 귀에 들렸다.
치이이익!
이 소리. 그리고 뭔가가 살짝 익는듯한 이 냄새. 압착기가 열리자 배리 브래넌이라는 이름이 마킹된 새하얀 유니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순간은 얼마나 기다려왔던가!
션의 손이 유니폼으로 향하려던 그 순간.
“여기면 되겠지.”
어리버리한 모습만을 보이던 직원이 펜을 들어 두터운 손으로 순백의 새하얀 유니폼 위에 낙서를 했다.
“어, 어······?”
션이 얼이 빠져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사이에도 그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좋아 잘됐네. 이름이 어떻게 되죠?”
“어······ 션이긴 한데.”
“스펠링은?”
“Shawn. 근데 지금······ 무슨 짓을······?”
To Shawn
자신의 이름까지 새겨넣은 직원이 유피폼을 들어보더니 마음에 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잘됐네!”
그의 안하무인한 행동에 가출했던 션의 넋이 돌아왔다. 그와 동시에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당신······”
‘대체 뭐하는 짓이야! 제정신이야?’라고 화를 내려던 순간, 그 직원이 마스크를 내렸다.
“······은 마이! 갓! 배리 브래넌?”
다시 한 번 혼이 나간 션에게 브래넌이 웃으며 유니폼을 건넸다.
“하하하! 내 유니폼을 가장 먼저 사준 션! 특별히 내가 너에게 이 유니폼을 선물로 사줄게 하하하!”
아직까지 정신이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션의 입은 자신이 해야할 일을 했다.
“혹시 같이 사진 좀······”
“하하! 얼마든지!”
잠시 후 션과 브래넌의 사진이 커뮤니티에 올라갔다.
< 20화 - 하고싶은대로 해라 > 끝